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로 도덕적 우위를 가르는 세상에 대하여
자기 과시를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하는 ‘그랜드스탠딩’이 넘친다. 키보드로 도덕적 우위를 가를 수 있을까?
13만원을 주고 워터밤 콘서트를 예매했다. 올여름은 가수와 관객이 물에 젖어 즐기는 콘서트와 축제가 여럿 열렸다. 그즈음 한 연예인이 트위터에 “콘서트에 쓰일 물 300톤을 소양강에 뿌려줬으면 좋겠다”고 남겼다. 한 작가가 페이스북에 회답했다. “(이는) 가뭄에 물을 뿌리며 콘서트나 하는 개념 없는 타인에게 일침을 가하는 정의로운 나에 대한 과시에 가깝다. (···) 선민 의식, 엘리트 의식, 주목에 대한 욕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내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떠난 이유가 떠올랐다.
나는 2000년대 초반 이른바 ‘논객’으로 활동했다. ‘인터넷 광장’에서 누구나 논객이 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모니터를 켜고 그날 뉴스에 대한 의견을 공들여 썼다. 대단한 활동을 하고 싶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내게 인터넷은 무료입장의 대안 공간이었다. 내 글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고 믿었으며, 남들(누리꾼)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타이핑 자체가 목적이자 행동이며 결론인 키보드 워리어일 뿐이었다. 의견 주장이 노력이나 실천이 될 수 없다. 지금은 아니라고 못한다. 아고라에서 소셜 미디어로 무대를 옮겼을 뿐.
“도덕적 ‘관종’은 어떻게 세상을 망치는가?” 미국의 철학자 저스틴 토시와 브랜던 웜키가 쓴 <그랜드스탠딩>의 소개 글이다.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은 1888년 야구 선수가 그랜드스탠드에 앉은 관중에게 인상을 남기고 싶어 과도한 플레이를 할 때 처음 사용했다. 요즘에는 자기 과시를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쓰인다. 난 5분 전에도 그랜드스탠딩을 했다. 예리한 개념 시민처럼 보이고 싶어 재난 보도를 하는 아나운서의 분홍색 수트를 댓글 창에 지적했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청소 노동자를 고발한 대학생 기사를 보고 개탄의 글을 썼다. 어디에 올릴지 고민 중이다. 패션 잡지에 있으면서 사회면에 관심이 지대한 나를 알리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을 그랜드스탠더라 한다.
나만 그런가? 요즘 인터넷, 소셜 미디어는 그랜드스탠딩으로 넘친다. 고양이 사진보다 많다. 누가 더 도덕적이고 올바른가 겨루는 야구장 같다. 그 주제도 유행을 타 요즘엔 동물권과 채식,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는 글이 많아졌다. 그들은 도덕적 이야기로 선한 일을 하는 걸까, 있어 보이고 싶은 걸까? 대부분 후자로 보인다.
그랜드스탠드엔 화법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나는 너보다 훨씬 동물권에 관심이 많아”가 아니라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칸이 사랑한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다큐 <카우>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이가 루마(젖소)의 여정에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동물권에 관한 도덕 포인트를 쌓길 바라며 소셜 미디어에 올린다. 물론 ‘얘 또 이러네’ 이러면서 언팔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이가 우회적인 화법의 그랜드스탠딩에 넘어간다. 특히 해당 글이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맞아떨어질 때 더 그러하다. 동물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 멘션은 그랜드스탠딩이 아니라 공감과 나은 세상을 위한 한마디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에 따르면, 자신이 어떤 사회적 특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고 우린 진짜 그런 모습일 거라 기대한다.
우선 나부터 그랜드스탠딩, 그러니까 이런 허접한 행동을 왜 할까? 사람은 남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은 ‘자기 고양(Self-enhancement)’이라 칭한다. 이는 물질, 능력보다 도덕적인 부분에서 더 심해진다. 나를 실제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인식하는 것. 슬프게도 인정 욕구도 강하다. 친구에게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이를 위해 공적 담론에 참여해 나의 도덕성을 드러낸다. 최고의 무대는 인터넷이다. 소리칠 자리와 들어줄 청중이 대기 중이다.
이곳에선 도덕적 가치가 무기가 되고 경쟁력이 되곤 한다. 게다가 오프라인만큼 온라인 보상이 세졌다. 많은 이가 날 좋아해주고 지지해주면 나의 실제 모습을 모를지라도 명성을 안겨주고 경제적 이익까지 얻을 수 있다. 뜨거운 뉴스가 하나 터지면 많은 사람이 거기에 경쟁적으로 발을 담그는 이유다. 한 모델이 OTT 드라마로 세계적 스타가 되자 많은 에디터의 SNS에는 수년 전 그와 찍은 사진이 경쟁적으로 올라왔다. ‘그때 우리 정말 재밌었는데. 조만간 또 보길’ 같은 멘션과 함께. 순수한 의도는 몇 개나 될까? 자신의 인맥 자랑과 팔로워 증가, 그로 인한 명성과 경제적 보상을 하나도 바라지 않았을까? 지아 톨렌티노 <뉴요커> 기자는 저서 <트릭 미러>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해시태그 때문에, 리트윗 때문에, 프로필 때문에 인터넷상에서의 유대는 가시성, 정체성, 자기 홍보와 필연적으로 얽히게 되어버렸다.”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나 그러지 나는 인정 욕구 때문에 키보드를 두드린 적 없다! 우린 자신의 의도나 동기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왜 이런 멘션을 썼느냐고 묻는다면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실제로 내가 그런 사람이라 믿어버린다. 책 <그랜드스탠딩>에선 이런 사례를 든다. “부모는 보통 자신을 위한 동기가 있을 때조차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그들을 재우려고 한다. 당연히 많은 부모는 진심으로 취침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만이 이야기의 전부라기엔 의심스럽다. (···) 소셜 미디어에서 도덕적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도덕적 명성, 더 심하게는 사회적 이익을 위해 타인을 지배하고자 공적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아랍의 봄’ ‘미투(#MeToo)’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같은 운동은 인터넷에서 불씨를 키웠고 성과도 얻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적극적이고 건강한 참여와 그랜드스탠딩은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 내가 보고 있는 인터넷 창 대부분은 후자다. 그 자체가 위법은 아니지만 쉽게 해악이 된다. 그랜드스탠더는 자신의 빈약한 논리와 성찰을 특정 누군가를 향한 흠집 내기, 조롱, 비방, 조리돌림으로 대체하곤 한다. 이 방법은 손쉽게 추종자를 모은다. 얼마 전 뮤지컬 캐스팅에 인맥 논란이 있는 배우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평등에 관한 분노라지만 이면에 그 배우에 대한 평소 비호감이 작동한 댓글도 보였다.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갑질 연예인 벌주기’일 뿐이다.
쉽게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부릅뜨고 위반자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위반이 아니라 사소한 말실수일 때가 많지만 레이더망에 걸리면 다들 화력이 세진다. 시나리오 작가 존 론슨은 책 <그렇게 당신은 조리돌림당했다(So, You’ve Been Publicly Shamed)>에서 트위터를 이렇게 묘사했다. “사실 화낼 대상이 아무도 없으면 이상하고 공허한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를 욕할 일이 없는 평온한 날들은 마치 손톱을 뜯을 때처럼 초조하거나 물에서 걷는 것처럼 답답했다.”
이 도덕 게임에서 스스로 탈락하고 싶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서 한 번의 탈락 기회를 줬지만 다시 돌아온 사람처럼, 그랜드스탠딩으로 손쉽게 얻는 만족감을 포기 못할 것 같다. 지아 톨렌티노는 자신을 똑바로 보라고 제안한다. “자신의 실제 자아가 비난받을 점이 많고 일관성 없으며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 자아에 따라 정직하게 행동하라.” 과연? (VK)
- 그림
- 김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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