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군도, 로스앤젤레스의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

2026.06.11

  • 유승현

경계 없는 군도, 로스앤젤레스의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모여 새로움을 빚는 로스앤젤레스. 도시를 대표하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신관,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이제 경계는 없고 공존만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시대, 문화권의 작품이 공존하듯 늘어선 LACMA 신관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

도심에서 샌타모니카 해변까지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윌셔 대로(Wilshire Boulevard) 위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형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새로 개관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신관,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David Geffen Galleries)다. 육중한 기둥 위에 얹힌 콘크리트 건축물이 도시 풍경을 단번에 바꿔놓았다. 갤러리의 넓은 규모만큼 건물 아래쪽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완공까지 20년 이상 걸린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는 회원을 위한 2주간의 사전 관람 기간을 거쳐 5월 공식 개관했다. 공간은 감각적인 조형으로 이름난 스위스 출신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가 설계했는데, LACMA의 미드 센추리 캠퍼스 대부분을 구불구불한 대지의 구조물로 이어냈다. 이러한 형태는 2006년 LACMA에 부임한 직후부터 줄곧 위계 없는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힘써온 마이클 고반(Michael Govan) 관장의 아이디어다. 다양한 지역, 시대의 예술 사조와 작품이 부딪치며 직접 대화하듯 배치되어 있다. (미술관의 교육 센터, 레스토랑, 뮤지엄 숍 등 역시 이 메인 구조물 아래 자리한다.)

갤러리에 들어서기 전 관람객이 먼저 만나게 될 작품은 작가 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발(Mariana Castillo Deball)이 갤러리 의뢰를 받아 만든 것이다. 그는 설치 작업으로 콘크리트 광장 바닥에 토착 동물의 발자국과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고고학 유적지의 벽화에 그려져 있던 메소아메리카의 깃털 달린 뱀, 케찰코아틀의 형상을 옅은 모래색으로 새겨냈다. 바닥 표면을 수놓은 작품의 가는 선은 갈퀴질한 듯한 형태로 일본식 정원의 모래를 연상케 한다. 멕시코시티 출신 작가 카스티요 데발은 시간의 흐름 속에 흩어지고 제자리를 잃은 사물, 기록, 역사의 파편을 탐구해왔다. 고고학 자료와 박물관 소장품을 주재료로 삼아,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고 전달되는지 추적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케찰코아틀의 형상은 오랫동안 하늘과 땅의 결합, 두 세계를 잇는 존재로 그려졌는데, 작품 속에서 그 의미를 고스란히 체현하는 듯하다. 작품 위로는 전시관 건물이 높이 솟아 드넓게 펼쳐지고, 광장은 한때 로스앤젤레스 땅을 누비던 존재들을 기리듯 조용히 지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박물관이 무엇인가’에 대한 은유라고 여겨요. 박물관은 무언가의 조각으로 만들었잖아요. 마이클과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이 미술관을 군도(群島)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느 박물관처럼 지역, 대륙 단위로 전시하지 않으니까요.” 이주와 문화 교류가 일상이자 기본값이며, 이민 집행 기관이 지속적인 위협을 가하는 이 국경 지역에서 카스티요 데발은 이주 노동자의 노동력을 미술관 바닥 표면에 고스란히 새김으로써 현실을 그대로 시각화했다. “지난 2년간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이 광장에서 작업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이민 관련 상황,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존재와 특히 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멕시코 출신 예술가가 이 건물에 흔적을 남기는 것 또한 우리 라틴계 노동자들의 손길과 노력을 이 콘크리트 표면에 새기는 것이므로 무척 뜻깊은 일이죠.”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화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의 ‘Saint Martina’를 비롯해 6,000년의 미술사를 아우르는 작품이 단층의 개방된 내부를 채우고 있다.

외부 계단 두 곳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면 갤러리 본관으로 들어설 수 있다. 거창한 입구도, 관람객을 안내하는 의례적인 행렬도 없다. 대신 미식축구 경기장 세 개 길이에 달하는 단층 공간이 펼쳐지는데, 전면을 유리로 마감해 사방으로 도시 전경이 쏟아진다. 아래로는 윌셔 대로를 바삐 오가는 차량, 바로 너머로는 타르 웅덩이, 저 멀리 부드러운 산 능선까지 한눈에 담긴다. 길에서 올려다보면 유리창 너머로 예술품이 스치듯 비친다. 미술관은 관람객을 도시로부터 단절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와 교감하게 한다.

2006년 마이클 고반이 부임할 당시, LACMA의 미드 센추리 캠퍼스는 구조적 비효율과 높은 유지 비용이라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후 10년에 걸쳐 아만슨(Ahmanson)관, 빙(Bing)관, 아메리카 미술(Art of the Americas)관, 해머(Hammer)관 등 네 개 동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처음부터 끊임없는 비판에 시달렸다. 네 개 건물이 있던 자리에 하나의 새 건물만 들어선다면 전시 공간이 오히려 줄어든다는 우려와 함께, 보존주의자와 건축가, 비평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디자인도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건물 규모와 함께 상당한 생태 발자국을 남기는 재료인 콘크리트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특히 문제로 지적되었다. 마이클 고반은 그런 우려를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시간이라는 축으로 다시 바라봤다. “다들 콘크리트가 환경친화적이지 않다고 하죠. 하지만 어떤 건물이 500년간 유지된다면 그건 아주 환경친화적인 겁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보통 그 자리에 건물이 열 개쯤 새로 들어서니까요. 이 건물이 오래 버티고, 굳이 허물고 다시 짓지 않아도 된다면 그건 아주 효율적인 선택이 되는 거예요.”

분방한 형태의 대지와 건축물은 도시가 지닌 포용력을 대변한다.

이 프로젝트는 기관의 포부를 담는 동시에 건축가의 개인사를 반영하기도 한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 페터 춤토르는 1980년대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며 활동했고, 그 경험은 이 도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건축가는 공간에 얽힌 정서를 알아야만 하죠. 저는 갤러리의 새 건물을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프로젝트로 여기고 싶어요. 이곳 역사를 조명하는 작업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광장에 세워진 멕시코 조각가 페드로 레예스(Pedro Reyes)의 기념비적 주춧돌은 건물에 쓰인 재료를 반영하면서 이 도시의 다층적 문화가 지닌 영향력에 경의를 표하는 또 다른 작품이다.

갤러리 외부에 자리한 멕시코 조각가 페드로 레예스의 ‘Tlali’는 도시의 다층적인 역사와 문화적으로 미친 영향력을 반영한 작품이다.

새로운 큐레이션 모델에도 뚜렷한 의도가 있다. 수 세기 동안 대형 박물관은 전시물을 지리, 소재, 시대로 분류해왔고, 그 과정에서 1차원적이고 분절된 미술사적 관점을 강화해왔다.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는 그 체계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개관 전시는 대서양, 지중해, 인도양, 태평양을 기준으로 구성되었다. 이 틀 안에서 대양은 경계가 아닌 매개다. 무역과 이주를 통해 사람들을 잇고, 아이디어와 물질과 제작 방식을 실어 나른다. 전시관 내 여러 복도가 한데 모이는 공간에는 각 대양의 초대형 사진이 걸려 있어 이 접근 방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박물관의 기본 개념은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이곳은 모두가 한데 뒤엉켜 살아가는 로스앤젤레스예요.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면 아주 많은 부분이 이주와 관련되어 있어요. 이 설치 전시는 결국 그런 주제를 다루는 거죠.”

전시관 곳곳에서는 지역 예술가의 작업과 마주친다. 고대 이집트 양식과 작가의 고향인 로스앤젤레스 남중부의 시각적 언어를 함께 품은 로렌 할시(Lauren Halsey)의 스핑크스 형상은 고대 이집트 유물,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3부작과 나란히 놓여 대화의 맥락을 형성한다. 석양을 등진 벽면에는 마티스(Matisse)의 모자이크가 걸려 있고, 맞은편에는 벤치가 놓여 있다. 건물 외벽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풍부한 자연광은 누노 코퍼레이션(Nuno Corporation)의 레이코 스도(Reiko Sudo)가 이곳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커튼을 거쳐 실내를 부드럽게 물들인다. 직물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미묘하게 반짝이며 작품의 표정을 시시각각으로 바꿔놓는다. 반면 내부 갤러리는 짙은 광물성 안료로 마감되었다. 깊은 파란색, 버건디, 검은색에 가까운 톤이 콘크리트 표면에 직접 도포되어 있다.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공간은 ‘벽 없는 미술관’을 지향하며 통창을 통해 보이는 내외부의 경계가 흐릿하다.

“자연광은 작품 전시에 색다르고 신선한 환경을 만들어요.” 개관 전시에 참여한 큐레이터 50인 중 1인이자 LACMA의 월리스 애넌버그 사진 부서장인 브릿 샐브젠(Britt Salvesen)이 말했다. “도자기든 종이든 자연광이 비치면 소재의 질감을 훨씬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빛은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니까요. 일반적인 미술관 공간에서는 빛이 철저히 통제되지만, 이곳에서는 감정이 그대로 살아납니다.” 전시 배치 방식도 다르다. 사진, 텍스타일, 종이 작업, 비서구권 작품처럼 역사적으로 주류 전시 공간에서 소외되어온 작품과 관습적으로 선호되어온 작품이 동일한 시각적, 개념적 맥락에 함께 놓는다.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내가 정말 뭘 좋아하는지 모르잖아요. 낯설고 두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직접 경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자신을 찾도록 돕고 싶은 거죠.”

LACMA 개관 행사에서는 내빈이 광장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동안 여러 공연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다. 공연과 의례를 다루는 비영리 예술 단체 세키 재단(Seki Foundation)이 준비한 행렬, 콜롬비아 쿠툰사마 지역 아루아코족의 영적 지도자 마모 카밀로(Mamo Camilo)의 환영 의식, 인도 고전무용을 기반으로 한 모나 칸 컴퍼니(Mona Khan Company)의 공연까지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가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 밤이었다. 행사의 마지막은 음반 제작자이자 기타리스트 T 본 버넷(T-Bone Burnett)이 장식했다. 그가 연주한 밥 딜런의 노래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이 언제나 새롭게 변화해온 이 도시와 함께 호흡하듯 따스한 울림을 남겼다. VL

    컨트리뷰팅 에디터
    유승현
    Ariana Marsh
    사진
    Iwan Baan, Courtesy of Museum Associates/LAC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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