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와 우성’의 인생, 영화, 화보
별들의 세계에서 이정재와 정우성은 늘 가장 빛나는 스타다. 그런 두 인물이 영화 <헌트>로 23년 만에 한 작품에서 만났다.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가 있다고 했다. 봤던 영화를 다시 보고, 글로 표현하고, 끝내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 그렇다면 연기는 물론 제작과 연출까지 하는 이 두 남자는 대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한다는 얘긴가. 이정재와 정우성이 만난 첫 영화 <태양은 없다>는 1999년 1월 개봉했다. 가진 거라곤 잘난 몸뚱이와 허세뿐인 흥신소 직원 홍기를 연기한 이정재는 자신의 얼굴을 알린 초콜릿 광고 카피처럼 ‘신세대 감각파’의 표상이었고, 권투 선수 도철을 맡은 정우성은 ‘반항하는 젊음’ 그 자체였다. 전작 <비트>로 이미 정우성과 호흡을 맞춘 김성수 감독은 두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해 1990년대 욕망의 거리 압구정동을 배경으로 젊은 남자들의 꿈과 진한 우정을 그렸다. 영화는 꽤 흥행했다. 화제성은 그보다 더 컸다. 촌스러운 꽃무늬 셔츠조차 정우성이 입자 유행했고, 곳곳에서 서처스의 올드 팝송 ‘러브 포션 넘버 나인’이 흘러나왔다. 이정재는 그해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이들의 잘생긴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은 폼 나게 가는 거야!” 20세기의 끝 무렵, 그들은 정말 끝내주게 멋졌다.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는 그런 두 사람이 23년 만에 한 작품에서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화제다. 제작은 정우성이 대표를 맡고 이정재가 이사로 재직 중인 아티스트 스튜디오가 맡았다. 여기에 <신세계> <아수라>를 성공시킨 사나이픽처스가 공동 제작사다. 방황하고 질주하던 20대 청춘들은 이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조직 내 숨겨진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쫓고 쫓긴다. 이정재와 정우성의 액션 첩보물 <헌트>는 지난 5월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았다. 프리미어 상영회가 열리던 날, 뤼미에르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국내외 언론은 감독으로 변신한 ‘JJ Lee’의 영화에 주목했다. 넷플릭스 1위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주역인 그는 세계인이 아는 월드 스타다. 그때 그 시절, 강남의 30억짜리 건물을 사는 게 꿈이던 홍기(이정재)가 456억이 걸린 ‘오겜’의 최후의 승자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빌 줄 누가 알았을까? 우직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던 도철(정우성)은 또 어떤가. 우수에 찬 눈빛의 미남 톱스타, 그의 연기는 더 깊어졌고 제작자로서도 상당히 소신 있는 필모그래피가 쌓여간다. 그가 연출을 맡은 영화 역시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다. 말 많고 탈도 많은 연예계에서 긴 시간 두 사람은 친구이자 동료 배우로서, 가까운 이웃이며 믿을 수 있는 사업 파트너로서 서로를 응원해왔다. 게다가 둘은 여전히 근사하다. 이거야말로 영화 같은 얘기 아닌가!
칸영화제에서 전회 매진을 기록하고 기립 박수를 받았다. 각자 <하녀>(2010)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으로 칸을 찾았지만, 이번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이정재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어떤 노력을 해야 되나 고민이 됐다. 그런데 딱 초청을 받았으니 아주 기쁠 수밖에.
정우성 짜릿했다. 훌륭한 작품과 수많은 영화인이 칸의 초대를 받지만 모두가 관심과 환호를 받긴 어렵다. 그런데 이번엔 상영 기간도 길었고, 우리끼리 즐기고 온 게 아니라 진짜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온 것 같아 굉장히 즐거웠다. 언제 또 우리가 같은 작품으로 함께 칸에 가겠나.
이정재 우성 씨가 감독하고 내가 출연하면 같이 갈 수도 있겠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정우성 감독님이 캐스팅을 해야 가능한 거 아닌가?
정우성 정재 씨 캐스팅은 이미 싸게 해뒀다.
이정재 1만원인가, 5만원인가.
정우성 1만원이다. 꼭 필요한 순간에 아주 비싸게 써먹을 셈이다.
회당?
이정재 아니, 한 편에 1만원!
하하, 대체 두 사람은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나? 1995년 ‘SBS 스타상’ 신인연기상을 공동 수상했고, 나이도 데뷔 시기도 거의 같다.
정우성 ‘처음부터’라고 얘기할 수 있다. <태양은 없다>를 찍으면서 사적인 관계를 갖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서로의 존재에 대해선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당시엔 ‘청춘스타’라고 해서 우리 둘을 라이벌 구도로 다룬 기사가 많았으니까. 실제로는 오히려 호감을 갖고 지켜보던 동료였다.
이정재 <비트>도 유명하지만 우성 씨가 출연한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도 굉장히 센세이셔널했다. 정말 만화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남자가 봐도 멋있고. 처음엔 둘 다 별로 말이 없었다. 같이 술집에 가서도 30분 동안 말없이 술만 마시고.
정우성 ‘한잔 더 할까요?’ ‘좋죠.’ 그게 다였다.
이정재 뭐랄까. 조숙했던 것 같다. 영화 현장에서 일할 땐 매 신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커서 되게 진지했다. 각자 도철과 홍기의 옷을 입고 영화에선 티격태격하며 에너지가 넘쳤지만 평소엔 조용했다.
당시만 해도 젊고 잘생긴 배우들은 반짝 스타로 소비되기 바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달랐다. 거의 30년이다. 쉼 없이 연기만 한 것도 아니다. 2016년엔 연예 기획사 아티스트 컴퍼니를 함께 설립했다. 정우성과 이정재의 우정 자체가 그냥 영화다.
정우성 그게 참 자연스러웠다. 대부분 영화 작업이 끝나면 만남을 이어가기 쉽지 않은데 둘 다 집이 청담동이라 가까웠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 날 때 보게 됐고, 오래 함께하다 보니 여기까지 이어진 거다. 신기하다기보단 고마움 같은 게 있다. 관계에 대한 고마움.
이정재 둘 다 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나면 일 얘기가 70% 이상이니까. 영화 얘기가 제일 재밌다. 늘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다 보니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도 많고 둘 다 굉장히 열정적이다. 자기 관리는 당연히 각자 잘해야 되는 거고. 그렇게 건강한 관계가 유지됐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런 코드가 맞았던 거다.
정우성 맞다. 우린 둘 다 어떤 한 시기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했고 서로의 도전을 보면서 격려하고 응원하고, 자극도 받는다.
이번 영화 <헌트>는 출연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도 화려하다. 의상은 조상경, 촬영은 <놈놈놈>의 이모개, 음악과 편집은 최근 <헤어질 결심>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다수를 함께한 조영욱, 김상범이다. 아무래도 이정재와 정우성의 힘이다.
정우성 작품이 좋아서 아닐까(웃음)? 이모개 촬영감독과는 <놈놈놈> 외에 <아수라> <인랑>에서도 만난 적 있다.
이정재 물론 우리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은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뭘 한다는데 잘되게 뭐라도 도움을 주자.’ 그 분위기가 너무 고마운 거다. 첫 회의 때부터 아주 그냥 열기가 뜨거웠다. 베테랑 스태프의 열의를 보니 이번 작업 ‘재밌겠다’ 싶더라. 그와 동시에 ‘우리가 영화 현장에서 참 오래 일을 했는데 그래도 제법 잘해왔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정우성 동료들의 그런 호의가 영화에 보탬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동료애는 일에 동기를 부여하는 작은 의미일 뿐, 그 의미를 가치 있게 만드는 건 결국 좋은 결과물이다. 과정이 전부가 되어선 안 되지 않나. 그래서 더 치열했다.
205억 예산의 작품인 만큼 부담도 컸겠다. 액션도 많고 스케일도 크다.
이정재 내가 자꾸 판을 벌이니까 우리 대표님(정우성)이 걱정을 많이 했다. 하하.
정우성 단독 제작이었다면 부담이 컸겠지만 공동 제작사 ‘사나이픽처스’가 많은 제작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부담을 덜고 갈 수 있었다. <신세계> <아수라>도 사나이픽처스가 제작했다.
칸영화제에 동행한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정재 감독과의 작업에 대해 “본인이 광고하는 세라젬(안마 의자)에 앉아 스케줄이 끝나면 새벽까지 글을 써서 다시 보낸 게 2년 전”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정재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 항상 펼치는 이동식 책상이 하나 있는데 그게 세라젬과 높이가 맞다. 딱 좋더라(웃음). 시나리오 판권을 산 후 수정을 하는데 정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파이널 버전에는 우성 씨가 제안한 부분이 꽤 반영되기도 했다.
예전에 둘이 함께 시나리오를 쓴 적도 있다고 들었다.
이정재 김성수 감독하고 셋이서! 하하. 그것도 오래전 일이다.
정우성 별별 얘기가 많았다. <태양은 없다 2>를 써보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자. 너무 무거운 거 말고 시리즈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볍고 대중적인 걸 해보자 등등.
이정재 해외에선 꽤 많은 배우들이 영화계 전 분야를 자유롭게 오가지 않나. 각본에 참여하기도 하고 제작이나 프로듀싱, 연출까지. 프로젝트에 따라 역할을 바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필름 메이커로서 열의가 느껴져 좋아 보였다. 그래서 우성 씨와 같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나도 제작에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우성 아티스트 컴퍼니 이전부터 준비했던 <나를 잊지 말아요>나 <고요의 바다>를 제작할 때도 정재 씨가 종종 사무실에 들러 내가 하는 일을 관찰했다.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 신드롬이 이번 영화 제작에 영향을 준 부분이 있나?
이정재 전혀. <오징어 게임> 촬영이 끝나자마자 <헌트>의 프리프로덕션 작업에 들어갔다. 크랭크인이 지난해 5월 8일이었다. 그 작품이 그렇게 흥행할 줄 누가 알았겠나.
정우성 타이밍이 맞았던 거다. <오징어 게임>이 공개되던 9월에 우린 한창 부산에서 <헌트> 촬영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딱지 한판 치시겠습니까?” 패러디 영상이 뜬 것도 그 현장이었다. 루저 캐릭터를 매력 있게 표현하기 힘든데 그걸 참 잘 살렸더라. 많은 연구와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개성 있는 여러 캐릭터의 다양한 사연 틈에서 성기훈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을 발휘했다.
사실 감독 데뷔는 정우성 씨가 먼저다. 2000년대 초 god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시작으로 몇 편의 단편영화를 찍었고 코로나로 인해 개봉이 늦춰진 첫 상업영화 <보호자(가제)>도 촬영을 끝낸 것으로 안다. 그게 어떤 자극이 됐을까?
이정재 글쎄, 그걸 옆에서 보면서 ‘아,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자극이라고 할 텐데, 솔직히 난 엄두가 안 났다. 연출에 프로듀싱, 각본, 연기까지 어찌나 할 일이 많고 현장이 고된지 <보호자> 크랭크인 하고 한 달도 안 돼 다크서클이 발끝에 걸려 있더라.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정우성 그래서 정재 씨가 연출을 맡기로 결심했을 때 난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 텐데’ 걱정되는 마음 반, ‘오! 그래, 너도 한번 경험해봐라. 어서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와보시죠’ 하는 반가운 마음 반(웃음). 나는 그저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계속 옆에 있어주고 상황을 공유하는 것, 그 이상 무엇을 하나. <헌트>의 편집본도 칸에서 처음 봤다.
이정재 일부러 안 보여줬다.
정우성 일부러 안 보여준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찾아보지도 않았다. 혼자서 감내하는 고독한 시간도 필요한 법이니까. 모든 걸 같이 한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연배우로서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떤가?
정우성 좋았다. 워낙 작품 초기부터 전 과정을 보지 않았나.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23년 만에 우리가 함께하는 작품이라 개인적인 의미도 크고, 이정재 감독의 입봉작인 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정재 정말 모두가 열심히 했다. 후회나 아쉬움은 없는 작품이다.
<헌트>에서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는 같은 목표를 지닌 한 팀이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에 의해 서로를 의심하며 대립한다. 제작사 대표와 감독, 그리고 감독과 배우로서 두 분은 어땠나? 어떻게 한 번도 다투지 않을 수가 있는지 신기하다.
이정재 달리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땐 서로 상의하면 된다. 난 기본적으로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지금 심정이 어떤지는 본인만 알지 옆에 있는 사람은 모른다. 그런데 잘 물어보지 않는 관계들이 많은 것 같았다.
정우성 티를 내야 한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오가는 의견은 누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다. 함께 답을 찾아가는 노력이지. 거기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된다는 건 프로답지 못한 일이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나?
정우성 얼마 전에 사무실에서 해봤는데 둘 다 ENFJ가 나왔다.
이정재 따로 앉아서 했는데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직접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건 결국 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거다.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가?
정우성 그게 무엇 때문인지 찾아가는 과정 아닐까 싶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니지만 영화 현장이 너무 좋다 보니 어느 순간 여기까지 오게 됐다.
이정재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건 그만큼 복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건 우성 씨와 나 둘 다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를 참 즐거워한다는 사실이다. (VK)
- 포토그래퍼
- 홍장현
- 에디터
-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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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보라
- 컨트리뷰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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