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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스타일리시하고 신선한 지옥도

2023.05.13

by 이숙명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스타일리시하고 신선한 지옥도

    <슬픔의 삼각형>은 올해 당신이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신선하고 스타일리시한 영화 중 하나다. 하지만 조심할 것. 날카로운 독설이 언제 당신을 겨눌지 모른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칸 영화제가 애지중지하는 스웨덴 감독이다. 2015년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으로 불확실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다음 연출작 <더 스퀘어>(2018)로 첫 황금종려상을, 그다음 연출작 <슬픔의 삼각형>(2022)으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외스틀룬드는 이 세 작품을 ‘A trilogy about being a man in our times’라고 부른다. 흔히 ‘남자 3부작’으로 번역되는데, 작품들의 성격을 고려하면 깊이 와닿지 않는다. 방점은 ‘남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에 찍혀야 한다. 여기선 ‘현대인 3부작’ 정도로 해석해두자.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녀를 구한 아내와 자신을 먼저 구한 남성을 탐구하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예술을 논할 때와 달리 실생활에서는 결코 심오하지 않은 어떤 지식인 남성을 탐구하는 이야기 ‘더 스퀘어’
    계급 문제를 전면에 드러낸 ‘슬픔의 삼각형’

    외스틀룬드는 이 작품들에서 현대사회의 어떤 부조리를 상징하는 배경을 설정해두고 그 위에 인물들을 배치한 다음 인간의 본성과 반응을 관찰한다. 구조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보편 행태에 먼저 주목하고, 개개 인물들을 성의 있게 묘사함으로써 그의 블랙코미디는 지적이지만 차갑지는 않은 독특한 지점에 안착한다.

    3부작의 첫 편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에서는 고급 스키 리조트를 배경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녀를 먼저 구한 아내와 자신을 먼저 구한 남편의 갈등, 그리고 가족 관계의 하강을 그린다. <더 스퀘어>는 미술관을 배경으로 예술을 논할 때와 달리 실생활에서는 심오하거나 정의롭거나 우아하지 못한 지식인 남성을 탐구한다. 신작 <슬픔의 삼각형>은 패션계, 호화 유람선, 무인도가 배경이다. 이번에는 계급이라는 논쟁적 이슈가 전면에 등장한다. 슈퍼 리치들이 탑승한 유람선이 난파하고, 무인도로 떠내려간 소수의 생존자 사이에서 수렵, 채집, 야영 능력을 기준으로 계급이 재편된다. 리나 베르트뮬러 감독의 <귀부인과 승무원>(1974) 혹은 가이 리치가 그것을 리메이크한 <스웹트 어웨이>(2002)가 떠오르는 설정이다. <귀부인과 승무원>에서는 생각 없는 상류층 여성이 보트 여행을 하다가 말단 승무원과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계급을 가르는 기준인 자본 자체가 무용해진 상황. 승무원이 관계의 주도권을 잡더니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슬픔의 삼각형>은 그러나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았고, 냉소와 유머의 밀도가 높다.

    <슬픔의 삼각형>은 남자 모델들의 세계를 그리며 시작한다. 상의를 벗은 한 무리의 젊은 남자들이 대기실에 초조한 얼굴로 모여 있다. 리포터가 그들을 촬영하며 짓궂은 질문을 던지거나 표정 연기를 주문한다. “럭셔리 브랜드 모델 같은 화난 표정을 지어보세요. 당신은 자신에게 도취된 나머지 주변을 신경 쓸 수 없죠. 이번엔 H&M 스마일을 보여주세요. 우리는 모두 행복하고 평등하죠. 발렌시아가 룩을 보여주세요. H&M, 발렌시아가…” 주문에 따라 빠르게 표정을 바꾸는 모델들의 모습은 점멸하는 플래시와 맞물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부유층과 서민에 대한 미디어의 뻔한 이미지를 드러낸 이 장면은 <슬픔의 삼각형>이 계급을 그리지만 기존 컨벤션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첫 장면에서 이름이 불린 캐릭터 ‘칼(해리스 디킨슨)’은 곧 모델이자 인플루언서 ‘야야(샬비 딘)’와 데이트를 하러 간다. 식당에서 두 사람은 민망한 갈등을 빚는다. 칼은 야야가 자기보다 돈을 잘 버는데 매번 자기가 밥값을 낸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야야가 카드를 내밀며 자존심을 챙겨보려 하지만 지불이 되지 않는다. 멋진 외모에 고급 패션을 두른 이 인플루언서 커플은 사실 빈털털이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LA에서 패션 사진가로 일했던 아내를 통해 패션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호화 호람선에 탑승시킬 패션계 인물이자, 최상류층부터 화장실 청소부까지 여러 계급을 전시하는 이 영화에서 중간자 역할로 모델 커플을 선택한 건 흥미롭다. 이들은 현재 빈털털이지만 재수가 좋으면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는 인물들로 이미 위와 아래의 세계를 모두 경험하고 있다. 그들의 젊은 육체는 첫 장면부터 철저하게 도구로 이용되지만 그들은 여기에 큰 반감이 없다. 그들은 패션계에서는 브랜드와 디자이너와 사진가의 도구로, 호화 유람선에서는 돈 많고 매력 없는 슈퍼 리치의 과시용 사진을 위한 오브제로, 유람선이 난파해서 도착한 무인도에서는 권력자의 전리품으로, 매번 자신의 쓸모를 찾아낸다. 패션모델이나 인플루언서가 블랙코미디에 등장한다면 무식하고 허황되고 자아도취적인 골드 디거로 소비되기 십상이다. 영화계 너드들의 질투와 게으름이 묻어나는 그런 악의적 조롱이 이 영화에는 없다. 야야와 칼의 언행은 톤 다운되어 있고, 그들은 현대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존중은 다른 캐릭터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칼과 야야는 인플루언서 협찬으로 크루즈에 올라 슈퍼 리치들을 만난다. 감독은 “전통적으로 계급을 묘사할 때 상류층을 무심하고 잔인한 악당으로 그리지만 그게 진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영화 속 부자들은 자비롭고, 예의 바르고, 자신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 이 세계의 아이러니를 스스로 조롱할 정도의 유머 감각도 있다. 농장에 거름을 팔아 큰돈을 벌었다는 부자는 “내 일이요? 똥을 팝니다. 똥이요”라며 호방한 웃음을 터뜨린다. 러시아 부호의 아내는 승무원들에게 현재를 즐기라며 일을 쉬고 자신과 함께 수영장에 뛰어들 것을 종용한다. 마음은 좋다. 다만 그것이 자비의 대상에게는 현실적이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비슷하되 각자의 위치에 따라 보는 세계가 다르고 행동이 달라진다는 대전제는 이후 표류지에서의 에피소드에서도 확인된다. 영화는 대상과의 거리 조절을 통해 같은 행동이라도 때로 진지하게, 때로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연출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리얼리즘과 코미디 사이에 카메라를 세우고 두 세계를 느린 호흡으로 오간다.

    <슬픔의 삼각형>에서 호흡이 빨라지는 유일한 순간은 유람선이 침몰할 때다. 이는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는 빅뱅의 과정으로, 격렬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갖은 모순이 터져나와 부딪치며 장엄한 파국을 형성한다. 미국인 사회주의자 선장은 러시아 자본가에게 술을 퍼먹이고 개똥철학을 늘어놓다가 배를 침몰시킨다. 그는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논하고 구조의 문제를 비판하지만 스스로의 책임은 다하지 않음으로써 재앙을 초래한다. 성실한 승무원들이 머리와 입만 산 주정뱅이로부터 배를 지키려 고군분투하지만 역부족이다. 선내 스피커로 선장의 자본주의 비판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호화로운 세트의 화장실은 역류하고 우아하던 승객들은 구토를 하며 바닥을 기어다니고 금슬 좋은 무기상 커플은 자기들이 팔아먹은 무기에 맞아 죽고 끝내 배는 침몰한다.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좋겠다는 파괴적 열망을 영화를 통해 해소하는 타입의 관객에게는 멋진 장면이다. 하지만 이 신에서 난무하는 모순들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엄한 파국 이후 원점으로 돌아간 인간들은 무엇을 할까? 보다 나은 선택으로 나은 세계를 창조해낼까? 8인의 생존자가 도달한 무인도에서 이 영화의 후반전이 시작된다. 이제 자본 대신 원시적 생산수단이 중요해진다. 어째서인지 야생에서 불 피우는 법, 도구 없이 생선 잡는 법을 알고 있는 필리핀 출신 청소부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이 빠르게 무리를 장악하고 권력자의 위치에 오른다.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가 ‘계급 반전’을 그리면서 반전의 요소를 재력뿐 아니라 성별, 인종으로까지 확대했다는 사실이다. ‘남성 3부작’보다 ‘현대인 3부작’이란 표현이 어울리겠다는 것도 그래서다. 앞서 유람선 장면에서는 백인 부자들, 백인 서비스 노동자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제3세계 노동자들은 선실 아래 볕 없는 방에서 일하면서 시스템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시스템이 무너지고 모두 육지로 튕겨나가자 애비게일이 권력 피라미드의 위층을 단숨에 차지한다. 그가 무리를 장악하는 장면은 한 편의 사회심리학 교재다. 권력자의 성별이 역전된 만큼 성적 포식자-피식자의 성별도 바뀐다. 칼이 애비게일에게 농락당하는 동안 야야는 질투를 느끼지만 문제의 원인인 애비게일에게는 저항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표류자들이 새로운 생산수단을 발견함으로써 두 번째 질서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기존 시스템으로 돌아갈 기회도 생긴다. 이때 한 인물의 선택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 삶의 이유, 자아를 지탱하는 동력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현재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모든 인간에게 그것을 적절히 제공하고 있는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서늘한 여운이 남는 결말이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관찰자, 해석가, 기록가다. 그의 차기작은 스톡홀름에서 LA 혹은 런던에서 시드니로 가는 긴 비행시간 동안 기내 스크린이 고장 나고 전자 기기 충전도 중단된 상황을 그릴 것이라고 알려졌다. 지극히 보편적인 인물들을 탁월한 통찰로 선별하고 재배치해 상징계에 도달시키는 외스틀룬드의 작법이 이번에도 통한다면 도파민에 중독된 현대인들이 또 한 편의 멋진 자화상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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