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서 치료받기 위한 ‘젠더 의학’ 이야기
여자이기에 아프고, 여자로서 치료받기 위한 ‘젠더 의학’의 시대.
생물학은 여성에 대해 아는 바가 적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여성건강부 재닌 오스틴 클레이턴(Janine Austin Clayton) 부국장은 2014년 어느 인터뷰를 통해 오직 남성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21세기 의료계의 현실을 저격했다. 그와 같은 고민을 품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연구에 성별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며 ‘젠더 의학(Gender Medicine)’이란 이름으로 진화하고 있다. 1억3,000만km나 떨어진 화성과 금성에서 지구로 날아온 두 인류, 이토록 다른 남녀가 의학계에서는 대체 왜 이제야 심판대에 오른 걸까.
170cm, 70kg, 여기에 ‘남자’. 의생명공학 발전 이래 지금까지 인간 표준으로 사용되어온 지표다. “남자와 여자의 겉모습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죠. 그렇다고 대장암에 걸릴 확률도 반드시 다를까요?”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젠더혁신연구센터(GISTeR)와 함께 젠더 의학을 한반도에 알리는 대표적 인물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찾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남녀를 구분해 연구해야 한다는 구체적 근거 말이에요.” 성별은 일종의 변수다. 가설 검증에 관련 없는 변수는 통제해야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극심한 호르몬 변화를 겪는 여인들에게는 획일적인 결과 도출을 방해하는 또 다른 요인마저 내재된 셈이다. 20세기 후반 임상 시험, 특히 신약 연구가 가임기 여성의 자궁에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가부장적 배려도 포함됐다. 여기에 시간과 돈, 실적이라는 경제적 문제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으니 표준 체형의 남성이 의생명공학 연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소아가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듯, 남녀는 질병의 범위, 형태, 약물 반응에서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그 묘연했던 원인이 뒤늦게 밝혀졌는데, 여성호르몬으로 불리는 에스트로겐이 난소, 자궁과 같은 기관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곳곳의 세포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죠. 정확히 말하면 이 호르몬을 받아들이는 에스트로겐 베타 수용체가 모든 세포에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앞서 힌트로 던진 대장암 발병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데, 대장 세포의 에스트로겐 베타 수용체가 암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에요.” 비로소 젠더 의학, 즉 ‘성차의학’의 서막이 열렸다.
성차의학 선진국 유럽과 신흥 세력으로 부상한 미국이 맨 먼저 주목한 기관은 우리 몸의 엔진, 심장이다. 미국심장학회는 통증 없는 ‘고요한 심장마비’가 여인들을 위협한다고 경고했다. 한발 더 나아간 영국심장학회는 뚜렷하게 나타나는 남성 환자의 증상으로 정리된 의료 체계가 여성 환자의 오진을 촉발(무려 남성의 50% 이상)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관상동맥 질환은 성별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 의사들을 설득하는데 10년이 걸렸죠.” 심장 전문의이자 컬럼비아대 성인지의학연합(The Partnership for Gender-Specific Medicine) 설립자인 마리안 레가토(Marianne Legato) 박사는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 마야 뒤센베리의 저서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이와 같은 호소에도 변하지 않는 의료 서비스의 실태를 폭로하고자 ‘세계 여성의 날(IWD, International Women’s Day)’ 운영진은 올 초 공식 홈페이지에 하버드의과대학 연구를 인용해 심장마비 후 1년 이내 생존 확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낮고, 그 이유의 하나가 여성 환자의 특수성이 배제된 검사 방법과 치료라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심장’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나영 교수는 심장 이후의 성차의학 성지로 소화기와 간을 꼽는다. 약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인 약동학도 빼놓지 않는다. “체지방률, 호르몬 변동, 효소 농도, 신진대사 속도 등의 차이로 약의 효과가 상이하게 나타납니다. 약동학에 젠더 요소가 추가되면, 치료에서 남녀 격차를 좁힐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이 될 수 있죠.”
2013년 미국은 매해 4,000만 명에게 처방되는 불면증 약 ‘졸피뎀’으로 떠들썩했다. FDA에 자기 전 졸피뎀을 섭취한 환자가 다음 날 아침 교통사고를 일으켰다는 800건 가까이 올라온 보고 때문이다. 이 계기로 8시간 수면 뒤 혈액에 남아 있는 졸피뎀 농도를 확인해보니 여성 복용자의 15%가 여전히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동일한 상황의 남성 복용자는 단 3%에 불과했고, FDA는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여성에게 졸피뎀을 1회, 반 알만 처방하도록 복용 수칙을 수정했다. 더 아찔한 진실도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이 졸피뎀뿐 아니라 현존하는 수많은 약은 젠더 간 기능 격차를 지니며, 우리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제품이 더 많다고 못 박은 점이다. 씁쓸한 과거 청산을 위해 신약 개발 시 임상 시험 3단계에 소수 인종과 여성을 반드시 참여시켜야 한다는 방침도 선포했다.
그럼에도 성차의학은 교육과 정책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느리지만 성실히 순항 중이다. 10년 전 미국과 캐나다의 44개 의과대학은 젠더 의학 교육과정이 있는지 자체 검토했고, 이에 부족함을 느낀 70%의 학교가 관련 과목을 편성했다. 국내 ‘소화기내과 다양성위원회’는 외국인과 장애인까지 포괄하며 보다 정밀한 의학을 위한 포석을 깔았다. 기분 좋은 변화는 더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전임상 연구에 사용되는 실험 세포를 XX 염색체와 XY 염색체로 나누고 척추동물을 대상으로 할 경우 암수를 모두 포함시키되 그렇지 않을 때는 명확한 과학적 근거를 표기하라고 규정했다. 김나영 교수는 젠더혁신연구센터가 배포한 ‘성과 젠더 요소를 고려한 연구 가이드라인’을 소개한다.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하는 작업은 기초연구와 진료 사이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예를 들어 획일화된 대장 내시경 검사 나이를 남자는 75세, 여자는 80세까지 차등을 두어 조절하는 방식이죠. 성차의학이 책을 벗어나 진료실에서 꽃피울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언젠가 여성에 대한 관심이 가슴과 Y존에 치우친 ‘비키니 의학’에서 벗어나도록 지원하고 싶어요.” 지난해 4월, 페미닌 헬스케어 브랜드 ‘해피문데이’를 이끄는 김도진 대표에게 10년 뒤 목표가 무엇인지 묻자 돌아온 답이다. 여성의 건강한 삶을 위한 의생명공학의 재정립은 일상 가까이 진입하며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성 편견은 많은 분야에서 누군가의 소중한 기회를 빼앗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여성은 교통사고 시 성인 남성 기준으로 설계된 에어백 위치가 맞지 않아 더 큰 부상을 입고 다양화가 부족한 AI 안면 인식은 성전환을 겪고 있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죠.” 젠더 의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웹사이트 ‘Gendered Innovations’의 수장, 스탠퍼드대 론다 시빙어(Londa Schiebinger) 교수는 2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코로나19에 대한 성차 분석에 속도를 내고 있다.
왼손잡이용 가위를 마주한 날을 잊을 수 없다며 김나영 교수 또한 성차의학을 사회 전반으로 인양하는 밝은 미래를 꿈꾼다. “알코올 대사를 연구해보니 중독성은 남성에게 높게 나타나지만 췌장염, 간경화, 치매를 더 많이 일으키는 쪽은 여성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미세먼지와 모바일 전자파 자극의 성차를 증명하는 데 관심이 있죠. 의학은 물론 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제입니다.”
‘Gender Medicine’, ‘Sex-Gender Medicine’, ‘Sex Specific Medicine’… 성차의학을 지칭하는 다양한 동의어 사이 놓쳐서는 안 되는 본질을 알아채셨나? XY 염색체에 치우친 의학계에 반향을 일으키고자 그 축을 그대로 옮겨오는 과오를 저지르면 곤란하다. 어디에도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를 담지 않은 것이 증거다. 론다 시빙어 교수는 성차의학에 대해 “편향성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절대다수의 남성 중심 연구의 잔재가 뿌리 깊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여성 안전 의료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일 뿐, 골다공증이나 유방암, 편두통, 정신 질환에서 남자는 소수자로 돌변한다. 남녀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이고 왜 한쪽이 질병에 더 취약한지, 약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지 깊이 있게 파고들며 인체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젠더 의학은 추상적인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다양성 시대의 족적이 아니다. 인간의 질병을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의 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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