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경의 한복과 영화 이야기

런웨이와 스트리트 사진에서만 패션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스크린에서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패션이 탄생한다.
영화 의상감독 조상경의 한복과 영화 이야기.



“진보적인 디자인은 박수를 받고 진부한 디자인은 외면받는다.” <프로젝트 런웨이>에서 하이디 클룸이 매회 강조하는 말이다. 이 문장이 엄격한 규율에 따라 옷을 만들던 조선시대 왕실에도 적용될까? 지난 연말 개봉한 영화 <상의원>은 조선시대 왕실 의복을 제작하던 ‘상의원’을 배경으로 한다. 30년간 상의원을 지켜온 어침장 조돌석, 그리고 기방에서 혁신적인 한복을 만드는 천재 디자이너 이공진이 주인공이다. 의상 제작비 10억, 한복 제작에 동원된 전문가 50여 명, 이들이 제작한 의상은 1,000벌 이상, 사용된 원단 2,500마 등등. 이 놀라운 숫자가 말해주듯 그야말로 ‘한복의, 한복에 의한, 한복을 위한’ 영화다. 공진이 만든 중전의 ‘진보한 한복’은 구중궁궐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궁궐 밖 백성들에게도 유행된다. 사극에서 패션 자체가 이토록 중요했던 적이 또 있었나. 이 스토리에 관객이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의상을 맡은 조상경 감독 덕이다. <올드보이>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미도의 빨간 코트, <친절한 금자씨>의 도트 원피스, <박쥐> 태주의 새파란 슬립, 그리고 지난해 대종상 의상상을 받은 <군도>의 무채색 한복까지 모두 그녀의 솜씨. 런웨이와 스트리트 패션과는 또 다른 영역에서 탐미적 한복 세계를 펼쳐 보이는 조상경을 <보그>가 만났다.

VOGUE KOREA(이하 VK) 영화 시나리오를 받은 순간, 맨 먼저 떠올린 이미지는 뭐였죠?

JO SANG KYUNG(이하 JS) 이원석 감독은 첫 미팅 때 “치마 길이가 2m가 되는 한복이 나오는 영화다”라고 얘기했어요. 제 대답은 “썩 길지 않군요”였죠. 하하! <후궁> 때 4m짜리 한복을 만들었는데 별로 길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대본을 본 순간 ‘진짜 큰일이다’란 생각이 들었죠. 한복 장인들께 폐가 되진 않을지 염려돼 더 많이 공부했습니다. 결국 처음에는 아무런 이미지도 그려지지 않았다는 게 답이 되겠군요.

VK 영화에는 명확한 시대적 배경이 나오지 않아요.

JS 실존했던 왕이 등장한다면 그 시대 복식을 재현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돌석과 공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했죠. 흔히 사극에서 보는 옷들은 대부분 19세기 것입니다. 이를 처음으로 제시한 게 누굴까, 라는 설정에서 출발했어요. 그래서 공진이 만든 옷들은 18세기에 처음 등장한 한복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확실한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돌석의 옷은 16세기를 참고했죠. 영정조 시대를 주로 고증했지만 200년간의 의상을 다룬 겁니다.

VK 돌석이 만든 옷조차 지나치게 아름다웠어요.

JS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등장한 의상을 ‘개량한복’으로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돌석의 옷은 16세기 유물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한복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고 느꼈으면 합니다.

VK 공진의 항아리 치마는 어떻게 탄생했죠?

JS 시나리오에는 공진이 ‘처음 만든 중전의 옷’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옷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게 제 임무였죠. 조선은 미니멀리즘의 시대였다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매끈한 백자처럼 아주 미니멀한 한복을 만들고 싶었어요. 출발은 16세기 거들 치마였습니다. 긴 치마를 걷어 올려 띠로 고정하는 거들 치마 안에는 속곳을 엄청나게 껴입었는데, 모든 속곳을 직접 입혀보니 바로 그 항아리 실루엣이 형성됐어요. 실제로 옛 그림들을 보면 여자들이 앉으나 서나 실루엣이 똑같아요. 치마가 돋보이려면 당의가 긴 편이 좋을 것 같아 덕온 공주를 참고했습니다. 결국 한복을 디자인한다는 건 역사에 존재했던 것들 가운데 취사 선택하는 셈이죠.

VK 1,000여 벌 중 가장 공들인 옷은 뭐죠?

JS 제작 과정에서 가장 공들인 것은 왕의 면복입니다. 매듭, 신발, 대 등 아홉 가지가 필요했고, 다행히 각 분야 장인들이 계셨어요. 각각 부탁해 4개월 만에 완성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공진에게 입힌 옷이에요. 자유로운 영혼의 천재 디자이너라는 캐릭터를 표현한다는 게 쉽진 않았죠. 알렉산더 맥퀸이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것이 떠올랐어요. 그것의 한복 버전입니다. 쪽빛으로 물든 모시 저고리와 삼베를 마구 뜯어낸 바지를 입혔는데 꽤 마음에 들었어요.

VK 사신들을 맞이하는 ‘진연’ 장면에서 중전이 등장한 순간, 관객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터뜨렸어요!

JS 다행이군요! 진연복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민했어요. 원래는 알록달록한 원삼을 입어야 하는 자리지만 이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 자체보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색을 완전히 배제하는 대신 진주 장식으로 화려함을 더한 이유입니다. 양감을 위해 15겹의 속옷을 착용하느라 배우가 고생깨나 했죠.

VK 사극 영화에 자주 참여하는데 특별한 매력이 있나요?

JS 어린 시절부터 수묵화를 그렸기 때문인지 한국적 감성이 잘 맞는 편입니다.

VK 지난해 대종상 영화제 의상상 수상작 역시 한복이었어요.

JS <군도>는 특히 수묵화를 닮은 작품입니다. 수묵화를 그릴 때 먹 하나에도 5,000개 톤이 있다고 배웠죠. 영화에서 강동원이 죽을 때 입었던 한복 역시 먹의 농담을 이용해 탄생한 암청색입니다.

 

VK 영화 의상을 하게 된 계기는 뭐죠?

JS 수묵화에 한계가 느껴졌어요. 어려서 잘 몰랐던 거죠. 키네틱 아트에 도전하리라는 마음에 독일 유학을 알아보던 중 한예종 무대미술과 커리큘럼에 입체미술이 있는 것을 보고 지원하게 됐어요. 완전 속았죠!

VK 작업할 때 가장 중요히 여기는 부분은 뭔가요?

JS <신세계> 의상이 좋아 50번 봤다는 젊은 양복 디자이너가 있어요. 나중에 돌이켜볼 때 스토리는 기억이 안 나도 특정 이미지가 기억난다면 성공이라고 봅니다. 누군가에겐 꿈이 될 수 있으니까요.

VK 영화 의상도 패션계 트렌드의 영향을 받나요?

JS 가령 <상의원>의 경우 2013년부터 준비했는데 이제야 개봉했으니, 두 시즌 이상 뒤처진 거죠. 그래서 미리 예측해야 합니다. 하지만 트렌드를 따른다기보다 피해가기 위해 트렌드를 참고한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해요. 영화에서는 현재 한복 디자이너들과 다른 것을 제시해야 하니까요.

VK 의상이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영화는 뭔가요?

JS 카트린 드뇌브가 출연한 <세브린느>와 <쉘부르의 우산>! 누아르 영화 작업을 주로 했을 때는 프렌치 누아르나 사무라이 영화를 좋아했어요. 한복을 공부하면서 컬러감이 돋보이는 영화들이 좋아졌죠.

VK 좋아하는 패션 디자이너가 있나요?

JS 마르탱 마르지엘라! 또 가브리엘 샤넬도 좋아합니다. 그녀의 사고방식이 정말 맘에 들어요. 30년대 배경의 영화를 준비하면서 샤넬 초기작을 다시 살펴보고 있는데 많은 자극이 됩니다.

VK 꼭 영화로 작업하고 싶은 시대가 있나요?

JS 추사 김정희를 소재로 한 사극! 18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무척 많지만, 제대로 다뤄진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조선시대를 아주 미니멀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수없이 덧칠한 채색화 같은 사극 대신, 덧칠을 모두 덜고 담백한 먹의 기운을 살린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