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다섯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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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다섯 장면

2022-09-15T14:44:31+00:00 2022.09.14|

이정재가 <오징어 게임>으로 프라임타임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는 올해 감독 데뷔작 <헌트>를 성공시켰고,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의 주역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 프로모션 기간에 한국 팬들은 이정재를 벼락출세한 신인 배우로 여기는 미국 미디어의 당당한 무지에 놀라곤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이정재가 진정 광활하고 눈부신 신세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그러니 이제 막 이정재의 매력을 발견한, 그리고 앞으로 탐구해갈 전 세계 팬들을 위해 조금은 친절해져도 좋을 것이다. 당장 한국에도 그의 첫 번째 전성기였던 1990년대를 기억 못하는 관객이 많다. 이정재는 청춘, 코미디, 누아르, 액션, 멜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정점을 찍었던 배우이고, 패션이나 연기, 흥행 등 어떤 키워드로도 말이 되는 스타지만, 나머지는 그의 더 빛나는 순간을 위해 남겨두고 가장 즐거운 이야기를 해보자. 그가 최고로 섹시했던 순간들 말이다.

전설의 탄생 <모래시계>

수도권에만 방송했는데도 시청률 65%가 나온 전설의 드라마 <모래시계>. 블랙핑크 제니의 어머니가 이정재를 좋아해서 그의 배역과 비슷한 이름을 딸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영화 데뷔작 <젊은 남자> 스틸. 신은경과 이정재는 X세대의 아이콘이었다.

<모래시계>(1995)는 신생 방송국 SBS를 단숨에 일으켜 세운 드라마였다. 마침 한국 사회는 군인 대통령 시대를 벗어나 다사다난했던 우리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재벌 집안과 민주화 운동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대생, 시류에 휘말린 순정 조폭, 올곧은 검사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웅장하게 그려낸 <모래시계>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의 가슴을 후려쳤다. 주인공 고현정, 박상원, 최민수는 그 전부터 이미 스타였다. 하지만 드라마가 잘되려면 신선한 충격도 필요한 법이다. 그 역할을 당시 스물세 살의 이정재가 해냈다. 싸움 잘하는 보디가드, 그런데 과묵하고 서정적이기까지 한 신비로운 인물, 한 여자를 위해 목숨 바치는 남자. 여기에 이국적이지 않되 이지적이면서 세련된, 그리고 날렵한 이정재 고유의 비주얼이 한몫했다. 그의 캐릭터 백재희는 주인공들 이상으로 회자되었다. 이 드라마 속 그의 모습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타이타닉>(1998), 브래드 피트의 <가을의 전설>(1995)처럼, 한 세대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그 배우가 오십이 되건 칠십이 되건 그를 핑크빛 필터 너머로 바라보게 만들 불세출의 아름다움이었다. 

금단의 남자 <정사> 

이정재의 풋풋한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정사>.

영화 <정사>에서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연하남으로 출연한 이정재.

중년의 이정재가 본연의 스타일리시한 이미지와 달리 얍삽한 기회주의자(<도둑들>(2012), <암살>(2015)), 지질한 소시민(<오징어 게임>(2021)) 등 다양한 캐릭터를 수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젊은 이정재는 그때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리낌 없이 소화했다. <젊은 남자>(1994)에서는 야망에 눈이 멀어 여러 여자들과 계산적 관계를 맺는 X세대 청춘을 연기했고, <정사>(1998)에서는 약혼자의 언니와 눈 맞는 연하남을 연기했는데, 두 작품 모두 이정재의 섹시함이 없었다면 성립하기 힘든 영화였다. 특히 <정사>에서 이정재는 여배우들보다 많은 노출 신을 소화했는데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완벽한 버즈컷과 셔츠 핏, 담담하지만 애틋한 눈빛으로 인해 입었거나 벗었거나 그가 나오는 모든 장면이 지독하게 섹시했기 때문이다. 로맨스물의 주인공 연령대가 높아진 지금은 서른아홉 살 여주인공에게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사랑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게 어색하다. 하지만 이정재의 담백한 스타일 덕분에 영원히 고전으로 남을 영화다. 

이정재의 수트는 언제나 옳다 <신세계> 

영화 <신세계>의 ‘이자성’ 이미지는 그의 이후 필모그래피에서 자주 오마주되었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라 불리는 2000년대 중후반에도 그는 꾸준히 작품을 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도둑들>로 천만 관객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초기 팬들이 기억하는 이정재의 폭발적인 매력이 부활한 것은 <신세계>(2013)에 이르러서였다. 최민식, 황정민, 박성웅 등 이 영화의 주연 모두 불꽃 튀는 열연을 펼쳤다. 그 늑대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자성 캐릭터를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로 이정재가 완벽하게 연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정재에게는 관객을 매혹하는 한 끗이 더 있었다. 단언컨대, 세상에는 수트를 입고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사건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주는 배우가 딱 두 명 있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이정재다. 수트 입고 겁먹은 표정을 짓는 이정재의 모습은 그의 청춘을 기억하는 관객들을 순식간에 소환해냈고, 한동안 뜸하던 그의 커리어도 완벽하게 부활했다. 

한국 영화 3대 등장 신 <관상>  

이리의 상을 한 남자. 영화 <관상> 스틸 컷.

<관상>(2013)의 수양대군 등장 신은 <늑대의 유혹>(2004)에서 우산이 걷히면서 강동원의 얼굴이 드러나는 장면, <아저씨>(2010)에서 원빈이 머리를 미는 장면과 더불어한국 영화 3대 등장 신으로 불린다. 슬로모션과 울부짖는 개들, 송강호의 멋진 리액션, 리드미컬한 음악, 과장된 의상, 현란한 편집, 모든 것이 받쳐주었다. 하지만 결국 키는 이정재였다. 그의 위풍당당한 표정, 뻐기듯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눈가에 담긴 조소, 얄미울 정도로 매끈한 이목구비를 가로지르는 상처그걸로 이정재는 러닝타임 중반에 등장해서 한 편의 서사를 단숨에 장악해버렸다.   

연기하는 감독 <헌트> 

영화 <헌트> 촬영장에서 모니터링 중인 이정재.

영화보다 영화 같은 <헌트> 비하인드 컷.

올해 최고의 신인 감독은 단연 <헌트>의 이정재다. <헌트>는 무게감과 스펙터클을 적절히 조합해낸 첩보 액션 시대극이었다. 누적 관객 429만 명을 돌파해 수익도 좋았다. 훌륭한 각본이 연출자를 못 찾고 있기에 마지못해 시작했다지만 감독으로서 그의 앞날은 밝아 보인다. 당장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의 스핀오프 <레이> 연출을 직접 맡을 거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배우 출신 감독의 강점이라면 역시 연기 연출일 텐데, 과연 <헌트>는 인기에 비해 연기로는 큰 호평을 못 들었던 정우성에게 생애 최고의 찬사를 안겨주었다. 이정재 역시 자연스러운 중년의 얼굴에 걸맞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오징어 게임> 프로모션으로 폭넓은 세대와 국적의 관객들에게 다가서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이정재. 그 화제성을 인식한 듯 <헌트>에서 연출에 몰두하는 이정재의 사진도 대거 공개되었는데 그것들이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미모와 스타일 대신 원숙함을 무기로, 이정재의 유혹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