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가 선별한 2013 가을 패션 트렌드 2

N극과 S극, 북극과 남극, 동양과 서양, 남과 여 등등. 우리는 상반된 것들 사이에 낀 채 살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프라이드와 양념치킨, 물냉면과 비빔냉면, 팥빙수와 과일빙수,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 틈에서도 갈등한다. 그리고 2013년 가을, 패션에서는 직선과 곡선, 大자와 小자, 안과 밖, 신사와 숙녀 등 상반된 유행이 동시다발 등장했다. 좌측으로 갈지, 우측으로 향할지 망설여지나? 명쾌한 답이 있다. 둘 다 누릴 것!



Minimal vs. Maximal
애플 ‘iSO7’이 공개된 지난여름, 언론이 추출한 핵심 단어는 ‘미니멀리즘’이었다. ‘미니멀리즘의 정점’이라거나 ‘미니멀리즘 뽐냈다’라는 식의 헤드라인이 공개 직후 실시간 뉴스로 떴다. 사실 애플사에게 미니멀리즘은 가훈이나 마찬가지. 비슷한 시기에 올해 가구 트렌드로도 ‘미니멀리즘’이 발표됐다. 패션에 깊이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의 입장에선, 모든 현상이 패션에서 유행 중인 미니멀리즘에서 비롯된 것으로 굳게 믿고 싶은 것도 사실. 90년대가 시작된 이래 요 몇 시즌 동안 패션을 잠식한 것도 미니멀리즘이니까. 젊고 세련된 패션 선지자, 피비 파일로의 셀린, 다시 돌아온 질 샌더에 의한 질 샌더, 미니멀리즘으로 핸들을 꺾은 프로엔자 스쿨러, 미니멀리즘이란 한 낱말로 규정하긴 좀 그렇지만 미니멀 터치가 완성도를 높인 알렉산더 왕의 발렌시아가, 패피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J.W. 앤더슨 등등. 비로소 미니멀리즘은 시대 초월성을 갖게 됐다. 이 풍경을 보며 더없이 심드렁한 인물이 있으니, 이름하여 톰 포드! 하지만 타이밍이 살짝 애매했다. 그는 정신 산란한 팝아트만으론 부족했는지 동양 문화와 동물무늬의 혼란을 작정하고 보여줬다(제대로 된 컴백쇼를 위해 너무 많은 걸 동시에 보여주겠다고 작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톰 포드의 과유불급이 시대 경향의 정곡을 찌르지 못한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던 요인은 맥시멀리스트 동료들 덕분. 구찌 시절 톰 포드와 함께 패션 위크를 열며 밀라노 패션의 태평성대를 이끌던 돌체앤가바나와 로베르토 카발리가 대표적이다. 요새 애국심이 갈 데까지 간 도미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는 몇 시즌 계속해서 이탈리아 곳곳의 장관들을 쏙쏙 뽑고 있다. 특히 그들의 고향 시실리는 더 이상 빼먹을 게 또 있나 싶지만, 이번에도 혀를 내두를 만한 데커레이션으로 여러 벌을 제작했다. 정력 넘치는 카발리에게 별별 무늬와 색깔을 보기 좋게 결합하는 일은 식은 죽먹기. 과잉이 성공이라고 맹신하는 그의 캣워크엔 카라바치오, 루벤스, 플로렌스 수공 문화, 만화경 같은 꽃무늬 등이 제물이 됐다. 파리에서 과잉의 성공을 맛본 인물로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를 빼면 또 무진장 섭섭할 듯. 무시무시한 집시 초상화, 현란한 페이즐리, 아기사슴 밤비, 상어 이빨, 바이크, 생생한 꽃무늬, 그리고 원색의 키스컬 헤어 스타일의 놀라운 충돌이란! 아무튼 맥시멀 옷엔 만만치 않은 가격표가 달리겠지만, 어김없이 SPA 브랜드 매장에서도 카피캣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Monotone vs. Colors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꼽자면, 신랑신부 색상 아닐지. 흰색 셔츠에 검은색 보타이와 수트로 이보다 더 단정하게 보일 수 없었던 신랑 이병헌, 순백의 레이스 드레스로 곱게 빼입은 신부 이민정이 남산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결혼했다. 반면,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서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나열되는 회색 파노라마는 어땠나! 사실 우리는 지난 늦여름부터 지금까지 온갖 회색빛을 띤 서울 하늘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가 밤 8시라도 되는 듯 먹구름이 잔뜩 낀 진회색 하늘은 결혼식의 눈부신 흑백과 달리, 세기말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잡았다. 보시다시피 모노톤은 상상 그 이상으로 감정이 풍부하고, 디자이너들 역시 이런 미묘한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뉴요커 전용 컬러답게 올가을 모노톤은 뉴욕 패션 위크에서 시작해, 밀라노와 파리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트렌드로 안착했다. 우븐, 모피, 니트 등의 질감을 활용해 모노톤에 밀도를 높인 알렉산더 왕, 지진 직전의 균열이나 대리석에서 이미지를 따 모노톤으로 풀어간 발렌시아가, 홈스펀이나 글렌체크 같은 남성복 옷감으로 투박한 듯 유연하게 디자인한 캘빈 클라인과 마이클 코어스, 현대적인 콘크리트 건물을 닮은 스텔라 맥카트니, 흑백 꽈배기 니트로 여성성을 한껏 뽐낸 디올까지. 언제 어디서든, 도회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모노톤 유행이 따분하다고? 그런 식으로 긴긴 겨울을 보내기엔 너무 삭막한 것 같다면, 열 손가락 손톱 모두 다른 원색으로 네일 케어하는 여자처럼 다양한 컬러 옵션이 마련돼 있으니 걱정 마시길. 나이 어리거나 혹은 어리게 보이고 싶은 성숙한 여인이신가? 검정 멜빵이 달린 클로에의 새빨간 치마를 권한다. 노사모 회원이 아니더라도 노란색 애호가라면? 마이클 코어스의 샛노란 외투 앞에서 동공이 커질 것이다. 그들은 모피를 고를 때도 원색이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할지 모른다. 펜디의 쇼킹 핑크나 일렉트릭 블루라면 입을 만하겠나? 이병헌과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레드:더 레전드>를 관람한 뒤 온통 눈이 불그죽죽해져 ‘레드야말로 뉴 블랙’이라고 맹신한다면? 돌체앤가바나의 피날레 시리즈, 혹은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주홍빛 옷들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색깔로 여겨질 듯. 하지만 이번 시즌만큼은 발렌티노에서 레드를 기대하진 마시라. 발렌티노 가문의 두 디자이너는 이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블루야말로 우리의 뉴 레드다!”



Guy vs. Lady
문근영, 김옥빈의 공통점. 현재 드라마에 출연 중(각각 <불의 여신, 정이>와 <칼과 꽃>). 다시 한번 문근영(<바람의 화원>), 설리(<아름다운 그대에게>), 박민영(<성균관 스캔들>), 윤은혜(<커피 프린스>), 박신혜(<미남이시네요>)까지. 드라마를 죄다 꿰뚫고 있다면, 이 드라마와 여주인공들의 나열 속에서 교집합이 파악될 것이다. 남장여자! 패션은 옛날옛적부터 남자 옷장을 염탐했다.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이나 남자의 속옷 소재인 저지를 슬쩍해 하이패션으로 환골탈태시킨 샤넬 일화는 패션 금치산자 아니고서야 다 아는 역사. 꼼 데 아가르쏭과 요지 야마모토는 남성복 정장을 자기 식대로 파괴했고, 스텔라 맥카트니는 섀빌로 재단법을 곁들여 핀 스트라이프 시리즈를 선보였다. 또 낚싯바늘처럼 라펠이 잘 빠진 발맹, 필립 림 팬츠로 차려입은 모델들은 다들 엔드로겐 그 자체. 남장을 즐기는 여자든, 남자친구 옷장에서 쓸 만한 걸 호시탐탐 노리든, 모두의 맘 한 귀퉁이에서 본능적으로 들끓는 건 천생 여자의 에스트로겐인가?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다 결국 흥분에 못 이겨 원피스 어깻죽지를 확 잡아 내린 듯한 프라다와 조나단 선더스, 남편과 함께 공식석상에서 고상하게 웃는 명문가 며느리에게 제격인 디올과 니나 리치, 단골 미용실에 들러 헤어 스타일과 메이크업 꾸미는 일에 한 점 소홀함 없는 숙녀들을 위한 보테가 베네타와 로샤스 등등. 유행은 늘 여성성과 남성성 가운데 선택하는 트렌드 게임이었지만, 이번 시즌은 ‘치마 vs. 바지’ 대결로 이어진다. 어느 시즌에 팬츠가 창궐하면 그 다음 시즌에 스커트가 자연스럽게 치고 올라오는 식이었다면, 이번엔 스커트와 팬츠의 힘이 균등하다. 이 대결이 싫어 아예 바지 위에 치마를 입힌 디자이너들도 있으니, 성향대로 고르고 입고 누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