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가끔은 독재가 필요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과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감독 6인이 참여한 장편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 이명세 감독의 주도 아래 장항준, 김종관, 노덕, 조성환, 윤유경 감독이 참여했다. 영화의 의미 찾기부터 도전적인 스타일까지 감독들의 면면이 도드라진다. 그들을 이어주는 큰 줄기는 배우 심은경이다. 심은경이란 페르소나를 향한 감독들의 해석 또한 작품을 보는 재미다. 〈보그〉에서만큼은 심은경이 감독들을 촬영한다.
모두가 기다리는 남자, 장항준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액션, 스릴러, 코미디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장항준 감독의 장기가 콤팩트하게 압축된 영화다. 통금이 내려진 밤, 쇠락한 어촌의 한 선술집에 특급 살인마 ‘염상구’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염상구에 대한 단서는 왼쪽 어깨에 새겨진 수선화 문신뿐. 코믹한 초반부와 장르적 쾌감으로 가득한 후반부의 낙차가 관전 포인트다.
단편 작업은 얼마 만인가.
음, 내 이력을 통틀어서 중단편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특히 이런 옴니버스 형식의 작업은.
미안하다. 장항준이라면 당연히 예전에 단편 하나쯤 찍었을 거라고 봤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내가 시나리오 쓰다가 운 좋게 바로 입봉한 케이스라. 단편은 그동안 몇 번 시도해봤는데 시간과 예산의 제약으로 진행이 쉽지 않았다.
<더 킬러스> 프로젝트는 어땠나.
예상대로 열악했다.(웃음) 촬영 기간이 나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아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액션 장면을 충분히 찍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내 작품은 거의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그래도 다른 감독들에 비하면 훨씬 수월했을 거다.
이명세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프로젝트의 방향을 잡는 조타수 같은 역할이었다면, 실질적으로 배를 이끈 사람은 장항준 감독”이라고 했다.
이명세 감독님은 후배들을 굉장히 평등하게 대하시는 분이다. 다만 여러 명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에서는 그때그때 의견을 모으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나. 가끔은 독재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내가 독재자였던 셈이다.
프로젝트의 선봉에 선 사람으로서, ‘킬러’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6편의 영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미션이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심은경 배우를 매개로 작품을 연결하는 아이디어도 이명세 감독님에게서 나왔다. 그런데 내 작품에는 심은경 배우가 안 나온다. 초반에 <선데이서울> 표지 모델로만 잠깐 출연할 뿐. 이 영화의 유일한 여자 인물이 술집 주인인데, 알다시피 너무 결정적인 역할이라 은경 씨가 나오면 관객이 바로 의심할 것 같았다.
지난 7월 뉴욕아시아영화제에서 <더 킬러스>의 관객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고 들었다.
영화 전체를 풀 영상으로 본 건 나도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현장에서 반응 보고 깜짝 놀랐다. 다들 잘 웃고, 잘 놀라고, 리액션이 엄청 좋았다. 요즘 이런 형식의 영화가 별로 없다 보니, 음식으로 치면 오래전에 맛봤던 독특한 요리를 다시 맛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같은 조건 아래 여러 감독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그에 따른 부담도 있었을 듯하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어느 순간 신경 안 쓰게 됐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니까. 그보다는 조그만 빌라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웃사촌 같은 느낌이랄까? 옆집 사람이 나보다 행복하다고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나.
<더 킬러스>를 보기 전까지 ‘단편을 모은 영화는 재미없다’는 편견이 좀 있었다.
공감한다. 감독이 자율적으로 자기 세계를 펼치다 보면 오락성이 떨어지거나 지나치게 ‘딥’해지기 쉽다. <더 킬러스>의 경우 다들 상업 영화를 했던 분들이라, 지루한 부분 없이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온 것 같다. 나 역시 영화적 재미를 최우선으로 두고 작업했다. 단편이라고 해서 갑자기 타르코프스키처럼 심오하게 구는 것도 이상하니까.(웃음) 그보다는 ‘단편이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더 킬러스>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을 모티브로 한다.
읽자마자 든 생각은 이 단편의 한국 버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긴장감이 큰 후반부에 집중하기로 하고, 고민 끝에 한국 역사의 변곡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1979년 10월 26일)을 배경으로 설정했다. 18년 동안 나라를 통치했던 독재자의 죽음을 바탕에 깔면, 영화에 흥미로운 맥락이 발생할 것 같았다. 영화 초반에 라디오에서 삽교천 방조제 준공을 알리는 뉴스가 나오는데, 실제로 박정희가 그날 그 제막식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죽었다.
내게는 여섯 작품 중 원작 소설의 하드보일드한 정조를 가장 충실하게 살린 작품으로 다가왔다.
‘통금’이라는 장치 덕분인 것 같다. 실제로 어렸을 때 통금이 시작되면 시간이 완전히 멈춘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개인의 자유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거다.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요컨대 이런 이야기다. 시대가 바뀌는 어느 날, 시간이 멈춘 밤에 모두가 찾고 있는 염상구라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우리가 없애야 할 빌런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구원자인가?
소설 배경인 미국의 금주법 시대가 한국의 군사독재 시대로 연결되는 것이 절묘하다. 배경이 된 부둣가의 술집도 금주법 시대의 ‘스피크이지 바’처럼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몰락한 어촌의 선술집 같은 장소를 물색하다가 군산에 있는 폐건물을 발견하고 싹 뜯어고쳤다. 실은 미술에 조금이라도 예산을 더 쓰고 싶어서, 영화도 연출료 없이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 참고로 선술집 바로 옆 건물이 영화 <변호인>(2013)에 나오는 국밥집이다.
‘염상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깡패 두목 이름인데, 이는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인가.
염상구는 좀 신비스러운 인물이었으면 했다. 구구절절 설명 없이 그저 이름만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는. <태백산맥>의 염상구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역사 속에 꼭 존재했을 법한 인물이기도 하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없이 악인이 된. 그런 인물의 입체성이 내 잠재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듯하다.
다른 감독들 작품은 어떻게 봤나.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노덕 감독님의 <업자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본을 쓰셨다고 했다. 하청에 하청을 주는 범죄물은 많지만, 그렇게 하청 자체를 소재로 쓸 줄은 몰랐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역시 이명세 감독님. 영화의 비주얼과 사운드 디자인이 나를 이렇게 자극하는 게 얼마 만인가 싶다. 요즘은 다들 스타일리시한 척만 하는데 감독님은 정말 ‘찐’이다.
입봉작인 <라이터를 켜라>(2002)부터 최근 발표한 <리바운드>(2023)와 <오픈 더 도어>(2023)까지. 나에게 장항준은 다음 작품이 좀처럼 예상되지 않는 감독 중 하나다.
그렇다. 감독계의 김밥천국 같은 존재랄까? 어떤 음식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어떤 장르를 해야겠다’가 아니라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가 늘 먼저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왕과 사는 남자>라는 사극을 준비 중이다. 단종 얘기인데,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과 달리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가서 죽기까지의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헤밍웨이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사료에 나와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아,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다. 유배지의 중년 촌장과 소년 단종의 우정을 다룬 영화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당신을 ‘예능 치트 키’로 인식했다. 이번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당신의 본업이 영화감독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웃음)
고마운 말이다. 그때그때 내가 하고 싶은 장르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여전히 일하는 게 너무 좋다. 영화감독을 굉장히 불안한 직업이라 여기는 분이 많은데, 나는 세상의 모든 직업 중 이렇게 재미난 직업을 아직 찾지 못했다. 다시 태어나도 하고 싶고, 가능한 한 오래 하고 싶다. 강보라 소설가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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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 송보라
- 글
- 강보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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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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