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예술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
프리즈에 다녀오고 그림을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모두가 예술을 얘기하는 지금, 나만의 예술을 시작하라.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아트 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 로스앤젤레스’의 색은 ‘핑크’다. 프리즈 입간판부터 부스 표지판, 안내 지도까지 핑크색이다. ‘프리즈 뉴욕’은 검정. 런던은 녹색, 서울은 보라색을 선택했다. 지난 2월에 열린 ‘프리즈 로스앤젤레스 2023’을 둘러보며 이곳이 왜 ‘핑크’ 담당인지 알 것 같았다. 찬란한 태양,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서핑을 하고 채식을 하며 영화를 즐기는 ‘LA 바이브’가 프리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로벌(Global)만큼 로컬(Local)을 추구하는 아트 페어이기에 참여 작품은 LA의 태양을 머금은 듯 채도 높고 밝은 색감이 많다.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의 세일즈 코디네이터 존 리는 “이곳의 기후와 환경이 출품작의 색감과 분위기에 영향을 미쳐요”라면서 LA의 떠오르는 갤러리와 작가들을 소개했다. 내가 프리즈에서 가장 사로잡힌 작가도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의 체이스 홀(Chase Hall)이다. 그가 커피 가루로 그린 그림에선 유색인종이 춤추고 서핑하고 포옹한다. LA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체이스는 이곳에 뿌리 깊이 존재하는 인종과 사회문제, 문화를 회화에 담고 있다.
특히 프리즈의 VIP 프리뷰 때는 멋진 컬렉터와 갤러리스트의 패션에 감탄했다. 갤러리스트는 자신의 부스에 어울리는 스타일링을 했다. 원색의 작품이라면 자신도 비슷한 색이나 보색의 수트를 입고, 화훼화 앞에는 꽃을 두고 에스닉 숄을 걸쳤다. 가죽 록시크의 할머니는 현장에서 계산기를 꺼내 바로 작품을 구입했는데, 그 모습이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보였다. 마음에 든 체이스 홀의 작품은 아직 접근 가능한 가격이라는 소리에 순간이나마 구입을 고민했지만, 첫날 이미 완판됐다. 그날 밤 프리즈에 참여한 국내 갤러리 관계자는 작품 판매액을 카톡으로 보내왔고, 여러 유명 갤러리도 신나게 완판을 알렸다. 하우저 앤 워스는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의 ‘Shall Rest in Honor There’(2023)를 350만 달러에, 데이비드 즈위너는 다나 슈츠(Dana Schutz)의 ‘The Encounter’(2022)를 120만 달러에 판매했다. 자세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프리즈가 열리는 기간에는 LA 전역의 갤러리와 브랜드도 그에 맞춰 행사를 연다. 다운타운에 이어 샌타모니카에 문을 연 하우저 앤 워스의 조지 콘도(George Condo) 개관전에 갔고, 화랑가가 형성되고 있는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목조 주택을 개조해 뷰잉 룸을 연 가나아트의 오프닝 파티, 베벌리힐스의 프라다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 빅 컬렉터의 하우스 파티까지. 아트 페어에 갔지만 숙취에 시달렸다. 아름다운 작품과 샴페인, 화려한 패션, 수십억 원의 낙찰가 등으로 점철된 날들이 기묘했다. (취해서 작품에 술을 쏟을까 봐 걱정도 했다.)
그날도 숙취를 끌어안고 현대미술관 모카(MOCA)의 바닥에 앉아 안무가 시모네 포르티(Simone Forti) 팀의 퍼포먼스를 봤다. 부둥켜안은 댄서들이 서로의 몸을 타고 오르내렸다. 의지할 것은 서로뿐이라는 건가. 나는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어느새 그들의 동작 자체에 몰입했다.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술이 덜 깼나. 모카, 라크마(LACMA), 더 브로드(The Broad) 등 프리즈에서 나눠준 LA 갤러리 지도에 도장 찍기 하면서 작품과 퍼포먼스를 있는 그대로 봤고 감탄했다.
나는 남의 창작물에 ‘시니컬’한 편이었다. 그래야 안목이 높다고 착각했다. 너도나도 비평가이자 평론가인 시대에 나도 편승했다. 그것도 사이먼 코웰식으로. 아티스트를 인터뷰할 때는 그들이 과대평가 받는 것 같았다. 젊은 작가의 작품은 종종 폄하했다. 술자리에서 소주병 뚜껑을 엮어서 “이게 아트라면 아트”라며 웃었다. 내가 주변인이라는 열등감, 불확실한 모험을 하는 작가의 용기를 질투했는지 모른다. 물론 여전히 예술의 이름을 쓴 과대망상도 있지만,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반감이 강했던 것 같다. 나는 프리즈를 기점으로 갤러리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놀랍게도 ‘나도 예술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작품을 사고 싶다, 걸고 싶다를 넘어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 것이다. 2015년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전시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남긴 어느 꼬마의 후기가 기억난다. “나도 색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 아이는 그림을 시작했을까. 당시 나는 작품 포스터를 구입했다. 포스터 속 빨강은 내가 본 빨강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자기만의 빨강을 가졌기를.
귀국하고 아크릴화 재료를 샀다. 미술을 전공한 지인은 “초보는 아크릴물감 다루기 어려운데”라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체이스 홀처럼 서핑하는 그림을 그렸다. 다음 날엔 꽃을 그렸다. 매일 좋아하는 걸 그렸다. 아무도 안 볼 것처럼 막 했다. 다 그리면 유리창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였다. 서핑 그림을 보면 바다에 갔을 때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내 친구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에 빠져 있다. 국내 연주회의 ‘피케팅’에 실패하자 얼마 전 도쿄 공연에 다녀왔다. 3박 4일 일정에 두 번이나 그의 공연을 봤다며 기뻐했다. 친구는 “반 클라이번 라흐 3을 우연히 듣고 번개 맞은 것 같았어”라고 말했다. 어딜 가든 헤드폰과 유튜브만 있다면 두렵지 않다고 했다. 임윤찬을 찾아 들으면 되니까. 친구는 피아노 학원을 알아봤다. 임윤찬의 예술이 친구를 피아노 학원으로 안내했다. 예술의 일상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니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친구는 살고 싶은 이유를 찾았다고 했고, 나는 명상만큼 혼자 그림 그리는 시간이 충만하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1인 창작자가 됐달까. 모두가 발견되길 바라고 유명해지고 싶고 돈을 벌고 싶어 할 때, 나만의 예술을 하는 기쁨.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내가 창작자이자 관객인 결과물을 얻는다. 방구석 예술, 평생 친구를 얻은 것 같아 덜 외롭다. (VK)
- 사진
- Courtesy of the Artist and Hannah Traor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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