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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기꾼의 초상

2023.11.03

by 이숙명

    여성 사기꾼의 초상

    작가 토리 텔퍼는 한국에 <여성 연쇄살인범의 초상>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졌다. 그런데 번역되지 않은 그의 저서 중 이와 짝을 이루는 사기꾼 모음집이 있다. <자신만만한 여자들: 여성적 설득을 이용한 사기꾼, 도둑, 변신술사(Confident Women: Swindlers, Grifters, and Shapeshifters of the Feminine Persuasion>라는 책이다. 미국에서 이 책이 발행된 건 2021년이다. 애나 소로킨과 엘리자베스 홈즈 사건으로 여성 사기 범죄에 관심이 높아진 때다. 이 책에서 텔퍼는 여성 사기꾼을 유형별로 정리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네 가지 타입을 각각에 해당하는 범죄 콘텐츠와 함께 소개한다. 뉴스테인먼트에 도둑맞은 집중력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작품들이다. 그 전에 사기 범죄 피해자를 위해 텔퍼의 이 말은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 “사람들이 사기를 당한다는 사실은 인간에 대해 정말 사랑스러운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서로를 기꺼이 신뢰한다는 것을요.”

    이야기꾼

    문학동네

    이 유형의 사기꾼은 단순히 다른 사람인 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페르소나에 입체감을 더해줄 길고 정교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오랫동안 지속하며, 스스로 그 이야기에 몰입한다. 20세기에 자기가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중 한 여성은 죽을 때 묘비에도 ‘아나스타샤’라고 써넣었다. 드라마 <안나>의 원작 소설 <친밀한 이방인>에도 굉장한 이야기꾼이 등장한다. 심지어 그가 꾸며낸 페르소나 중 한 명은 소설가이기도 했다. 작품은 그에게 소설을 도용당한 진짜 작가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자기가 예전에 쓴 소설이 남의 이름으로 지면에 실린 걸 본 작가는 이름의 주인을 찾아나서고, 문제의 인물이 실종 상태임을 알게 된다. 이건 소설거리다 직감한 작가가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인물이 각기 다른 세 남자의 아내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 그는 때로 여자였고, 때로 남자였다. 음대에 다닌 적도 없으면서 피아노과 교수를 하거나 자격증 없이 의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친밀한 이방인>은 2017년 발표된 소설이지만 지금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드라마 <애나 만들기(Inventing Anna)> 스틸 컷

    ‘글리터라티’라고 명명된 이 유형은 내실보다 화려한 치장에 골몰한다. 명품 백, 럭셔리한 라이프스타일, 높은 사회적 지위 등을 이용해 타인의 동경을 자극하고, 신뢰를 얻고, 인맥을 확장한다. 넷플릭스 <애나 만들기>는 2022년 공개와 동시에 동서고금 항상 존재했던 글리터라티에 대한 새로운 고전으로 등극했다. 주인공 애나 델비(본명 애나 소로킨)는 뉴욕에서 슈퍼리치 상속녀 행세를 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값비싼 호텔에 묵고, 호텔리어에게 넉넉한 팁을 주면서 상류층에 접근할 정보를 얻고, 화려한 생활을 보증서 삼아 약간의 부자 인맥을 만들고, 그 인맥을 보증 삼아 더 큰 부자에게 접근하고, 급기야 뉴욕 최상류층과 은행에까지 고액 사기를 친다.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지불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반짝이는 것이 돈을 끌어들인다는 사회의 속성을 잘 아는 애나 소로킨은 재판 때도 옷이 마음에 안 든다며 출석을 거부할 정도로 외양에 치중한다. 출소 후 가택 연금 중에도 NFT 판매,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쇼 계약, 팟캐스트 진행, 팝업 아트 쇼 개최, 패션 이벤트 회사 설립 등 다양하게 활동 중인 걸 보면 그 전략이 어느 정도는 유효한 듯하다. 하지만 그 활동은 아직 <애나 만들기>만큼 화제를 모으지는 못하고 있다.

    예지자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Nightmare Alley)> 스틸 컷

    사이비 종교에 왜 빠지는지 모르겠다면서 ‘귀신 보는 친구’나 ‘갓 신 내린 용한 점쟁이’ 따위에는 솔깃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친구나 점쟁이가 작정하면 그대들도 사이비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만.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소설 <나이트메어 앨리>는 서커스 단원들의 치정과 파멸을 다룬 누아르로, 매력적인 스토리 덕에 두 번이나 영화화되었다. 주인공 스탠턴은 영매 쇼를 하는 지나로부터 독심술을 배운 다음 그 기술을 바탕으로 사이비 종교를 창시한다. 2022년 개봉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버전에서는 스탠턴이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는 과정은 상세히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지력이라는 게 실은 독심술에 기반한 사기라는 대전제는 남아 있다. 이 버전에서 스탠턴에게 독심술을 전수해주는 지나 역은 명배우 토니 콜렛이 맡았다.

    비련의 주인공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Sick of Myself)> 스틸 컷

    타니아 헤드라는 여성은 뉴욕 9·11 테러 직후 생존자를 자처하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자신이 하버드와 스탠퍼드에서 공부하고 메릴린치에서 일했으며 약혼자가 테러로 사망했다고도 밝혔다. 테러 후에는 생존자 협회 회장으로, 월드 트레이드 센터 투어 가이드로 활동했고 해마다 정성껏 약혼자를 추모했다. 하지만 2007년 <뉴욕 타임스>가 그의 학력, 경력, 약혼 여부가 모두 거짓이라고 밝혔다. 그가 묘사한 테러 당시 상황도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타니아 헤드는 이 거짓말로 돈을 벌지는 않았다. 다만 관심을 얻었다. 목적이 무엇이건 타인을 도우려는 인간의 선한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운 건 마찬가지다. 시쳇말로 피해자 코스프레로 관심을 끄는 건 소셜 미디어에서 흔한 사기 유형이다. 아들에게 소금을 치사량 먹이고 페이스북에 간병기를 연재한 뮌하우젠 증후군 엄마가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런 세태를 풍자한 신랄한 호러 영화가 <해시태그 시그네>다. 카페 바리스타인 주인공 시그네는 잘나가는 예술가 남자 친구에게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다 우연히 개에 물린 여자를 구해주게 되고, 그 일로 잠시나마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시그네는 극단적인 피부병을 유발하는 약물에 손을 댄다. 성취가 아니면 불행으로라도 주인공이 되고 싶은 관종, 그들의 어긋난 욕망을 부채질하는 소셜 미디어, 패션계, 예술계 등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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