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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을 기리며 그리워하다

2022.05.20

by VOGUE

    강수연을 기리며 그리워하다

    배우 강수연이 유명을 달리했다. 삶이 곧 한국 영화였던 그녀의 제단에 추모의 단상을 채집해 올린다.

    2010년 11월호 <보그>에 실린 강수연의 포트레이트.

    어디가

    질문은 겉돌았다. 호기롭게 준비한 질문은 아직 하기도 전이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은 그만하면 됐고 야심 차게 마련한 질문을 던지고, 이윽고 흥미가 생긴 상대가 인터뷰의 중심으로 깊숙하게 들어오기를 바랐다. “우리는 그때 맥주를 마셨어요.” 나를 그 자리에 내보낸 편집장과의 예전 인터뷰 얘기였다. “인터뷰인지 뭔지 몰랐어. 너무 재미있었어.”

    <GQ> 에디터일 때 나는 정말 특별한 편집장을 가졌었다. 누구라도 그대로 옮기기만 해도 허리가 휘도록 웃길 수 있는 에피소드가 나의 편집장 이충걸에게는 매일 차고 넘쳤다. 나는 그녀의 회고에 풍구질을 했다. 편집장의 최근작을 아낌없이 전했고 그녀는 크게 웃었다. 이제는 그가 아닌 내 차례여야 했다. ‘어떻게 지내세요’ 따위의 하품 나오는 질문을 할 것도 아니었는데, 여전히 그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낮에 맥주를 마신 편집장과의 인터뷰에 머물며 그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급기야 “충걸 씨, 오면 안 되나? 동대문에서 금방 넘어오잖아. 오라 그래봐”까지 나왔다.

    두산 잡지가 동대문 두산타워에 있던 무려 2000년. 그 명랑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감싼 애교 넘치는 말투에 하마터면 ‘편집장님, 강수연 씨가 택시 타고 당장 오시래요’ 할 뻔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편집장님도 오시고 싶어 하실 텐데… 발행인 보고-둘러대는 말짱 거짓말 1위-도 있고. 저도 아쉬워요”로 막았다.

    잠깐의 정적. 실제는 몇 초, 1분도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마가 뜨는 것’을 못 견디는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서 그 참기 힘든 대화의 공백을 메우곤 하는데 하필 “저, 어릴 때 강수연 씨 닮았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가 나오고 말았다. 실제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웃자고 한 얘기라는 의도가 전해지기만 바랐다. ‘어, 그러네, 있네, 있어’를 기다리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강수연은 가만히 있어도 동그란 눈을 더 똥그랗게 뜨고 낭랑하게 물었다. “어디가?” “네?” 예상 못한 질문에 반사 신경은 저런 누추한 음절을 소리 내게 했다. 그녀는 조금 웃으며 다시 물었다. 꼭 대답하라는 듯 “그러니까, 어디가?” 도대체 어디가 닮았냐는 말이었다. “어, 뭐, 여기저기.” 메이크업 룸에서 다음 촬영을 위해 옷을 정리하던, 이제는 없어진 잡지 <보그걸>의 후배들이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는 소리가 대포처럼 들렸다.

    강수연 VS 배우

    강수연에게 그녀를 닮았다고 했다가 어디가 닮았냐는 대답을 들은 창피함의 끝은 사실, 좋았다. 개화기 소설가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라도 말할 것을. 여기저기라니. 도대체 어디가 닮은 거냐고 몇 차례 더 물은 그녀는 창창했던 호기를 잃고 당황해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에디터의 팔에 따뜻한 손을 댔다 떼고는 밝게 웃었다. 그리고 영화처럼 “이제, 우리 해요” 했다.

    인터뷰 내용은 신실했고 촬영은 멋이 있었고 결과물은 사랑스러웠다. 좋은 인터뷰를 한 기자에게는 따로 연락해 잘했다고 해주냐고 인터뷰를 끝내며 물었을 때는 “아니, 자기들도 알 텐데 뭘” 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기사로 나오면 잘했다 해달라고 졸랐다. 이미 인터뷰를 하면서 강수연의 매력에 흠뻑 빠진 데다가 눈앞에서 나 너 닮았다고까지 했는데 더 못할 말도 없었다. “뭘 잘 해. 나처럼 나오면 잘했다 아니다 할 것도 없지. 나보다 잘 나오니까 잘했다고들 하겠지. 있는 대로만 써요. 한 대로만.”

    나는 있는 대로만 한 대로만 써도 칭찬을 받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전화 같은 건 오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들어선 신사동의 한 식당에서 마주친 그녀는 먼저 알아보고 반색하는 것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마음에 드는 인터뷰였다고 예의 그 따뜻한 손으로 합석을 권했다. 이후 여러 번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행운이 나를 따랐다.

    그때마다 강수연은 순도 100의 배우였다. 무장이 해제되어 사람이 배우보다 앞서는 날 같은 건 없었다. 친밀도의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강수연에게 배우는 해제하거나 무장해야 하는 갑옷이 아니라 그 자체여서 벗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배우와 인간의 삶의 부등호가 어느 쪽으로 입을 벌렸느냐는 어리석은 질문 같은 것도 그녀에게는 맞지 않았다. 강수연은 배우일 뿐,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 더 친해졌을 때, 인터뷰 연기 잘하는 배우들의 연기에 속아 가짜 인터뷰를 하게 되면 어쩌냐는 스물여덟 살 난 기자의 질문에 서른다섯의 배우는 “그게 왜 가짜야. 인터뷰라는 극 안에서는 진짜지. 너도 완전 감동해서 잘 쓰는 기자를 하면 되지” 했다. 마주 보고 웃었다. 돌이켜볼수록 그저 웃고 스치기엔 무겁고 어려운 말이었다. 마흔아홉이 된 그 기자는 쉰여섯에 배우를 놓아버린 그 영정 앞에 서서 지금 어디쯤, 왜 가 있는 거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가짜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짜인 질문이었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17호

    사진작가 구본창이 찍은 사진이 쓰인 영정. 정면을 직시하는 강수연의 눈빛은 형형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내 동공 뒤에 도사린 감정을 읽어낼 것만 같던 그 눈빛 그대로 자신의 어깨를 안고 있었다. 대단한 조백이 와도 빚어내지 못할 것 같은 완벽한 두상과 폭이 좁고 산이 높은 입술이 달싹이며 까랑까랑한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은데 벌린 듯 다문 채 움직임이 없다. 헌화도 분향도 상주에게 으레 하는 위로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어 서 있다 나왔다.

    얼마나 슬프니, 좋은 데 가셨을 거야. 마음을 잘 추슬러. 짧은 위로 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사람들과 저도 모르게 잔을 부딪치고 머쓱해하다 산 사람들끼리의 후일을 도모하는 자리. 상주가 아니라 망자의 지인으로 들어선 그곳에서는 아무 할 게 없었다. 남편도 자식도 하나 떨궈놓지 않아, ‘당신의 아내는, 당신의 엄마는 정말 훌륭했습니다’조차 할 수 없었다. 슬픔에 잠긴 유가족과 유가족보다 더 분주한 영화계 거장들이 안타까움으로 마른손을 비비고 있을 뿐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불편한 걸음걸이가 다급하게 빨라졌다 느려졌다 망연해했고 김동호 위원장은 영화인들에게 상주이자 문상객 대표였다. 그들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오랜 친구인 헤어 디자이너 오세일이 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일찍 가지 마. 수연이가 금방 가는 거 싫어할 것 같아. 늦게 가. 물이라도 먹고 가. 더 놀다 가.” ‘더 놀다 가’에서 울지도 못하게 놀랐던 눈이 울기 시작했다.

    강수연이라는 영화사(史)

    영화를 몇 편이나 찍었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셀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는 게 무의미해 보였다. 1966년생이 1969년 네 살부터 영화배우가 되어 심장이 그만 뛰기로 작정한 쉰여섯 살 5월 <정이>까지. 56년을 살다간 이 땅에서 배우로 산 시간이 51년인 강수연의 필모그래피는 그대로 대한민국 영화의 역사였다.

    1987년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동양인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강수연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호명될 영광의 이름이 된 것이다. 1985년 <고래 사냥 2>로 더 이상은 아역 배우, 하이틴 배우가 아님을 천명한 뒤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세계적인 연기력을 확정받았고 그 후 행보는 대한민국 영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포스트모던의 기치를 올리던 지성적인 젊은 감독들의 득세는 강수연으로 완성되었다. 1991년 <베를린 리포트> <경마장 가는 길>, 1992년 <그대 안의 블루>. 당시 시대상으로는 대경실색할, 섹스는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 <그 여자, 그 남자>를 넘어 1995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페미니즘의 존재감을 아로새기더니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는 여자의 생식기가 예쁘지, 남자의 것은 그게 뭐냐고 깔깔댔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오늘까지도 잊지 못할 난정으로 분했고 스스로는 잔잔한 연기는 잘못한 것 같다는 <문희>도 강수연만 할 수 있는 문희였다.

    이후에는 영화계가 강수연에게 가장 크게 빚을 지는 시기가 온다. 남루한 때를 맞은 부산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한 것. 그녀는 씩씩하고 꿋꿋하게 지켜냈고 헌신의 가치가 무엇인지 비로소 보여주는 것으로 그 유명한 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를 되뇌이게 했다.

    시대와 세대

    시대와 세대는 알다시피 다른 말이다. 부연하건대, 시대가 역사적인 어떤 표준에 의해 구분한 일정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면 세대는 공통의 체험을 기반으로 해 공통의 의식이나 풍속을 전개하는 일정 폭의 연령층이라고 정의한다. 강수연 세대는 그녀와 연령층이 비슷하거나 위아래로 몇 살에서 몇십 살을 차이에 두어 그녀의 영화를 취할 수 있었던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수연의 시대라면 어떤가? 그토록 훌륭했던 여배우가 표준이 된 일정한 시간이라면 오늘도 강수연의 시대는 현재진행형이다. 강수연의 시대를 향유하고 싶은 아름다운 다음 세대를 위해 그녀의 영화를 권한다. 6월 5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열리는 ‘위대한 유산: 태흥영화 1984-2004’ 특별 상영전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상영 중이다. OTT 플랫폼에서도 그녀의 영화를 찾을 수 있다. <송어>, <달빛 길어올리기>, <베를린 리포트>, <장미의 나날>, <그대 안의 블루>, <씨받이>,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한반도>, <약속한 여자>, <주리>, <감자>, <고래 사냥 2>, <지독한 사랑>, <블랙잭>, <써클>, <영화판>,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게 된 상황이 애달프지만 마지막으로 <D.P.>, <지옥>, <괴이> 등을 만든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에서 제작하고, 눈물로 애도했던 연상호가 감독한 <정이>에서 최근의 강수연을 확인할 것도 강권하겠다. 더 이상 그녀가 새로 촬영하는 작품은 없다.

    러브 액츄얼리

    2003년에 제작된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휴 그랜트가 연기한 영국의 총리 데이비드는 미국 대통령이 영국을 무시하자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작은 나라지만 위대한 나라다. 셰익스피어와 처칠, 비틀스, 숀 코네리, 해리 포터의 나라다.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발, 데이비드 베컴의 왼발도 가진 나라다.” 그러고는 “영국을 위협하는 미국은 친구가 아니다. 힘으로 맞서겠다. 미국은 그에 준비해라”라는 말이 이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스케치북 고백 같은 명장면이 아닌 바로 이 기자회견 장면이다. 나는 대통령이 될 리 만무하고 대통령 연설 비서관 혹은 비서관이 가끔 전화해 청와대의 영광스럽고도 고된 일상을 토로하는 친구, 그런 비서관 친구를 둔 것을 자랑하는 그 친구의 동생의 친구도 못 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의 대표가 되어 연설의 내용을 갈아 끼우며 복기의 즐거움을 홀로 누린다.

    영화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 호명의 맨 앞은 강수연이었다. 우리는 강수연, 차범근, 김연아를 가진 나라다. 그리고 그 연설은 종종 내용이 바뀐다. 어느 해는 강수연, 박지성, 김연아, 방탄소년단, 또 그다음 어느 해는 강수연, 손흥민, 김연아, 방탄소년단, 봉준호. 또 그 사이에 빠지거나 바뀌는 사람이 있을 때도 있지만 그 수는 늘어만 가는 중이다. 그러면서 ‘작지만 위대한 나라다’는 어느새 늘어난 사람들의 수에 걸맞게 ‘크기와 상관없는 위대한 나라다’로 고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해보지 않고도 20년 가까이 혼자 바꿔 말해가는 이 스피치는 계속 레벨 업 중이다. 강수연은 이제 가고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 맨 앞은 강수연이다. 강수연이었다가 아니라 강수연이다. (VK)

      조경아(전 'GQ' 에디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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