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SF가 내리면
더 이상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 있으리라 기대하며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뜨지 않지만, 어쩐지 하루 종일 품게 되는 희망은 SF소설의 한 면을 닮았다. 한국 SF소설가 4인이 써 내려간 기발하게 비틀어지고 무너진 세상에도 크리스마스는 유일하게 불을 밝힌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머리맡 선물. 메리 크리스마스!
초록 소파
박문영 / <지상의 여자들> <주마등 임종 연구소> 저자
아이가 없어진 건 아침 무렵이었다. 여진은 현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새로운 가족과 함께 있을 그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길에 주저앉게 될 것 같았다. 여진은 대신 집 밖을 걷고 또 걸었다. 찬 바람에 귀와 볼이 얼얼했다. 눈물이 엉겨 붙은 속눈썹이 금세 얼어갔다. 여진은 쓰레기장 앞에 멈춰 섰다. 눈앞의 풍경은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등을 돌린 여진이 언덕의 주택가를 올려다봤다. 낯익은 동네가 처음 와본 곳처럼 느껴졌다. 건물 외벽의 파이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진이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동파 방지. 낮에 시공해야 할 현장이 그제야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동료 배관사는 긴말 없이 여진을 다독였다.
지난여름, 여진이 소파를 뜯고 있을 때 현재는 이마를 짚고 물었다. “그만둬. 이걸 어떻게 아이로 생각할 수 있어?” “한서가 제일 좋아했던 의자야. 여기 있는 게 편할 거야.” “힘든 건 알아. 그래도 이러진 말자.” 여진이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현재와 더 다투기 싫었다.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여진은 대답해야 했다. “너도 힘든 걸 알아. 그래도 남은 게 있잖아. 희미해도, 흐릿해도 한서가 여기 있다고.” “우리 차라리 교회나 성당에 나갈래? 같이 가자.” 눈을 감은 여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재가 다시 말했다. “너무 약한 신호야.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너만 괴로워져.” 소파 앞의 둘은 한참 동안 조용했다. “우리 잘 보내주자.” 현재가 여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여진은 소파 앞에 다시 웅크려 앉았다. “그래. 너는 네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잘 보내주면 돼.” 여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해체된 의자를 어서 조립해야 했다.
아이는 봄에 부부 곁을 떠났다. 사고로 남은 건 아이 뇌의 12%뿐이었다. 뼈와 장기엔 손을 댈 도리가 없었다. 가망을 바라기 어려웠다. “이 몸 안에 사는 방법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두 분이 시범 사업에 임해주신다면.” 의사는 아이의 잔류 의식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본격적인 서비스 상용화는 4년 뒤쯤 가능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좋다, 싫다, 이외에 다양한 의사 표현을 접하시긴 힘들 수 있어요. 아이의 상태도 미약하고, 마인드 업로딩 기술도 보완 중이라서요.” 여진은 의사의 말을 끝까지 들었고, 현재는 도중에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어떤 물건이 괜찮을까요?” “너무 작지만 않다면요. 저장 기기는 새끼손톱 크기 정도인데, 그대로 지니고 계시기는 어려울 거예요. 지금까지는 인형, 시계, 반지를 택하신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남은 정신을 어떻게 느끼나요?” “빛이나 멜로디로요. 센서 연결 방법에 따라 의식의 현화 형태도 달라요. 결정을 마치시면 저희가 업체를 통해 제작해드립니다.” “저는 기기만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여진은 조그마한 소파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진이 아이를 위해 직접 만든 의자였다. 한서는 거기서 밥을 먹고 책을 읽고 노래했다. 거기 앉아 웃고 울고 졸았다. 거기 올라서서 여진을 불렀다. 아이가 머물던 소파는 늘 따뜻했다.
여진은 머릿속에 차량용 열선 시트 구조를 그렸다. 히팅 컨트롤 원리는 익숙했다. 소파 가죽 밑에 열선 모듈을 삽입하고 등판 아래 스위치를 부착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한서의 기분이 좋을 땐 온기가, 기분이 나쁠 땐 냉기가 흐를 것이다. 여진은 한서가 몸 담을 곳도, 한서의 생각을 전환할 방식도 홀로 결정했다. 그날부터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까지 열 달 남짓, 아이는 언제나 여진 곁에, 천국이 아닌 그의 품에 있었다.
뜰에 두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거길 좋아했다 해도. 여진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주민 센터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여진을 쳐다봤다. 아까부터 동네를 떠도는, 슬리퍼를 신고 혼자 중얼거리는 이상한 여자였다. “저 소파 귀여워. 우리 아지트에 둘래? 누가 버린 것 같은데.” “그래도 집 안에 있잖아.” “어때. 울타리도 낮은데.” 여진이 뜰에 나왔을 때는 이미 교복을 입은 아이 셋이 소파를 들고 사라진 후였다. 아이들은 얼마 후 소파가 생각보다 무겁다며 투덜댔다. “아, 추워. 손 시려 죽겠네.” 아이들은 공원 구석에 소파를 내려뒀다. 한 아이가 소파에 걸터앉다 소리를 질렀다. “뭐야, 좁아서 엉덩이도 안 들어가. 이거 네 살 이상은 못 앉아.” “자세히 보니까 우중충하다. 우리 헛짓거리했어.” “제자리에 갖다 두자.” 두 아이가 그 말에 입을 벌렸다. “야, 이게 뭐라고.” 두 아이는 소파를 마구 흔들며 웃었다. 소파 등이 화단에 부딪히자, 거기 있던 스위치가 켜졌다. 허리를 굽히며 웃던 두 아이는 남은 아이의 팔짱을 끼고 공원 밖으로 내달렸다.
주인 없는 소파 한가운데 무당벌레가 날아왔다. 벌레가 몸을 털자 작은 서리가 떨어졌다. 돌 사이로 벌레가 떠난 후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방 고치가 소파로 툭 떨어졌다. 바람이 불자 텅 빈 고치가 소파 위를 빙그르르 돌았다. 소파에서 온기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차바퀴 아래 있던 잿빛 고양이 한 마리가 소파에 올라갔다. 겨울 낮의 볕과 소파의 열기로 고양이는 눈을 잠시 감았다. 시멘트 위를 뛰느라 뭉쳤던 다리 근육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 계절을 나면서 이렇게 편안한 날은 드물었다. 고양이는 소파에 찬 배와 딱딱한 발바닥을 오래 붙이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갈 때쯤, 카페에 들어선 여진은 코코아 한 잔을 시켰다. 뜨거운 음료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코가 시큰했다. 다리가 아프고 허기가 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녁의 거리는 카페 내부보다 환했다. 혼자 있는 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고, 연인과 가족들은 몸을 가까이 붙인 채 웃었다. 가게 스피커에서 캐럴이 울렸다. 창밖으로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아이와 함께 누렸던, 평이한 겨울 풍경이었다. 여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이를 찾을 방법이 있었다. 소파의 특징, 연락처, 사례금을 적은 전단을 만들 생각이었다. 여진의 걸음은 빨랐다가 느려졌고, 느려졌다 빨라졌다.
집에 다다른 여진은 현관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뜰은 어젯밤보다 컴컴했다. 전단 광고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장난 전화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여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슬리퍼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일 때까지 여진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저기요. 여기 사세요?” 여진이 얼굴에서 손을 뗐다. “죄송해요. 이거 아침에 가져갔는데,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교복을 입은 아이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진은 아이가 발치에 내려둔 소파를 연거푸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여진은 뒤돌아선 아이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아이의 교복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소파를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낸 여진은 거실 불을 껐다. 단자 버튼을 누르자 소파 앞 트리에 불빛이 들어왔다. 희미해도, 흐릿해도 고운 빛이었다. 여진이 소파에 왼손을 올렸다. “미안해. 춥게 해서.” 손 닿은 자리가 곧 따스해졌다. 여진이 소파에 얼굴을 붙이고 트리를 쳐다봤다. 별이 달린 꼭대기 아래 잎들이, 바닥 밑으로 끝없이 둥글게 퍼져 나갈 것 같았다. 여진이 바라는 사랑의 모양이었다.
산호 트리
김청귤 / <재와 물거품> 저자, <미세먼지> 공저자
우리는 향기 나는 꽃과 초록색 울창한 나무들, 그 아래를 뛰어노는 네발 달린 짐승이 있는 마른땅에서 젖은 땅으로 들어와 산 인간의 후손이었다. 회색빛 건물, 돈을 채굴하기 위해 쓰는 에너지, 거기서 나오는 열, 사람들이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제품 등으로 마른땅과 그 위에 사는 모든 생을 뒤로한 채 바닷속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홀로 내려온 인간을 바다는 품에 안았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인간의 형체를 한 채 바닷속에서 숨을 쉬고 걷고 헤엄쳤다.
바다는 언제나 아름답고 고요하며 거세고 찬란하며 사랑스러웠다. 가만히 서서 눈을 감으면 온몸을 감싸는 감각에 살아 있다는 안온함을 느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아직도 인간들이 남긴 흔적이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빨대와 텀블러, 투명한 유리병, 복숭아가 그려진 캔, 때때로 해파리처럼 날리는 비닐봉지, 솔이 잔뜩 벌어진 칫솔….
우리는 이것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비닐봉지나 커다란 장바구니에 쇼핑을 하듯 예쁜 조개껍데기를 담을 화장품 용기와 거북이 등을 닦아주기 좋은 커다란 솔과 물살 따라 한들거리는 옷을 담고 각자의 장소에 보관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따라 한 행동이지만, 바다를 죽이는 것들을 사고 또 샀다니 우리 중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생에 상처를 주는 걸 이렇게도 많이, 아주 많이 만들다니. 목에 비닐봉지를 휘감은 채 바다를 헤엄치는 바다거북, 유리병 보금자리 안에서 지내는 문어, 플라스틱에 낀 채 자라 몸이 기형적으로 잘록한 돌고래…. 우리는 이제 마른땅에 살던 인간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인간의 형체이기 때문에 손이 있었다. 목에 걸린 비닐봉지를 빼 그 안에 유리병과 플라스틱을 담은 게 시작이었으며, 그게 지금까지 내려와 일종의 본능이 되어 줍고 또 모으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아무리 본능이라도 각자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주로 모으는 품목이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반짝거리는 걸 좋아해서 뾰족한 게 다섯 개나 있는 장식품, 꽃이 담겨 있는 플라스틱 상자 등을 주웠다. 예전에는 호피 무늬 치마,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가방, 물살에 휘날리는 커튼, 알 수 없는 단어가 있는 반팔 티 등이 많았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 사라졌다고 했다. 이 또한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들은 왜 이렇게 많은 옷을 샀을까요?”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옷으로 만든 산은 아주 많았어. 그 산이 점점 낮아지고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우리는 안도했지. 바위도 아니라서 물살이 거세지는 그날이 오면 무너져서 바닷속을 떠도는 걸 다시 모아야 했거든. 그러고 보니 이제 곧 그날이 오겠구나.”
바닷속에서는 시간 가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친했던 문어가 알을 낳고 죽었을 때, 새끼였던 돌고래가 자라 새끼를 낳았을 때나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평소에는 그저 바닥을 걷거나 헤엄치면서 발견한 것들을 줍고, 돌고래와 함께 먼 곳에 있는 옛 문명의 흔적들을 탐험했다.
창문이 아주 많이 달린 배, 머리에 뿔이 달린 말 모형, 안이 다 비치는 건물, 바위가 깨진 듯한 무너진 건축물. 우리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것들을 보면서, 이런 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했길래 그 모든 마른땅을 잃어버린 건지 궁금했다.
돌고래 무리와 함께 새로운 곳으로 향했다. 물살이 이따금 거세지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가 멀지않은 것 같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얼마나 내릴까. 그동안 모았던 것들이 많이 부식되거나 녹아내렸지만, 아직도 사라져야 할 것이 많았다. 전의 전의 전의… 우리가 주워도 아주 많이.
바다에 떠다니는 것도 많고, 바닥에 박혀 있는 것도 많았다. 그냥 눈앞에 있는 걸 줍다 보니 어느새 우리 안에 새겨져 대대로 내려오는 습관 같은 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보다 거대한 것들은 어떻게 하지 못하지만 지나가다가 고래를 발견하면 부탁해서 무너뜨리기도 한다. 큰 것보다 작은 것들이 사라지기 더 쉬우니까.
돌아다니다가 바위도 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인형도 모두 빛나는 이끼로 뒤덮인 곳을 발견했다. 그 사이에 파묻혀 있던 별도. 품에 안아도 넘칠 만큼 큰 별도 이끼 덕분에 연두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실제로 별을 본 적은 없지만 정말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이번 트리 꼭대기에 올라갈 건 이 별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모은 유리 제품을 들고 물살이 아주 거센 골짜기로 향했다. 내 몸보다 더 큰 바다거북이 옮기는 걸 도와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고요하나 안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가 유리를 하나둘씩 꺼내 던지자 천천히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떨어졌다. 유리는 오랫동안 변함이 없기 때문에 물살을 통해 갈고 또 갈아야 했다. 때때로 골짜기 아래서 위를 향해 물살이 치솟아오를 때 가벼운 유리돌이 분출되어 바다로 퍼져나갔다. 바다에 있는 속이 비치는 반짝반짝하고 예쁜 돌은 다 유리라고 보면 됐다.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더 작아질 테니, 모든 건 바다의 뜻에 맡기면 되었다. 우리도 바다의 일부분이니까.
보금자리로 돌아오는데 물살이 심상치 않았다. 하얀 눈이 저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바다 위를 떠다니던 스티로폼이었다. 바다 표면부터 깊은 바닷속까지 휘젓는 시기가 오면 하얀 알갱이가 바닷속에 가득했는데 그게 마치 눈처럼 보이기도 했고, 온 바다가 거세게 뒤섞여 더 깨끗해지는 걸 보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눈이 내리는 날을 크리스마스라고 불렀다. 전의 크리스마스보다 더 적은 눈이 오기를, 거센 물살을 통해 죽은 바다가 살아나기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바다거북 위에 자리를 잡고 엎드리자 빠른 속도로 헤엄쳤다. 벌써 트리를 장식할 물건을 품에 안은 채 트리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도 있었다. 나도 얼른 보금자리로 돌아가 빛나는 별을 챙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번에 같이 갔던 이들이 각자 빛나는 걸 챙기는 게 보였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웃고는 트리로 향했다.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으니 다른 친구들과 놀고 온 돌고래가 나와 함께 트리를 향해 헤엄쳤다. 눈이 더 깊은 곳으로 왔다가 위로 솟구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눈이 바닥까지 내릴 것 같았다.
트리를 향해 가는 길은 험했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에 붙어 있는 조개들과 바위에서 자라는 해초와 말미잘, 그 안에 사는 물고기들까지. 평탄한 길에서는 걸으면 됐지만, 바위밭에서는 헤엄쳐 가는 게 훨씬 빠르고 안전했다. 돌고래는 바위밭이 보일 때부터 이미 위에 떠서 헤엄치고 있었다.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바닥을 박차고 위로 솟아오르자 돌고래가 다가와 자신의 지느러미를 잡게 했다. 나는 한 손으로는 별을, 한 손으로는 돌고래를 붙잡은 채 바위밭 위를 지났다. 주황색, 노란색, 빨간색, 보라색, 연두색, 녹색, 검은색 등 색색의 것들이 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바위밭의 다른 이름은 꽃밭이었다. 이쪽은 아주 다양하고 작은 생명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아니면 우리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꽃밭이 더 커질 것 같아 기대되었다. 어디선가 물살이 빠르게 지나갈 때마다 바위밭 위의 생들이 몸을 눕히거나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가 나왔다.
어느새 하얀 산호밭이라 아까보다 더 조심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고개를 드니 아주아주 큰 산호 트리가 보였다. 수십, 수백 개의 가지를 뻗은 채 딱딱하게 굳은 산호였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일 때부터 이 산호를 크리스마스트리 삼아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바라며 스티로폼 눈이 바닷속에 내릴 때마다 이곳에 오고 있었다. 우리는 점점 더 거세게 흩날리는 눈 속에서 각자가 든 물건들을 살폈다. “네가 가져온 게 이번 크리스마스의 별이구나. 꼭대기에 올려놓으렴.” 바다가 더 깨끗해지게 해주세요. 산호 트리가 다시 살아나게 해주세요. 간절히 바라며 두 발로 힘차게 바닥을 밀어내고 조심스레 발을 구르며 위로 위로 떠올랐다. 산호 트리 꼭대기에 도달해 별을 올려놓았는데… 굳어버린 산호 끝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발장구를 칠 생각도 못해 점점 바닥으로 내려오면서도 시선은 산호 끝에 고정했다. 하얀 눈이 바닥에 내려앉았다가 떠오르는 그 사이로 죽은 줄 알았던 산호 트리 끝에서 하늘거리는 촉수가 별을 만지는 게 보였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촉수가 하나둘 튀어나와 별을 휘어 감았다. 산호 트리의 끝부분이 점점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황모과 / <밤의 얼굴들> 저자, <모멘트 아케이드> 공저자
“부모님이 산타라는 걸 언제 알았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밤, 시아는 침대에 나란히 누운 AR 실루엣에 물었다. 여덟 살로 설정된 가상 인격 혜진이 경쾌하게 답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쓴 일기가 있어. 우리 엄마는 너무 바빴어.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다 잠든 엄마를 보고 아, 엄마가 산타구나 하고 알았어.” 일찍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와 두 이모를 키우며 고생한 할머니를 떠올리며 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엔 다들 산타 안 믿어. 내 친구들도 아무도 산타를 기다리지 않아. 그냥 선물 기다리지.” 곧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시아도 일찍 알았다. 엄마 아빠가 인터넷 쇼핑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다는 것을. 산타는 굴뚝을 타고 오는 게 아니라 택배 아저씨의 얼굴로 바쁘게 스쳐 간다는 것을. “산타클로스 믿는 척하면서 엄마 선물 받았어.” 시아는 밝게 말하는 혜진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엄마를 위해서 연기했구나?” “그때 우리 엄마, 너무너무 힘들었거든.”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혜진을 위로했다. “너도 힘들었지?” 그러자 혜진이 의연하게 말했다. “조금…. 엄마는 전력 질주하는 사람이었어. 그때 어떻게 버텼을까? 생각할수록 대단해. 엄마라는 산타는 크리스마스에만 온 게 아니라 1년 365일 달려와줬던 거야.” “우리 엄마도 그래.” 시아 엄마의 이름도 혜진이었다. 가상 인격 혜진이는 엄마의 옛 기록을 기반으로 만든 AR 캐릭터였다. 최근 일기나 블로그, SNS, 사진 앨범, 음악 플레이리스트 등 개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페르소나 가상 인격 서비스가 인기를 끌었다. 재료만 있으면 어린이들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제작이 간편했다. 부모들은 자신의 옛 일기와 SNS를 베이스로 어린이 캐릭터를 설정해 자녀에게 선물했다. 자녀 나이와 같은 시절의 부모가 자녀의 눈높이에 맞춰 친구가 되어주었다. 놀이 기능뿐만이 아니었다. 학습을 보조하고 상담을 돕고, 안전 및 보안을 보조하는 일은 가상 인격의 기본 기능이었다. 엄마의 옛 정보를 기반으로 구성되었기에 가상 인격은 엄마 심정도 잘 이해했고 부모와 자녀 관계 상담사 역할도 수행했다.
혜진은 엄격한 시아 엄마와는 달리 매우 엉뚱하고 발랄했다. 엄마 얘기로 불만을 터트릴 때면 시아와 혜진은 특히 잘 통했다.
시아가 각오하듯 말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받으면 나도 깜짝 놀라는 척할까?” 그러자 혜진이 맞장구를 쳤다. “나랑 같이 연습할래?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는 거야.” “좋은 생각이야!” 시아와 혜진은 열심히 상황극을 연습했다. “어머, 이것 좀 보세요! 산타 할아버지가 왔다 가셨나 봐요!” “좀 부자연스럽다. 다른 걸 말해봐.” “산타클로스야! 올해도 와줬어!” “그건 괜찮네.” “근데 우리 아파트에 굴뚝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아, 위층 가족들이 산타였나?” “그 말은 빼자.” “왜, 재미없어?” “나야 재밌긴 한데…. 엄마 아빠, 요즘 층간 소음 때문에 예민하잖아.” “킥킥. 알았어.” 시아가 잠들자 혜진은 방해 금지 모드가 되었다.
잠시 후, 혜진이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와 혜진은 단둘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시아가 잠든 사이, 엄마는 혜진을 통해 시아의 학습 진도 등을 확인하곤 했다. “너 어렸을 때 다짐했잖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이야. 이걸 좀 봐.” 혜진이 엄마의 옛날 일기를 펼쳐 보였다. “엄마랑 날 비교하지 마. 우리 엄마는 홀로 모든 짐을 떠안고 사느라 힘들었지만 나는 달라.” 엄마가 혜진이에게 속내를 쏟다 화를 냈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가상 인격이 학부모에게 잔소리까지 하니?” 엄마가 피곤한 얼굴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혜진에게 물었다. “시아,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받고 싶대? 들은 거 있어?”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른다. 이건 네가 중학생 때 쓴 일기야.” “뭐라고? 이 서비스, 사람 불쾌하게 만드네. 그만해!” 자다 깨 화장실에 가려던 시아는 엄마와 혜진이 심각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엿보고 말았다. 엄마가 혜진에게 화를 내다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잘하고 있는지 나도 확신이 없는데, 내 옛날 모습을 한 애가 낙심한 얼굴로 그렇게 쳐다보면 어떡하란 말이니?”
엄마가 혜진의 영상을 껐다. 시아는 요의를 참고 살그머니 이불 속으로 돌아왔다.
시아는 엄마의 어린 시절인 혜진이가 좋았다. 혜진이가 엄마에겐 편치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걸 시아는 처음 알았다.
어린 혜진이가 성인이 된 혜진이를 나무랐다. 일기장에 고이 적어두었던 꿈과 각오는 다 어디로 가고 고작 그 모양으로 살고 있느냐고 책망했다. 엄마에겐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올해, 시아 아빠는 택배 상자를 회사로 발송했다. 지난밤 재포장한 선물을 시아 머리맡에 놓았다. 엄마는 시아가 낙서했던 그림을 추상화로 바꿔주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리본으로 장식한 포토 프레임을 책상 위에 놓았다. 아파트에 굴뚝은 없었지만 산타클로스는 다녀갔다. “엄마! 산타클로스야! 올해도 와줬어!” 선물을 발견한 시아가 폴짝폴짝 뛰었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연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기뻤다.
포근한 날씨였다. 엄마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크리스마스답지 않게 따듯하네.”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은 뒤 시아는 부모님께 선물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산타클로스가 대신 전해달라고 했어.” 시아가 태블릿을 터치했다. AR 가상 인격이 세 가족이 앉은 식탁 한쪽에 나타났다.
30대 후반쯤으로 설정된 여성형 가상 인격이 웃고 있었다. 시아의 왼쪽 얼굴에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엄마 아빠, 안녕! 나는 서른여덟 살의 시아야.” 딸 시아와 가상 인격 시아의 얼굴을 엄마 아빠는 번갈아 바라보았다.
며칠 전 혜진이와 엄마의 대화를 엿들었던 시아는 엄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유치원 때부터 썼던 일기와 엄마와 나눈 카톡 데이터를 모두 입력해 새로운 가상 인격을 작성했다. 나이 든 모습으로 바꿔주는 사진 필터를 이용해 외양도 세팅했다. 나이는 서른여덟 살, 현재 엄마와 똑같은 나이로 설정했다. 서른여덟 살이 된 시아, 성장한 시아의 가상 인격이었다. 엄마가 자신의 어렸을 때 추억을 재료 삼아 딸에게 혜진이를 만들어 선물해준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가상 인격 시아가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혜진아, 나 시아야. 우리 수족관엔 언제 갈래? 내일? 아니면 토요일?” 가상 인격 시아의 말투는 어른스러웠지만 시아의 일기에 기반한 데이터였기에 다소 유치한 표현을 구사했다. 엄마 아빠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보였다. “어떡해. 우리 딸이 서른여덟이 되면 그때 난 60대야.” “여보, 난 칠순이야.” 가상 인격 시아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빨리 어른이 되어서 엄마의 친구가 되고 싶었어.” 그건 시아가 얼마 전에 일기에 적어둔 이야기였다. 그리고 엄마가 시아에게 혜진이를 선물해줬을 때 들려줬던 말과도 똑같았다. “엄마 어린 시절인 혜진이가 시아 친구가 되고 싶대.” 그날 밤 거실에 혼자 남은 엄마는 시아의 가상 인격을 재생했다. 처음 봤을 땐 시아와 똑같은 보조개에 시선이 갔지만 이번엔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에 시선이 갔다. 혜진이 캐릭터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다소 불편했던 마음과는 달랐다. 성장한 시아를 미리 그려보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자신의 이른 출근을 배웅해주던 시아 표정이 떠올랐다. 시아는 엄마를 응원하고 있었다. 얼른 어른이 되어 엄마의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상 인격 시아가 미리 입력된 크리스마스 인사를 엄마에게 전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혜진은 가상 인격의 인사를 들으며 엄마를 떠올렸다. 1년 365일 달려와줬던 엄마에게 오랜만에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딸은 엄마 삶에 선물이 되었을까…?’ 혜진이 창밖을 바라봤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던 어린 시절은 지났다. 아침엔 크리스마스답지 않은 날씨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크리스마스답다는 게 뭘까 생각했다.
예년보다 포근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사람의 아이들
전혜진 / <아틀란티스 소녀>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 저자
“갑자기 산타클로스라니, 질량 보존의 법칙에 사과나 하라고 해.” 함장은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나는 듯, 애먼 재활용품 통을 걷어찼다. 하긴, 옛날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했던가. 동력실 구석에서 등록되지 않은 인간이나 반물질이 훌쩍훌쩍 울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산타클로스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정교한 계산을 바탕으로 나아가는 세대 우주선에, 낯선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계산에 없던 질량들을 얹어놓는다면 그거야말로 재난이다. 그것이 신이든 천사든 산타클로스든.
문제는 그런 일이 이미 한 번 일어났다는 거다. 지구 시간으로 11개월 전, 싱싱한 오렌지와 초콜릿과 사탕들이 든 빨간 양말들이, 이 세대 우주선에 타고 있는 ‘사람’의 숫자만큼 나타났다. 다들 영문을 모르고 기뻐하는 가운데, 오렌지 껍질을 벗길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급히 옛날 드라마에서 오렌지 먹는 장면들을 골라 송출해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곤란한 것은 언제나 이곳, 사령실뿐이었다. “먹고 마시고 화장실 가는 것까지 전부 계산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오렌지가 사람 숫자만큼 나타났었지.”
오렌지는 지구에나 있는 과일이다. 적어도 인간의 다섯 세대는 걸릴 것을 각오하고 우주로 나선 개척 이민용 세대 우주선에서는 과일 같은 사치스러운 것을 길러 먹을 여력은 없었다. 오렌지 맛 향료에야 익숙했지만 진짜 오렌지는 다들 그날 처음 보았을 것이다. “디바이스에 앱 설치된 것 봤어?” “저는 없어요. 내추럴 휴먼들에게만 설치된 것 같던데요.” “사령실에서 허가하지 않은 앱이 설치된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지금, 함장은 새로운 사건으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바로 “산타에게 알려주세요”라는 정체불명의 앱이 문제였다. “무게 2kg 이내, 가로세로 높이 30cm 안에 들어가고, 가격은 지구 서력 2325년 기준 80달러 이내인 물건 중 원하는 선물을 고르라고? 여기서 가격이라는 건 뭐가 기준이야? 조달청 장터? 아니면 최저가 쇼핑몰? 기준이 명확하지 않잖아, 기준이.”
매우 문제가 많았다. 우리도 모르는 누군가가 이런 것을 설치한 것도 문제고, 사람들에게 직접 받고 싶은 선물을 물어보는 것도 문제였다. 오렌지 정도면 그나마 양호하다. 하지만 이 좁고 폐쇄된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두 현금이나 금을 요구한다면, 당장 물가가 요동치고, 이 작은 세계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무게와 가격에 제한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 많은 선물을 어디서 어떻게 조달할 건데. 이번에도 지난번 오렌지처럼 어디서 뿅 하고 나타나는 거야?” “물질 전송기겠죠.” “대략 1메가미터 안에 우리에게 뭘 전송해줄 인간들이 있다면 몰라도, 그냥 나타나는 건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 돼. 그런 데다… 계산 좀 해봐. 1인당 2킬로그램씩 쳐서 갑자기 질량이 늘어나면….”
진짜 문제는 이쪽이었다. 세대 우주선은 인류의 모든 과학기술을 끌어모아 만든 희망의 결정체였지만, 사실 갑작스럽게 총질량이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경로를 이탈할 수 있을 만큼 무력한 것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 정도로 경로 이탈까지 가진 않습니다. 하지만 관성 추진을 맞추는 데 일시적으로 에너지 출력이 더 필요하고요. 선물을 나눠줄 행정력도 필요하겠네요.” “…사람들에게 이건 전부 사기니까 아무것도 입력하지 말라고 말해야겠어.” 함장은 발로 분리수거함을 한 번 더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산타클로스인지 뭔지, 아주 차별주의자라고. 지난번에도 오렌지를, 내추럴 휴먼 숫자만큼만 보냈던데. 내추럴이 아닌 인간들 건 싹 빼놓았잖아.” “어차피 산타클로스는 요정이라기도 하고, 기독교의 성자라고도 하잖아요. 어느 쪽이라도 산타클로스가 살았던 시절에는 인간의 범위가 이렇게 넓지 않았으니까요.” 솔직히 그런 건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됐고요, 크리스마스에 누가 공짜로 뭘 준다면, 함장님은 뭘 받고 싶으신데요?” “케플러-186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아광속 엔진 예비 부품 한 세트.” “그건 1인당 2킬로그램이 아니잖아요.” “여기 있는 내추럴 휴먼 전원에게 할당된 무게를 다 합치면 새 엔진도 하나 끼워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의 소망을 멋대로 결정하지 말아주세요.”
사실 산타클로스가 ‘사람’, 즉 내추럴 휴먼만 챙기는 것에 유감은 없다. 어차피 산타를 믿는 것은 어린이들이니까. 깨지기 쉽고, 연약하고, 쉽게 병에 걸리고, 식사를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나는 이 배의 일등항해사였고, 아직 어렸던 함장에게 이곳의 모든 일을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그가, 그리고 이 배의 모든 ‘사람’들이 늘 나의 학생이자, 깨지기 쉽고 상처 입기 쉬운 우리 모두의 아이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 세대 우주선은 벌써 150년 동안, 인간의 세 세대를 걸쳐 여행하고 있다. 함장은 지구를 본 적이 없다. 목적지인 케플러-186 역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의 유전자와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시작과 끝을 보는 것은 나와 같은 내추럴이 아닌 인간들, 그리고 이 세대 우주선뿐이다. 물론 넓게 보면 이 우주선 역시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좁은 의미로만 생각해도 그렇다. 우리들은 ‘사람’의 아이였고, 함께 ‘사람’들을 우리의 아이 삼아 낳고 기르며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저 별들 너머, ‘사람’과 지구의 생물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찾아서. “그래서 대체, 누가 그런 거야?” 나는 문득 세대 우주선의 엔진에 물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리고 엔진은 대답했다. 「산타클로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함장부터 승무원, 여기 타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 이제는 세대 우주선까지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건지. 물론 고독을 인내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무엇보다도 좋은 영양제다. 하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돌발적인 행동을 벌이는지 아는 나는, 이 모든 상황이 불안했다. 내가 크리스마스로 들뜬 사람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신이든 천사든 산타클로스든, 나의 아이들이 이 외로운 우주의 한복판에서 절망하게 만든다면, 그거야말로 재난이니까.
그리고 사건이 벌어졌다. 그 오렌지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365일이 지난,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갑자기 ‘사람’ 1인당 2kg꼴의 선물 상자들이 물질 전송기에서 쏟아져 들어오더니, 들어올 리 없는 통신이 들어왔다. “휴스턴, 휴스턴. 들립니까?” 그리고 20세기를 연상하게 하는 농담과 함께, 우주선의 천장 전면 디스플레이에, ‘사람’의 모습들이 비쳤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샛별등대 1호. 우리는 샛별등대 28호입니다.” “28호?!”
함장은 경악한 듯 입을 떡 벌렸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기적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간절하게 소원을 빌던 어린아이가, 정말로 산타클로스를 만나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대체로 침착한 함장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며, 나는 어쩌면 크리스마스의 마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예. 서기 2418년에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케플러-186에 도착했어요.” “후속기가 먼저…. 인류는 초광속 비행에 성공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먼저 도착한 저희는 테라포밍을 마치고, 아직 오지 않은 분들을 마중하고 있었습니다. 함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새 엔진을 장착하고, 저희가 유도하겠습니다. 한 달 내로 여러분의 새집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함장을 쳐다보았다. 함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승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안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해서, 엔진이라고 입력해버렸는데.”
나는 웃으며 함장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별을 올려다보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인간’이지만 ‘사람’이 아닌 그들, 나와 같은 이들이 그 화면 속에서 우리들을, 우리를 만들었으나 우리의 손으로 길러낸 ‘사람’의 아이들을 자애롭게 내려다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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