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INTO ATELIER – ⑨ PIETER VERMEERSCH (피터르 페르메이르스)

아틀리에는 한 예술가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동시에 한 인간의 열정과 고독, 자유와 욕망을 품은 일상의 통로이다.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보그〉가 파리, 브뤼셀, 베를린, 도쿄, 뉴욕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 10인의 작업실을 찾아 ‘오늘의 예술’을 포착했다. 예술가의 시공간에서 출발한 패션 모먼트는 동시대성의 또 다른 기록이다. ▷ ⑨ PIETER VERMEERSCH

PIETER VERMEERSCH in BRUSSEL

‘21세기적 미니멀리스트’ 피터르 페르메이르스의 작품이 품고 있는 색의 본질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표현한다. 그리하여 꽉 찬 고요함이 예리하게 그의 아틀리에를 관통한다.  옆이 트인 롱 베스트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실크 브리프는 라펠라(La Perla), 레이스 스타킹은 샤넬(Chanel), 워커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21세기적 미니멀리스트’ 피터르 페르메이르스의 작품이 품고 있는 색의 본질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표현한다. 그리하여 꽉 찬 고요함이 예리하게 그의 아틀리에를 관통한다.
옆이 트인 롱 베스트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실크 브리프는 라펠라(La Perla), 레이스 스타킹은 샤넬(Chanel), 워커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Silence is so accurate(고요함은 매우 정확하다).” 마크 로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 언어가 보는 이의 상상력을 무력화시킨다고 믿은 그는 언젠가부터 작품에 제목조차 달지 않았다. 일체의 다른 요소가 개입하지 않은 작품은 텅 비어 있되 꽉 차 있다. 넓게는 ‘추상화가’로 분류되는 몇몇 예술가들 역시 천상의 퀄리티로 시각적 공백을 드러내기 위해 오랜 세월 고군분투해왔다. 추상화가 피터 할리(Peter Halley)가 정의한 “평온함 혹은 광채(Serenity or Radiance)”의 바로 그 상태 말이다. 어쨌든 73년생 작가 피터르 페르메이르스는 그중에서도 까마득한 후배일 테지만, 로스코와 마찬가지로 제목을 달지 않는다. 단순함을 통한 평온함의 정서는 ‘무제’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부제가 작품 방식 혹은 존재 이유를 시사할 뿐이다. 이를테면 ‘무제(Blue 0-100%)’라는 작품은 3,000㎡에 달하는 벽을 모두 지워내고, 0%에서 100%의 파란색으로 섬세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강요하지 않음’은 누구나 색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온전히 몰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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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피터르 페르메이르스의 아틀리에는 작품만큼 정적인 곳이다.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밀려드는 감정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헷갈리는 작품이 곳곳에 있다. 새벽부터 달려온 촬영팀에게 크루아상과 커피를 차려주었지만 말이 많거나 사교적인 타입은 아니었다. 여명 혹은 황혼이 내려앉은 빛의 풍경을 그러데이션으로 재현한 그림 앞에서 소싯적 패션모델로 활동했다는 그는 조용히 포즈를 취했다. 예리한 고요함이 그의 몸과 아틀리에 그리고 작품을 관통했다. 이런 곳에서 스티븐 오말리(Stephen O’Malley)의 노래가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패션에서부터 미니멀리스트의 아우라를 풍기는 피터르 페르메이르스의 작업은 매우 평면적이다. 벽이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는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고 강조한다. 벽에 그린 그림인 경우,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색을 칠한다’는 행위와 명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캔버스에 그린 그림일 땐 다르다. 맑은 하늘, 빈 벽, 공간의 구석 등을 직접 촬영해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침 작업 테이블에는 그가 찍은 사진이 가득했는데, 그는 사진의 색을 반전하고 알맞은 톤을 매치하며 유화물감으로 재현한다. 에어브러시나 스프레이 페인트 같은 쉬운 방법 대신, 붓을 들고 애쓴다. 누군가가 작품에 매달린 수고로운 ‘시간’이 보는 이에게는 더 많은 ‘공간’을 마련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상관관계를 색으로만 재현하는 피터르 페르메이르스의 작업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그가 ‘라인 랜드스케이프’라 표현한 그림에는 노란색 가로줄이 한 줄 들어가 있었다. 시간의 다양한 모습, 빛의 뉘앙스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렇게 공들인 작품을 긁어 훼손함으로써 또 다른 작품을 만드는 방식도 시도 중이다. 피터르 페르메이르스는 여전히 말을 아끼지만, 말은 아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맥박과 다른 맥박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라 스스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많은 걸 보여준다. 미니멀리즘의 심오하고도 강한 힘이 아틀리에를 지배한다.

컷아웃 톱은 푸시버튼(Pushbutton), 시어한 블랙 스커트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컷아웃 톱은 푸시버튼(Pushbutton), 시어한 블랙 스커트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화이트 풀오버는 질 샌더(Jil Sander).

화이트 풀오버는 질 샌더(Jil San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