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의 난제, 폐기되는 화장품
‘지속 가능’을 울부짖는 뷰티 생태계에서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난제가 있다. 이름하여 기한 만료, 처치 곤란, 하자 있는, 한마디로 결국 쓰레기가 될 화장품.
자랑은 아니다. 자랑은 아닌데, 명색이 뷰티 에디터인 내 방 장롱 두 칸은 옷 대신 화장품이 가득하다. 스킨케어, 메이크업, 헤어, 보디는 물론 제품별 카테고리대로 ‘언젠가의’ 신제품이 칸칸이 채워져 있다. 덕분에 화장품 지출 비용이 제로에 가까우니 남들의 부러움도 사지만, 한 분기만 지나도 감당 불가할 정도로 뉴 페이스들이 밀고 들어오는지라 제때 정리해두지 않으면 그야말로 ‘호더’의 방처럼 혼돈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크나큰 결심과 함께 실행하는 대망의 정리 시즌. 이때마다 나의 스트레스성 발모벽을 유발하는 주인공은 바로 유통기한이 지난 수십 개의 화장품이다. 포장재야 재활용된다 쳐도, 그 안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보면 오만 감정에 휩싸인다. 휴일에 사서 노동을 하고 있다는 스트레스,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자괴감과 후회, 아쉬움과 해당 브랜드 담당자를 향한 심심한 사과의 마음까지…
‘EXP(Expiry Date)’ ‘BB/BBE/BE(Best Before End Date)’ 또는 ‘6M’ ‘12M’으로 표기되는 화장품의 유통기한은 해사한 피부를 유지하는 데 ‘디폴트’로 여겨야 하는 정보다. 카테고리나 제형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립이나 아이 제품은 사용 후 6개월 이내, 자외선 차단제나 파운데이션, 스킨케어 제품은 개봉 후 1년에서 1년 반 이내에 바르는 것이 기본 원칙. 개봉하지 않았더라도 제조 이후 3년이 지난 화장품은 거두절미하고 무조건 사용 금지다. 색조 화장품에 관심 많은 ‘코덕’이라면 일명 ‘가네다(가루 이즈 네버 다이, 가루는 죽지 않는다)’라는 용어도 들어보았을 것. 가루 화장품, 즉 블러셔나 아이섀도의 경우 유통기한과 상관없이 최대 3년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입증된 바도 있는, 완벽히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알코올로 살균하지 않는 한 피부에 위협적이긴 마찬가지다. 기한이 지난 화장품은 폐기 과정조차 순조롭지 않다. 스킨케어와 색조 화장품 전부 내용물은 페이퍼 타월 또는 신문지에 흡수시키거나 감싸 일반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 물에 흘려보내는 것이 속 시원할 테지만 화장품 제형은 그야말로 해양 생태계에 치명적이니까. 한 가정에서만 이토록 수많은 쓰레기가 나오는데, 하루에도 수많은 제품을 생산하는 뷰티 월드의 폐기물을 상상해보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양일 것이다.
“화장품 산업에서 생산되는 쓰레기의 양을 추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식품이나 타 업계처럼 엄격히 추적하지 않기 때문이죠.” 글로벌 컨설팅 기업 ‘액센츄어(Accenture)’의 뷰티 파트를 담당하는 디렉터 오드리 디프리터-몬태슬(Audrey Depraeter-Montacel)은 “여전히 터부시되는 주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화장품의 재고 및 반품 처리 방법에 대한 인터뷰를 거대 글로벌 뷰티 기업 대부분이 회피하고 거절한 것만 미뤄보아도 짐작된다. 클린 뷰티 브랜드, 네이버후드 보태니컬스(Neighborhood Botanicals)의 창립자 미카엘라 니스벳(Micaela Nisbet)에 따르면 전체 뷰티업계의 생산품 중 약 10%는 소매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폐기되고, 재고까지 따지면 카테고리별로 20~40%의 화장품은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버려진다. 가판대의 테스터, 일회용 샘플까지 따지면 그 양은 블랙홀처럼 무한대로 증식하는 미지의 수치다. 과연 이 수백, 수천만에 이를 제품의 분리배출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질까?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한 글쎄, 끝내 모를 일이다.
모든 비즈니스의 재고 발생 구조처럼 결국 핵심적인 문제는 수요와 생산의 불균형이다. 제조 공정을 위한 최소의 주문량과 소비자의 수요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포장재와 내용물 모두 지속 가능하도록 개발된 비건 화장품이라고 다를까? 환경은 덜 오염시키더라도 제조 과정에서 이용되는 천연자원을 생각하면 무분별한 낭비가 일어나긴 마찬가지. 프랑스 스킨케어 브랜드 갈리네(Gallinée)는 이러한 재고를 병원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지만 그 품목은 매우 제한적이다. 간혹 아마존(Amazon)과 같은 글로벌 셀링 업체의 소매상들이 유통기한에 관계없이 비인기 제품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으나 재고 문제를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선 임시방편이 아닌 브랜드와 소비자의 일방적인 소통 관계, 할인 판매에 대한 뷰티 월드의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뷰티 비즈니스가 수요에 비해 넘치는 공급의 밸런스를 조절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책은 바로 커스텀 제작. 즉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제품의 종류와 개수의 범위를 좁혀 생산하는 것이다. 실현 수단으로는 가상 시험 사용(Try on) 서비스, 팬데믹 시대에 급성장을 이룬 가정용 시험 키트 등이 활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서비스는 개인의 화장품 폐기물을 줄이는 것은 물론, 온라인 주문에서 반품률 감소에 효과적이라고 입증된 바 있다. “이를테면 브랜드는 머리가 길거나 곱슬기가 심한 사람들을 위한 샴푸를 200만 개 생산한 다음에야 소비자를 찾으려고 노력하죠. 아직도 수많은 브랜드가 이러한 방식으로 제품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제품은 완벽하다고 광고하고요. 결국 소비자의 입맛을 고려해 세밀하게 화장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폐기물의 절대적인 수치를 결정합니다.” 가정용 시험 키트를 기반으로 한 스킨케어 브랜드 퓨어 컬처(Pure Culture)의 CEO이자 공동 창립자 조이 첸(Joy Chen)의 말이다. 실제로 맞춤 제작 또는 주문 생산 화장품은 스타트업 브랜드뿐 아니라 로레알, 에스티 로더와 같은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이 카테고리에 따라 도입하는 자구책이다.
이번엔 조금 색다른 접근 방식이다. 식품업계는 쓰레기 감소에 그 어떤 산업보다 진일보한 분야다. 우리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익숙한 수단을 통해서다. 바로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을 30~50%가량 할인한 가격에 판매하는 것. ‘가성비’라는 메리트는 국적, 세대 불문 어디서든 통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과연 뷰티 월드에서도 이 할인 판매라는 고전적인 방책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화장품의 유통기한에 다다를수록 세균 증식의 위험성은 상승하고 효능은 떨어지기 마련인데, 브랜드 이미지의 리스크를 껴안는 꼴이니 말이다. 그러나 갈리네의 창업자이자 약학 박사 마리 드라고(Marie Drago)는 여기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소비자와 나누는 효율적이고 정직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합니다. 할인 판매할 경우, 평소 투명한 유통기한 공지는 물론 그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제품이라도 실망스럽지 않은 상품이라는 인식을 기존에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죠.” 프랑스 비건 메이크업 올 타이거즈(All Tigers)의 대표 알렉시 로비야르(Alexis Robillard) 또한 최근 하자가 있는 제품에 대한 30% 할인 행사를 진행하며 “소비자와 친구 같은 관계로 꾸준하고 편안한 마케팅을 하죠. 할인 가격에 구매한 소비자 대부분이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네이버후드 보태니컬스는 패키지가 미세하게 손상된 제품으로 일명 ‘팩토리 세컨즈(Factory Seconds) 컬렉션’이라는 반값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해 하루 만에 한 달 치 매출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물론 제품 카테고리에 따라 이 방법은 수많은 이견이 존재할 터. 하지만 조금만 다른 프레임으로 바라보자. 오히려 데드라인 때문에 더 빠르게 소진할 수 있는 아이템을 합리적으로 소비할 수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은 해결책이다.
결국 맞춤 주문형 제작이든 할인 판매든 두 가지를 관통하는, 폐기되는 화장품 양을 절대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하나다. 기존 ‘톱다운’ 소통 방식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 산업과 제조 공정의 표준보다는 소비자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우선시해야 한다. 브랜드는 알맞은 상품을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 배치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소비자는 자신과 환경을 고려한 현명하고 까다로운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위협적인 폐기량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파운데이션과 로션으로 절여진 쓰레기 산이 창문 너머 풍경이 되어버리는 것도 시간문제. 그렇게 된다면 그저 거울 앞에서 우아하게 바르고 치장할 수만은 없을 테니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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