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모델들이 대세

까까머리 모델들이 몰려오고 있다. 찰랑이는 머릿결 대신 밤송이처럼 짧게 자른 두상으로 개성을 드러낸 새로운 모델 부대, 일명 ‘버즈 컷’ 모델들이 패션계를 장악했다.

짧은 금발 머리로 서울 패션계의 시선을 끌고 있는 모델, 이지. 프린트 미니 드레스와 플렉시글라스 귀고리는 모두 프라다(Prada).

짧은 금발 머리로 서울 패션계의 시선을 끌고 있는 모델, 이지. 프린트 미니 드레스와 플렉시글라스 귀고리는 모두 프라다(Prada).

젠더리스, 젠더 뉴트럴, 앤드로지니, 유니섹스. 어떻게 정의하든 지금 우리가 옷 입는 방식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흐름이 등장했다. 그건 전통적 젠더에 관한 신선한 접근이다. 남자 모델의 목에 분홍 리본을 묶은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러플이 휘날리는 남성용 미니 드레스를 완성한 J.W. 앤더슨, 나무젓가락처럼 마른 소년에게 8.5cm 굽의 부츠를 신긴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 남자 모델에게 기모노 드레스를 입힌 메종 마르지엘라의 존 갈리아노가 대표적인 예다. 패션 신대륙을 우리보다 먼저 발견한 그들은 ‘성’의 기준을 뒤흔들었다. 패션이 바라는 이상향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건 런웨이의 모델들이다. 첼시의 허드슨 강변부터 그랑 팔레까지 이어진 2016년 봄 컬렉션 가운데 눈에 띄는 모델들에게 공통점이 발견됐다. ‘바리캉’으로 바싹 자른 듯한 짧디짧은 머리카락. 친숙한 말로 하자면 삭발, 미국식으로 표현한자면 버즈 컷(Buzz Cut).

실시간으로 인터넷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패션쇼 이미지를 쭉 지켜봤다면 버즈 컷을 둘러싼 커다란 흐름을 목격했을 것이다. 시작은 뉴욕의 지방시였다. 동자승처럼 동그란 두상이 그대로 드러난 짧은 금발 머리의 모델 크리스 고트샬크(Kris Gottschalk)가 검정 레이스 톱과 턱시도 팬츠를 입고 무대로 걸어 나오자 일제히 그녀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은 런던의 베르수스. 안토니 바카렐로가 디자인한 컬렉션에선 루스 벨(Ruth Bell)이 30촉 백열전구처럼 빛을 발했다. 은빛 메두사 벨트를 두른 검정 점프수트 차림의 이 영국 소녀는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마지막 방점을 찍은 인물은 루이 비통 쇼에 선 타미 글라우저(Tamy Glauser). 스위스 출신으로 올해 서른살인 그녀는 바랜듯한 점프수트를 입고 미래적인 공간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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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모델을 상징하는 찰랑이는 블론드 대신 까까머리 모델의 전성시대가 펼쳐졌다. “우리에게 영화만큼 익숙한 패션에서 삭발, 혹은 거의 삭발에 가까운 마이크로 커트가 느닷없이 ‘헉!’ 하고 나타날 때가 있다.” 지난 2003년 11월호를 통해 우리는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모델 사스키아를 이렇게 설명했다(당시 그녀는 삭발에 가까운 머리로 파리 <보그>표지에 등장했다). “물론 임금 인상이나 미성년자 모델 금지, 혹은 마른 모델 퇴출 같은 거국적 사안과 관련해 패션모델 노조 위원회에서 벌이는 농성이나 시위가 아니다. 그저 강력한 뭔가가 필요하거나 호전적 트렌드를 원할 때, 패션 실력자들이 눈동자 굴리며 쓸 만한 모델을 물색한 후 머리카락 한번 밀어보라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식이다.” 2년 전 사스키아가 혈혈단신 삭발 모델 시대를 열었다면, 지금의 버즈 컷 모델 군단은 떼로 등장해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강력한 뭔가’, 혹은 ‘호전적 트렌드’가 아닌 개성 표현이라는 것. 지난 6월 런던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쌍둥이 자매 메이와 함께 저녁을 먹던 루스 벨은 소속 에이전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매와 함께 쌍둥이 모델로 3년간 일했지만, 하이패션 세계로 건너오지 못하던 그녀는 전화 한 통 덕분에 운명이 달라졌다. 통화 내용인즉슨, 데이비드 심스가 찍을 알렉산더 맥퀸 가을 광고 모델로 그녀를 선택했다는 것. 단 한 가지 조건은 머리를 완전히 밀어야 한다는 것. “맥퀸 광고를 찍고 싶었어요. 데이비드 심스와 조 맥케나(스타일리스트)와 일하고 싶었죠. 무엇보다 머리칼을 잘라 새롭게 변신하고 싶었어요.” 잘나가는 헤어 디자이너 폴 핸론이 그녀의 긴 금발을 자르는 데는 채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루스의 에이전트는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본인은 담담했다. 소아암 환자를 위해 가발을 만드는 자선단체에 막 자른 자신의 머리카락을 기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8월 초 맥퀸 광고가 공개되자마자 다들 루스를 찾기 시작했다. 에디 슬리먼은 당장 그녀를 생로랑 리조트 컬렉션의 광고 모델로 낙점했고 <V매거진> 화보도 촬영했다. 랑방의 알버 엘바즈는 그녀를 오프닝 모델로 세우며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 패션은 개성 있는 모델을 원합니다. 이상적 아름다움의 개념은 점점 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덕분에 10년 전만 해도 그 안에 속하지 못한 이들까지 받아들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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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 글라우저 역시 10년 전이라면 그저 남자 같은 모델에 그쳤을지 모른다. “스위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어요. 베를린으로 가서 공부를 더 할까 고민했죠. 그저 모델 일은 용돈 벌이쯤으로 여겼죠.” 하지만 그녀는 베를린이 아닌 파리로 건너와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눈에 들었다. 모델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루이 비통 무대에 선 그녀는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짧은 머리 덕분에 ‘앤드로지니’를 대표하는 모델로 자리 잡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게 싫은 듯하다. “단순히 짧은 머리 때문에 저를 중성적인 모델로 보는 건 너무 싫어요. ‘젠더 코드’는 너무 다양해서 그렇게 단순히 정의 내릴 순 없거든요.” 그렇다면 머리를 다시 길러보는 건? “절대! 짧은 머리가 좋아요. 1cm쯤 길었다 싶으면 다시 확 밀어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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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삭발이 선택이 아닌 운명인 모델도 있다. 독일 모델 크리스 고트샬크는 발리의 병원에 누워 지난봄을 보냈다. 베를린에 사는 그녀는 방콕으로 명상 여행을 떠났고, 발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던 중 큰 사고가 난 것. 헬멧을 쓰지 않아 뇌진탕을 겪은 그녀는 수술을 위해 머리카락을 밀었다. “살아 있는 게 다행일 정도예요. 퇴원하자마자 다시 머리를 짧게 잘랐죠. 그게 새로운 시작이 됐어요.” 그때만 해도 뉴욕에서 지방시 쇼를 열기로 한 리카르도 티시는 이미 대부분의 캐스팅을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크리스를 만나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당장 쇼에 세울 듯했으나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더 짧게 머리카락을 자른 뒤 금발로 염색해달라는 것. “미용실에서 2시간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고 탈색했어요. 아주 쉬웠죠. 저는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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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 삼인조를 제외하고도 논산 훈련소 앞에서도 어색하지 않을 모델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이태리의 아티스트 자매 줄리아(Giulia)와 카밀라 벤투리니(Camilla Venturini)는 패셔니스타인 줄리아 로이펠트, 리지 재거 등과 함께 ‘토즈 밴드’의 멤버로 발탁됐다. 머리카락 한 올도 남지 않은 러시아 출신 모델 야나 도브롤류보바(Yana Dobrolyubova)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파우스토 푸글리시, 요지 야마모토 쇼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 베트멍 쇼에는 여러 명의 삭발 모델이 동시다발적으로 재빨리 걸었다. 그런가 하면 아크네 스튜디오 쇼를 시작한 건 이태리 <보그> 촬영을 위해 머리카락을 완전히 민 열아홉 살짜리 네덜란드 모델 수키 흐라번호르스트(Soekie Gravenhorst)였다. 여기에 아약 뎅(Ajak Deng), 아밀나 에스테바오(Amilna Estevao), 그레이스 볼(Grace Bol), 헤리에스 폴(Herieth Paul) 등 아프리카 출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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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 모델의 거대한 조류는 서울에까지 밀려왔다. 지난 서울 패션 위크 중 푸시버튼 쇼에서 금발로 염색한 삭발 모델이 등장한 것. 연보라색 시폰 드레스를 입고 피날레를 장식한 아가씨의 이름은 이지(본명은 이지혜). 스무 살짜리 소녀를 발견한 건 박승건이었다. “봄베이 진 행사장에서 그녀를 처음 봤어요. 다리가 가늘고 긴 남자 모델인 줄 알았죠.” 대학에서 모델학과를 다니던 이지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디자이너는 쇼를 준비하며 다시 한 번 그녀를 떠올렸다. “작고 예쁜 두상에 톰보이 같은 모습이 제가 그동안 찾던 이상적인 푸시버튼 모델과 딱 맞아떨어졌어요.” 그는 곧 헤어 스타일리스트 예원상에게 이지의 머리카락을 좀 더 짧게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모델 역시 거리낌 없었다. “모델이라면 여러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평소에도‘쇼트커트’였지만, 더 짧게 자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죠.” 주위에서 놀라진 않았을까? “오히려 반응이 더 좋아요. 사람들이 더 저를 주목하는 것도 좋았죠. 달라진 건, 오히려 더 여성적인 옷을 입게 된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실크 블라우스를 샀어요. 여성스럽게 매치하기 좋을 것 같더라고요.”

90년대 장 폴 고티에의 뮤즈로 활동하던 삭발 선배 이브 샐베일(머리 위에 용 문신이 그대로 보일 만큼 짧은 머리를 고수했다)은 펑크 이미지만 대변했다. 시고니 위버나 데미 무어 역시 영화에서 남성적 이미지만 강조했다. 하지만지금 버즈 컷 유행은 한 가지 이미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생로랑 무대에서 루스는 미니 드레스를 입었고,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는 삭발 모델들에게 색색의 드레스를 입혔다. 이지에게 팬츠 수트가 아닌 드레스를 입힌 박승건 역시 반전 매력을 노렸다. “머리가 짧을수록 작은 두상과 얇고 긴 목선이 드러나면서 여성성이 두드러집니다. 시네이드 오코너나 애니 레녹스가 무대에 설 때 우리가 느끼는 건 남성적 멋이 아닌 여성미의 극치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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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밀자마자 난 첫 번째 오르가슴을 느꼈다.” 최근 자서전을 출판한 삭발 모델의 원조 그레이스 존스는 이렇게 고백했다. 당시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던 헤어 디자이너 앙드레(파라 포셋의 전설적인 머리를 완성한 인물)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완전히 민 뒤 제2의 삶을 맞았다는 것. 그녀가 가리킨 오르가슴은 단순히 침대 위에서의 희열만 의미하지 않았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야 하는 모델로서 경쟁력을 제공한 것이 그녀에겐 삭발이었다. 과연 지금의 ‘버즈 컷 부대’가 대선배이자 전설인 그레이스처럼 모델로서의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 있을까? 다행히 루스를 비롯한 삭발 모델들에게 미래는 빛나고 있다. 열아홉 살짜리 영국 소녀는 똑부러지게 말했다. “남들과 다르고 개성적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긍정적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