웹소설과 로맨스
웹소설 로맨스 판타지 장르 속 여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가문을 일으키거나, 백작이나 공작 작위를 받거나, 자력으로 미래를 바꿔버리거나. 물론 그 곁에서 ‘초초초미남’들이 사랑을 갈구한다.
여성 일반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수많은 증거가 있지만 그중 과장된 도시 전설이 하나 있으니, 바로 여성들이 남자의 외모보다 성격(혹은 내면)을 더 중시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물론 외모가 아닌 다른 장점을 발견하고 나아가 육성하는 여성의 능력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울 때도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단호히 아름다운 남성을 선호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웹소설, 그중에도 로맨스를 읽으면서다. 아주 드물게 예외가 있지만(원래 초미남이었지만 전투 중에 큰 상처를 입었다든가, 눈이 번쩍 뜨일 미남은 아니고 준수한 훈남이라든가 하는 정도) 조아라와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되었던 키아르네 작가의 <후작과 수리공>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자 주인공이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라고 하면 마음속에 스치는 첫 생각이 “응, 얼굴만은 잘생겼으니까”여야 한다. 심지어 사랑에 빠지기 전이어도 최소한 얼굴만은 잘생겨야 한다. 여성향 소설을 읽는 일의 재미기도 하다. 최근의 웹소설, 그중 로판(로맨스 판타지)이 잘 보여주는 재미이기도 하다.
로맨스 소설이라고 하면 90년대 초반 학교 교실에서 몰래 돌려 읽던 할리퀸 로맨스 정도만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현재 한국 창작 웹소설은 경천동지의 세계다. 장르가 다양한 것은 물론이고, TV 연속극처럼 고정 팬을 확보한 작가군이 존재하며, 분량도 일반 소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긴 글을 못 읽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웹소설로 연재되어 이북(단행본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으로 출시되는 로맨스 소설의 길이를 한번 확인해보시길. 조남주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약 7.6만 자다. 이북 서비스 플랫폼 리디북스에서 독자들이 참여한 ‘2017 리디북스 로맨스 대상’ 최고 여주상을 수상한 안경원숭이 작가의 <황제와 여기사>는 총 네 권에 약 84만 자다. 그 시절과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로맨스 소설이 ‘수입’되다가 이제 ‘창작’된다는 사실에 있다. 창작 로맨스가 나온 지는 20년도 넘었지만 웹소설 플랫폼에서 연재되면서 그 확장세는 눈부시다. 분량도 단편부터 5~8권에 이르는 장편까지 다양하고, 장르 역시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일상물부터 환생을 비롯한 판타지물, 동양 역사물과 서양 역사물 등이 있다. ‘19금’ 딱지를 붙인 작품만 해도 서브장르가 다양하다. BDSM을 다루거나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루거나, 역하렘물(한 여자가 많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인 경우도 있다. 이런 중에 최근 활약이 가장 눈부신 서브장르는 로판이다. 앞서 언급한 <후작과 수리공> <황제와 여기사> 모두 로판에 속하며, 네이버 웹소설 이진백 리더의 말을 인용하면 “최근 몇 년간 새롭게 주목받는 여성향 웹소설 장르로 로맨스 판타지(로판)”를 꼽을 수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준이다.
로맨스 판타지는 무엇인가. 명명 그대로, 로맨스와 판타지를 혼합한 내용이다. 하지만 로맨스 장르는 태생부터 판타지다. 할리퀸 로맨스 시절부터 그랬다. 아니, 로맨스 소설의 원조 격으로 꼽히는 제인 오스틴 시대부터 그랬을 것이다. 다아시 같은 남자가 있냐고! 지금 나는 분노하는 것이다. 현실 남자들이라는 절망의 늪에서… 어쨌거나 로맨스라는 장르는, (남성 간의 사랑을 그리는 BL이나 여성 간의 사랑을 그리는 GL이 아닌 다음에야) 여성과 남성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결혼해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결혼도 임신도 육아도 다소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끝내주게 잘생기고 부유하며 다정한 데다 ‘나만 아는’ 남편 덕분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로 완성된다. 이게 판타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역하렘물의 경우는 남자 주인공이 세 명이어도 네 명이어도 전부 ‘개성 다른 초초초미남’들이다. 소설을 읽으며 아무리 상상해도 그런 남자는 한 명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의 능력은 언제나 과대평가된다. 이 역시 판타지적이다. 19금 로맨스라면 일단 페니스의 크기가 남다르고(“저렇게 큰 게 몸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재력이 남다르고(로판의 경우 대체로 남자 주인공은 기사단장, 황제, 제국의 공작이다), 일상물이라면 최소한 다정함(‘달달물’이라고 태그되는 작품이 있을 정도다)이 남다르다. 이 모든 것은 애초에 판타지다. 네이버 웹소설 이진백 리더는 “웹소설은 독자들의 욕망, 판타지가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 만날 수 없는 캐릭터 등을 하루 20~30분간 웹소설을 통해 경험하고 거기서 짜릿한 쾌감을 누리고자 함이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설명하는데, 즉, 현실과 멀면 멀수록 재미가 더해지는 셈이다. 하지만 로판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하늘가리기 작가의 <루시아>는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된 뒤 이북으로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외전을 포함해 총 여덟 권, 84.7만 자의 소설이다. 이북 플랫폼인 리디북스를 기준으로 보면 별점을 464명이 매겼고 평점은 5점 만점에 4.5점이다. 일단 시대적 배경은 가상 시대다. 역사물을 표방하는 많은 작품 역시 시대가 현재가 아니라는 뜻이지 고증을 철저히 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물의 어떤 면을 ‘차용’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제 역사에서 여성들의 삶이 별로 낭만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해 향수에 젖을 역사가 여성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상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루시아>가 시작되면, 주인공 루시아는 꿈에서 본 미래 그대로의 현재를 살고 있다. 꿈대로 초경을 시작하고 편두통이 찾아온다. 황제의 열여섯 번째 공주인 루시아는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은 백작에게 돈으로 팔려가는데, 결혼 생활은 성적 학대가 이어지는 악몽 자체였다. 그런 미래를 꿈으로 본 루시아는 미래를 바꾸기로 한다. 자신이 미리 본 미래의 지식을 활용해 자신의 삶을 의탁할 수 있는 공작 휴고에게 찾아가 결혼을 제안한다. 그에게 혼외자인 아들이 이미 하나 있는데 그 아이를 후계로 삼고자 하는 의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계약 결혼을 하고, 이내 진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루시아는 꿈을 통해 미래를 봤지만, 최근 인기인 로판 작품은 ‘환생물/회귀물’의 형식을 하고 있다. 현실에서 수험생이거나, 자살을 기도했거나, 근근이 먹고살며 고통받던 여성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읽던 판타지 소설 속이나 완전히 낯선 가상 시대에 도착해 있다. 대체로 귀족가의 영애로 일종의 ‘환생’을 하는데, 그러면서 현대의 지식(요리라든가 의학 지식이라든가)을 잘 활용해 다른 여성들을 돕고 자기 자신을 구하고, 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남자의 사랑을 얻는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세 글자를 소설로 옮기면 로판이 되는 셈이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남자의 사랑을 얻는 게 지상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을 인정받아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 자신의 힘으로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여자 주인공들이 로판에 등장한다. 바로 로판 중에서 여기사물의 인기가 그것이다. <황제와 여기사>는 카카오페이지 연재 당시 28만 구독자가 읽었다는데, 황제는 말도 안 되는 꽃미남이고 여자 주인공인 기사 폴리아나는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캐릭터다. 오랜 전쟁에서 함께 싸우며 순수한 전우애이던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는데, 그 감정을 먼저 깨닫는 것도 황제고 매달리는 것도 황제고 더 절박한 것도 황제다.
로판은 여성의 행복이 결국 ‘행복한 결혼’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로맨스 서사 그대로지만 여성 캐릭터 면에서는 전과 다른 파격이 자주 눈에 띈다. 차서진 작가의 <리셋팅 레이디>식으로 중반까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악녀 캐릭터가 등장해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이끌어간다거나,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정받고 집안을 이끈다거나, 나아가 여성으로서 백작이나 공작 작위를 받거나 황제 자리에 오른다거나 하는 설정이 자주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이 폭력적이거나 이야기가 구태의연하면 바로 웹소설 댓글난에 항의성 댓글이 올라오고, 이야기에 반영된다. 내 입맛에 딱 맞게 달콤한 마카롱을 먹는 기분을 맛보기 위해 ‘독자들이 키운’ 장르가 바로 로판이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민경복
- 모델
- 김민지
- 글쓴이
- 이다혜 (작가, 북 칼럼니스트)
- 스타일리스트
- 윤수현
- 헤어
- 이경혜
- 메이크업
- 류현정
- 세트 스타일링
- 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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