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키키 스미스가 보내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친절한도슨트

2023.02.18

by 정윤원

    키키 스미스가 보내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친절한도슨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오는 3 12일까지 열리는 <키키 스미스자유낙하> 전시장에서 유난히 오래 머물렀던 기억입니다. 거의 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이번 전시가 40여 년을 관통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꽉 찬 짜임새로 훑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일 겁니다. 조각, 판화, 태피스트리, 드로잉, 아티스트 북 등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140여 점의 작품이 마치 물길을 만들듯 매우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나를 이끕니다. ‘이야기의 조건’, ‘배회하는 자아’, ‘자유낙하: 생동하는 에너지등 미술관이 제시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생각하며 혼자 공간을 천천히 걷다 보니, 작가가 본인의 예술 활동을 두고마치 정원을 거니는 것 같다일컬으며배회의 움직임을 강조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황홀’, 2001, 청동, 170.8×157.5×66.7cm. ©키키 스미스, 페이스 갤러리 제공. 사진: 리처드맥스 트렘블레이

    ‘하늘’, 2012, 면 자카드 태피스트리, 287×190.5cm. 매그놀리아 에디션 직조. ©키키 스미스, 페이스 갤러리 제공. 사진: 리처드 개리

    ‘소화계’, 1988, 덕타일 주철, 157.5×68.6×3.8cm. ©키키 스미스, 페이스 갤러리 제공. 사진: 엘런 라벤스키

    한 여성이 늑대의 배를 가르고 나오는 형상의 조각 ‘황홀’, 중세 시대의 도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태피스트리 ‘하늘’, 혀부터 항문까지 내장 기관을 라디에이터처럼 배치한 ‘소화계’, 작가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추상적 자화상 ‘무제(머리카락)’, 베니스 이스트 리버의 표면에 비친 햇빛을 매체 실험한 ‘세상의 빛’, 무릎 꿇은 성모 마리아를 소녀상으로 표현한 ‘푸른 소녀’, 전시의 제목이 된, 낙하하는 작가의 나체가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자유낙하’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방대하긴 하지만, 혹여 이 세계에서 길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모든 작업에 ‘내적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 혹은 희망이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종이에 연필로 그린 드로잉 작업조차도 마음을 붙잡으며 비밀스러운 감동을 전합니다. 

    ‘무제(머리카락)’, 1990, 미츠마시 종이에 2색 석판, 91.4×91.4cm. ©키키 스미스,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제공

    ‘푸른 소녀’, 1998, 실리콘 청동, 가변 설치. ©키키 스미스, 페이스 갤러리 제공. 사진: 엘런 페이지 윌슨

    ‘자유낙하’, 1994, 에치젠 고조 기즈키 종이에 요판 인쇄, 포토그라비어, 에칭, 드라이포인트, 84.5×106.7cm. ©키키 스미스,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제공

    <자유낙하>전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동시대 (여성) 현대미술가 중 한 명인 키키 스미스의 서정적이고도 환상적인 작업 세계를 구현한, 아시아에서의 첫 미술관 전시입니다. 사실 혹자는천하의 스미스가 온화해졌다고 하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 키키 스미스의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건 바로 인체 내 장기를 묘사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은 가정 폭력, 임신중절, 에이즈 등 신체를 둘러싼 당시 미국의 정치, 사회적 이슈에 특히 골몰하고 있었죠. 그 후 배설, 생리 등을 다룬 일명애브젝트(Abject)’ 미학의 도발적 작업도 작가의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습니다. 사실 신체와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동식물의 자연과 비인간의 세계 혹은 우주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는 건 당연합니다. 이 모든 걸 아우르는 건 바로 작가 자신을 포함해 세상의 가장 취약한 존재를 향한 경배와 찬사입니다. 

    ‘꿈’, 1992, 에치젠 고조 기즈키 종이에 2색 요판 인쇄, 106×196.9cm. ©키키 스미스,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제공

    ‘라스 아니마스’, 1997, 아르슈 앙투카 종이에 요판 인쇄, 포토그라비어, 152.7×125.1cm. ©키키 스미스,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제공

    ‘지하’, 2012, 면 자카드 태피스트리, 293.4×190.5cm. 매그놀리아 에디션 직조. ©키키 스미스, 페이스 갤러리 제공. 사진: 케리 라이언 맥페이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급기야 이후 일정을 모두 취소해버렸습니다. 영상 제작자 클라우디아 뮐러가 작가의 일상과 작업 현장, 인터뷰를 담은 약 52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한 편을 앉은자리에서 다 보고 싶었기 때문이죠. 그가 왜 정원을 빗대며 배회의 중요성을 말하는지 등 인생과 작업을 관통하는 작가의 모습과 육성을 생생히 보고 들을 수 있기에 꼭 권하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떤 특징적인 향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작가가 생동적이되 비가시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공감각적으로 각인하고자 협업해 제작한 향을 전시 요소로 활용했기 때문이죠. 전시를 기억하고 경험하는 방식은 반드시 시각적인 요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시공간이 뒤섞인 듯한 이날의 경험, 그 향을 담은 룸 스프레이를 기념으로 구입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이 향에 힘입어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가만한 사슴과 새의 존재를 떠올리는 순간이 내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 되어주었습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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