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튼, 이대로 사라집니까?
힐튼 호텔은 할리우드 수준의 영화를 1980년대 충무로 제작 현장에서 실현한 것과 같다. 힐튼 철거는 질문을 던진다. 전통 건축과 근대 건축의 보존과 유지 논의가 활발한 지금, 현대 건축은 자본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도 괜찮은가.
2021년 3월 처음으로 힐튼 호텔(힐튼) 매각설이 흘러나왔지만, 건축계와 문화 예술계의 여론이 부정적이자 금세 철회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엔 연기가 나지는 않는 법. 결국 지난해 12월 힐튼을 운영하는 CDL은 이지스자산운용에 매각한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한 건축물의 존재가 물리적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이 건축물이 우리 시대와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되짚어봐야 한다.
6·25전쟁을 겪고 피란 갔다 폐허가 된 서울로 돌아온 열여덟 소년. 건축이란 개념을 몰랐지만, 무언가 짓는 일을 업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 소년은 1954년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하고, 1956년 일리노이공과대학(IIT)이 있는 미국 시카고로 향했다. 한밤중에 시카고 작은 공항에 내려 택시를 잡고 학교로 가는 길, 이제 막 준공을 마치고 학생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는 크라운 홀을 필연처럼 만났다. 그가 나고 자란 서울에서 본 건물과는 완전히 다른 문법과 분위기를 가진,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건물. “까맣게 칠한 가냘픈 철 구조물로 구성된 육면체가 동양인 피부의 혈색이 모두 없어지게 하는 그런 인광 같은 전등 빛으로 빛나고 있었어요.” 그 앞에서 청년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근간까지 흔들리는, 자신의 경험을 도끼로 내리친 듯한, 새로운 세계에 당도한 것이 그제야 실감 나지 않았을지. IIT 건축학과에서 공부하고, 미스 반 데어 로에 사무실에서 일한 그는 IIT 건축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미국에서 평탄한 건축가의 인생을 걷던 그에게 어느 날 시카고 대우 지사장이 연락했다. 김우중 회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힐튼 인터내셔널 위탁 경영을 원칙으로 하는 호텔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외국에서 공부한 능력 있는 건축가를 영입해 이 건물 설계를 의뢰하고 싶다고. 그는 휴직계를 내고 떠났다가 그대로 한국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한다. 이 건축가가 바로 김종성이다. “20세기 한국 건축계에서 현대 건축의 원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건축가. 김종성은 미스의 유산을 지속적으로 해석하고 확장해 자신의 방법으로 발전시켜나갔다”고 박정현 건축 평론가는 평가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미스에서 파생한 세계 근대 건축의 한 계보를 한국에서 실현할 수 있었다.
1983년 힐튼이 문을 열 당시 한국은 국제 수준에 걸맞게 건물을 지을 기술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미스 반 데어 로에 사무실에서 12년간 근무한 김종성은 자신의 네트워크와 정보를 총동원해 힐튼이라는 공간을 현실화했다. 힐튼의 알루미늄 커튼월은 뉴욕 시그램 빌딩의 브론즈 커튼월을 설계·제작·시공한 업체인 플라워 시티(Flour City)에 위촉해 디자인하고, 국내 효성 알루미늄이 압출·제작·시공했다. 플라워 시티는 검수 및 시공 과정도 확인했다. 호텔 인테리어는 그가 미스 사무실에서 ‘토론토 도미니언 뱅크’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은 존 그레이엄이 맡았다. “내가 건축가로 28년 일하는 동안에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게 힐튼이에요. 가장 시공을 잘한, 그러니까 예산이 좋았다는 얘기예요.” 김종성은 허허 웃으며 회상했다. 힐튼은 당시 서구의 최신 기술, 디자인, 재료를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그대로 구현했다. 그건 할리우드 수준의 영화를 충무로 제작 현장에서 실현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것도 1980년대 초반 해외여행이 불가하던 시절에. 힐튼은 김종성이라는 걸출한 건축가가 만든 서구와의 핫라인과 당시 건설 현장의 의욕이 합작해 이룬 결과다. 선진화되고 싶었던 우리의 열망과 야망과 집념이 이룩한 한국 현대 건축의 집대성. 지금도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효율성에 시달리는 지금 건축 현장에서는 가닿을 수 없는 공간의 풍요로움이 넘실거린다. 메인 로비 정면 입구에서 서쪽까지 64m, 지하 1층에서 2층까지 높이가 18m. 시원하게 뚫린 아트리움이 주는 해방감이 온몸으로 쏟아진다. 로마 건축물 재료 90% 이상을 사용한 트래버틴과 알프스에서 채석한 녹색 대리석 베르데 아첼리오(Verde Acceglio), 기둥을 감싸고 있는 브론즈. 2000년 이상 사용된 재료를 정교하게 배치해 타임리스를 구체화하고 물질화한 공간. 이 우아하고 성숙한 환대는 과거의 최첨단이 지금의 클래식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힐튼은 오는 12월까지 영업을 마치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퇴장할 것이다.
힐튼 철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전통 건축, 근대 건축과 관련해 보존과 유지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 사이, 우리의 현대 건축은 자본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진다. 이러다 100년 뒤 지금 우리 시대가 남겨야 할 건축 문화는 공백이 될지도 모른다.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한 건축가의 작업은 어떻게 기록되고 후대와 연결될 수 있을까. 급진적 파괴, 단절이 아니라 축적하고 이어가기 위해 건축의 토대를 쌓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 도시의 건축물이 빠르게 사라지는 가운데 무엇으로 우리는 건축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한다. 김종성 역시 “언젠가는 소위 커다란 쇳덩어리 기계가 힐튼을 팡팡 내리칠 텐데 그건 늦었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지난 40년 사이 지어진 많은 건축물, 김수근, 이희태, 김중업 같은 선배 작가가 설계한 건물은 보존되어야 할 게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가 법으로 이를 보호하는 규정을 만드는 건 아주 시급합니다”라고 강조한다. “미국에는 사실 문화재라는 등급이 없는데, 시그램 빌딩은 뉴욕시에서 레지스터드 랜드마크(Registered Landmark)로 지정해 현 소유주가 문화재 제도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내부만 바꾸었어요. 피카소가 만든 태피스트리 같은 인테리어는 없애버렸지만. 적어도 지자체가 지정한 현대 건축물은 보존 대상으로 간주하고 사회적 합의를 시도해야 합니다.”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을 선보인 주거 혁명의 선구자이자 현대 건축의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 17개가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현대 건축가의 건축물 전체가 등재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르 코르뷔지에의 업적은 과거의 건축 방식을 넘어 ‘새로운 건축 원칙과 기술’을 발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밝혔다. 20세기의 건축이 인류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972년 구로카와 기쇼가 설계한 일본의 나카긴 캡슐 타워(Nakagin Capsule Tower)는 현대 캡슐 호텔의 효시로 불린다. 일본 메타볼리즘 건축 사조를 구현한 이 급진적 디자인의 타워는 고층으로 지은 뼈대에 원룸 같은 캡슐을 교체하면서 수백 년을 사용한다는 것이 초기 계획이었다. 캡슐 교체 주기는 25년. 일본의 모듈 주택과 캡슐형 숙박 시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나카긴 캡슐 타워는 소유자가 제각각이라 캡슐 교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2021년 3월 건물관리조합에서는 건물 부지 매각을 결의했다. 건물은 사라지지만 일부 캡슐은 유산처럼 남겨져 다른 장소에서 재사용될 예정이다. ‘나카긴 캡슐 타워 건물 보존·재생 프로젝트’는 철거 전 건물 곳곳을 기록으로 남기는 책을 만들고 있다. 건축은 사라져도 상세하고 애틋한 기억, 그 기억이 전달할 기록 문화는 남게 됐다.
우리의 경우 1977년 완공된 김수근의 공간 사옥이 등록문화재 기준 5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긴급한 보호 조치의 필요성이 공감을 얻어 2014년 등록문화재가 됐다. 지정문화재와 달리 등록문화재는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내부를 일상생활에 맞게 개조하거나 수선이 가능하다. 공간 사옥은 일부 전시장으로 변경되었지만, 기존 공간의 틀은 그대로다. 황두진 건축가는 <월간 공간>이 진행한 ‘건축 유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대담에서 “개발이냐 보존이냐라는 논의가 과연 0과 1의 문제처럼 딱 떨어질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0이면 완전히 철거하는 것이고, 1이면 문화재로서 경복궁 관리하듯이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건물은 0과 1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건축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는 사회적으로 폭넓은 논의와 공감대, 성숙한 인식이 필요하다. 건축물이 한 시대의 물질과 기술, 미학의 결정체이자 그 시대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면 더더욱. 많은 건축물이 자본에 의해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시대, 힐튼은 사라져도 우리에게 유의미한 질문을 남겼다. “이대로 무너져도 됩니까?” 이 질문은 이제 다른 현대 건축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 점검하게 할 것이다. (VK)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 글
- 임나리(워드앤뷰 콘텐트 디렉터)
-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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