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장>의 김규리와 김호정

영화 〈화장〉은 생과 사를 한 그릇에 담아낸다.
김호정은 죽음 앞에 스러져가는 여자를, 김규리는 생의 한가운데 빛나는 여자를 연기한다.
완벽히 반대편에 서서 그게 인생이라고 말한다.

이일호 작가의 ‘생과 사’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잠자는 듯한 표정의 얼굴 조각 옆에는 마치 샴쌍둥이처럼 해골이 붙어 있다. 정확하게는 해골이 사람의 뺨을 물고 있다. 빛과 그림자처럼, 뫼비우스 띠처럼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걸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임권택 감독이 102번째로 세상에 내놓은 영화 <화장>도 삶과 사랑의 두 얼굴을 이야기한다. 시체에 불을 살라 장사를 지내는 화장(火葬)이자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이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전혀 다른 운명을 걷는 쌍둥이처럼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은 삶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영화에는 그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여자 두 명이 나온다. 뇌종양에 걸려 뼈 가죽까지 허물어져 죽어가는 오상무(안성기 분)의 ‘아내(김호정 분)’와 터질 듯 꽃망울 같은 모습으로 오상무의 연모의 대상이 되는 추은주(김규리 분)다. 영화는 죽어가는 여자와 피어나는 여자 사이에 놓인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알려졌다시피 영화 <화장>은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김훈, 임권택, 안성기. 묵직한 3인의 이름만으로 영화는 이미 화제의 중심에 선 바 있다. 국내 개봉 전, 베니스 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세계 16개 영화제에 초청받았고, ‘진정한 마스터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인생, 죽음, 사랑에 대한 성숙하고 강렬한 시선’ 등 극찬도 이어졌다.

영화 <화장>이 화제의 중심에 선 또 하나의 이유는 김호정의 연기 때문이다. 언론은 삭발, 체중 감량, 투병 연기 하나하나를 들어 또 한 명의 메소드 연기자의 탄생을 알렸다. 하지만 김호정은 주변의 요란스러운 반응에 수평선처럼 담담한 모습이다. ‘아내’ 역할에 대한 그녀의 설명도 간결하고 명확했다. ‘아프다가 죽어가는 역할’. “김훈 작가의 원작에도 죽어가는 모습만 묘사되어 있어요. 예전에는 글을 쓰는 잡지기자였다는 설정까지만 나오죠. 이번 작품에서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표현했을 뿐이에요.” 20년 넘게 연극 무대에서 살아온 김호정에게 납득되지 않은 역할이란 어차피 존재하지 않았다. 삭정이처럼 말라가는 역할을 연기하는 것보다 힘들었던 건 오히려 이 작품에 출연해야 할까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라서 무조건 하려고 했지만 받아 본 시나리오는 ‘죽어가는 아내’ 역할이었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했다. 죽음으로 가는 고통을 표현하는 게 불안하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쁘고 아름다운 역할도 있지만 삶은 그런 걸로만 채워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누군가는 이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작품을 하겠다고 결정하고 나니 담담했어요.” 얼마나 힘든 역할인지 알고 들어갔기 때문에 촬영은 오히려 수월했다. 믿음직한 이름 안성기와 임권택도 있었다. “힘든 장면을 찍을 때 옆에서 매우 능숙하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줬어요. 이번 작품을 함께 하고 안성기라는 배우를 존경하게 됐어요. 영화에 대한 깊이, 현장에서 모습 모두 닮고 싶었어요.” 임권택 감독은 그녀에게 배우에 대한 깊은 믿음을 보여줬다. 여러 테이크로 갈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기에, 김호정이 표현해내고, 그녀가 가겠다고 하면 그 방식을 존중했다. 감독 임권택과 배우 안성기의 경력을 합치면 한 세기가 넘는다. 현장은 아마 완성을 넘어 완벽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김규리가 촬영 현장에서 느낀 분위기도 편안함과 치열함이었다. “감독님은 오늘이 끝인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촬영하셨어요. 촬영 기간이 40일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거든요. 감독님에게 정신적으로 기댔고, 편안하게 해주셨어요. 지치고 혼란스러울 때 잡아주신 건 안성기 선배님이에요. ‘견뎌야 한다’고 위로도 해주셨죠.” 김규리와 임권택 감독의 인연은 영화 <하류인생>에서 시작됐다. 팬을 자처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다. 김규리가 기억하는 가장 감각적인 한국 영화가 바로 <서편제>다. 그리고 지금 김규리는 임권택 감독 어깨에 손을 올릴 수 있는 배우 두 명 안에 든다(나머지 한 명은 강수연이다). <하류인생>에 함께 출연한 조승우가 말 한마디 붙이는 걸 어려워할 때도 김규리는 임권택 감독에게 편안하게 다가갔다. 임권택 감독 아들과 김규리가 동갑이니 아버지와 딸 같은 사이다. 친분만으로 추은주 역할을 제안한 건 아니다. 임권택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우연히 김규리가 춤추는 모습을 보았고, 추은주의 빛을 느꼈다. 임권택 감독이 김규리에게 요구한 건 생기, 그리고 젊음이었다. 나른하지만 도발적이고, 쳐다보지 않아도 유혹해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시각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했죠. 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고민이 많았어요.” 현실 속의 추은주, 오상무의 상상 속 추은주가 교차하면서 등장하는데, 김규리는 상상 속 추은주의 모습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다고 말한다. “찰나의 매혹적인 면을 보여줘야 했어요. 하루 종일 스태프들이 제 엉덩이만 보는 날도 있었고요. 목 라인, 손 동작만 촬영하는 날도 있었지요. CF를 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어요.” 외형적인 부분은 철저히 스태프들을 믿었다. 그리고 내적인 표현에 대한 고민은 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거두지 않았다. 해부학 교실에 걸린 뼈처럼 늘어진 아내를 씻기고 나온 복도에서도 떠오르는 여자, 추은주는 생의 한가운데 가장 빛나는 여자여야 했다. ‘아,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 김훈은 그녀를 두고 햇빛 같은 완연함을 떠올렸다. 김규리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영화 <화장>에 담겼다.

내면을 지독하게 들여다보게 한 영화 <화장>은 김규리에게 연기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작품이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얼굴을 알린 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탓일까. 그녀는 깊은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자신에 대한 기준, 연기에 대한 목표.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던 시기였다. 연기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할 만큼 깊은 침잠이었다. 답을 찾기 위해 마지막 기회처럼 던진 건 <정글의 법칙> 프로그램 출연이었고, 운명처럼 찾아온 작품은 <화장>이었다. 김규리는 이 둘을 두고 ‘대나무의 마디’가 생기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소멸해가는 존재를 지독히 현실적으로 그려내야 했던 영화 <화장>은 아이러니하게도 김호정에게 희망을 줬다. 그녀는 한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연기를 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간 적이 있다. “영화 <화장>은 제가 연기를 다시 할 수 있게 한 작품이에요. 죽음을 향해가는 역할이지만, 작품을 하면서 이제 다시 연기를 할 수 있겠구나 희망을 발견했어요.” TV조차 보지 않던 연극쟁이 김호정을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 출연하게 만든 것도 희망의 연장선이다. 가을에는 연극 출연을 앞두고 있고, 빠르면 내년쯤 연극 연출 계획도 있다. 김호정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함께 껴안는 여유를 머금었다.

꽃은 져도 또다시 피어오른다.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자기만의 속도를 찾는다. 김호정과 김규리에게 그 시간이 찾아온 듯했다. 우연인 듯 필연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