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럭셔리를 가르는 기준은 ‘이것’입니다
유틸리티 룩이 진화합니다. 거친 워크 웨어에서 출발해 이제 런웨이를 장악하는 새로운 럭셔리로 말이죠.

한때 기능성은 타협이었습니다. 우아함을 택하든지, 편안함을 택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했죠. 보이기 위해 입거나, 살기 위해 입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유틸리티 드레싱은 더 이상 임시방편이 아니거든요. 위기 상황에 대한 반사적인 대응도 아니죠. 오히려 매우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유틸리티의 미학은 거창한 이론에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손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필요했고, 거친 날씨도 견뎌내는 소재와 몸을 보호하는 구조가 우선이었죠. 그렇게 철저히 현실을 위해 설계된 요소를 어느 순간 디자이너들이 선택했습니다. 이제 주머니는 단순한 수납이 아니라 리듬을 만들고, 기능적인 소재는 차가운 질감 대신 세련된 긴장감을 불어넣죠. 실루엣은 방어가 아니라 확신으로 자리 잡았고요. 이런 변화는 팬데믹 고립의 잔상이라 불러도 좋고, 불확실한 경제 상황의 반영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혹은 단순히 취향의 진화라고 해도 되겠죠. 분명한 건 패션은 점점 더 현실을 응시한다는 겁니다. 다만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지는 않아요.
2026년 런웨이의 유틸리티 드레싱은 더 이상 트렌드가 아니라 컬렉션을 지탱하는 커다란 구조가 되었습니다. 이자벨 마랑, 버버리, 발맹까지. 유틸리티 드레싱은 이제 성숙한 스타일로 변모했어요. 이 흐름의 출발점은 워크 웨어입니다. 이 기류는 오롯이 노동자의 필요를 중심에 두고 20세기 초 미국에서 태동했어요. 리바이스, 칼하트, 디키즈 같은 브랜드는 데님과 캔버스처럼 견고한 소재, 강화된 스티치, 넉넉한 주머니와 기능적 디테일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공장이나 작업장 환경을 견디기 위해 만든 옷이었으니까요. 그러나 1980~1990년대를 지나며 상황은 달라집니다. 직업적 맥락을 벗어나 도심 속 일상으로 이동하죠. 브랜드에선 작업복을 재해석해 데일리 룩으로 전환했고, 워크 웨어는 더 이상 노동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버버리 2026 봄/여름 컬렉션은 ‘요소에 맞서는 옷’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다듬었습니다. 기능성은 선택이 아니라 본능에 가깝다는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테크니컬 트렌치 코트는 견고한 볼륨으로 재구성했고, 퍼포먼스 소재는 정제된 질감으로 완성했죠. 아웃도어 레이어링이 떠오르지만, 결코 장비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기능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아 절대 투박하지 않습니다. 반면 발맹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카고 재킷, 멀티 포켓 팬츠와 조각하듯 다듬은 어깨선을 통해 소재를 럭셔리하게 끌어올렸어요. 유틸리티도 얼마든지 연극적이며 관능적이고, 단호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죠. 이자벨 마랑은 특유의 유목민 같은 감각을 첨가했습니다. 파카, 베스트, 카고 팬츠 등에선 보헤미안 디테일과 유연한 비율, 힘을 뺀 애티튜드가 중첩되죠. 마랑 쇼에서 선보인 유틸리티 드레싱은 일상적이고, 진짜 살아 있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결국 이 세 브랜드의 비전은 한 지점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관점의 이동이에요. 기능은 창의성의 한계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는 거죠. 역시 올해 패션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만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쓰일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요. 불안정과 가속, 그리고 구체성이 요구되는 시대니까요. 유틸리티 드레싱은 실용적이면서도 욕망을 자극하는 미학으로 응답합니다. 타협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죠. 움직이고, 여행하고,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진짜 옷. 더불어 아름다우면서 쓸모 있는 옷.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럭셔리의 정의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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