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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멀리즘이라는 라이프스타일 철학

2023.02.12

by 조소현

    맥시멀리즘이라는 라이프스타일 철학

    맥시멀리즘은 인테리어가 아니다.당신 인생에 굴러 들어온 작은 파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철학에 가깝다.

    기자들의 연락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그들은 문화 관련 글을 청탁하기 위해 전화를 건다. 재미있게도 지난 몇 달간 나에게 가장 많이 온 전화는 대개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기자님은 맥시멀리스트시니까요.”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쩐지 나는 약간 겸연쩍곤 했다. 맥시멀리스트는 한 사람을 규정하는 단어다. 당신이 스스로를 맥시멀리스트로 일컬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확실히 맥시멀리스트일 것이다. 에스파가 둘이 될 순 없듯이 맥시멀리스트인 당신이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는 없다. 둘은 ‘소셜리스트(사회주의자)’와 ‘캐피털리스트(자본주의자)’만큼이나 다른 존재이다. 물론 세상에는 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자도 있고 사회주의적인 자본주의자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명확하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야 말 것이다.인간은 원래 그렇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걸 싫어하면서도 규정 속에 머문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일단은 나를 맥시멀리스트로 정의 내리고 이 글을 계속 써 내려가야겠다.

    내가 맥시멀리스트가 된 건 수십 년에 걸친 경험의 산물이다. 어머니는 맥시멀리스트였다.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인은 대체로 미니멀리스트보다 맥시멀리스트에 가까웠다. 그 시절의 집은 부동산이 아니라 평생 머물고 싶은 ‘집’에 가까운 존재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꾸민 집은 온갖 물건으로 넘쳐났다. 벽에는 유행하던 고양이 입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소파와 카펫의 패턴은 1980년대적으로 화려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을 진열장에 빽빽하게 장식했다. 내가 가장 좋아한 물건은 건조한 산호와 상아로 만든 코끼리 오브제였다. 산호와 상아 거래가 금지된 지금은 너무나도 정치적으로 불공정한 나머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품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물건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맥시멀리스트로서의 삶을 버렸다. 1980년대 말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당시로서는 최신식 아파트였다. 어머니는 내 유년기를 둘러싸고 있던 물건을 모조리 버렸다. 상아도 버렸다. 산호도 버렸다. 소파도 버렸다. 카펫도 버렸다. 고양이 입체 그림도 버렸다. 나는 몹시 못마땅했지만 새집으로 이사를 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의 삶은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면서 헌 집에 있던 오래된 물건을 모조리 정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이사는 곧 대청소다.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이벤트다.

    부산의 새 아파트는 1980년대의 흔적이 지워진 1990년 그 자체였다. 체리색 몰딩은 없었다. 기하학무늬의 벽지도 없었다. 모든 것은 하얀색이거나 베이지색이었다. 나는 1990년대 아파트의 베이지색 인테리어를 ‘리바트 인테리어’라고 불렀다. 당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던 가구 브랜드는 리바트였다. 그들은 베이지색 가구를 시대정신처럼 생산했다. 내 방도 베이지색 리바트 가구로 채워졌다. 거실에는 거의 모든 중산층 가정의 거실에 당연하다는 듯 놓여 있던 옅은 회색의 가죽 소파가 들어왔다. 전셋집이 아니었는데도 엄마는 벽에 못을 박지 못하게 했다. “깨끗하게 살아야지.” 엄마는 하얀 벽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반항을 선택했다. 내 방의 벽을 모조리 영화 포스터로 가득 채웠다. 엄마는 방에 들어올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는 것이 흡족했다. 엄마는 맥시멀리스트의 과거를 정리했지만 맥시멀리스트의 DNA는 정리되지 못한 채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와 함께 나에게 유전된 것이다.

    내가 맥시멀리스트로서의 진정한 자질을 발견하기 시작한 건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몇 년을 살면서 부터다. 나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데보라와 친해졌다. 50대의 데보라는 브리스틀이라는 도시의 가장 멋진 언덕에 있는 5층짜리 빅토리아풍 집에 살았다. 그는 전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딸과 50대의 나이에도 클럽 디제이로 활동하던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 아들과 함께 살았다. 한 번도 한국에서는 겪어본 적 없는 가히 할리우드 영화적으로 대안적인 가족이었다. 나는 데보라의 집을 사랑했다. 층고가 3m가 넘는 거실에는 온갖 물건이 쌓여 있었다. 방글라데시 이민자 출신인 데보라는 고향에 갈 때마다 이런저런 물건을 가져왔다. 그렇게 수십 년간 버리지 않고 모은 물건은 거실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런 물건은 그 자체로 너무나 데보라 가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집에 옮겨놓는다면 절대로 같은 빛을 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맥시멀리즘 인테리어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데보라의 집이야말로 완벽한 맥시멀리스트의 집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나는 물건을 모으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베이지색 아파트를 탈출 하자마자 나는 데보라의 집을 꿈꿨다. 좋아하는 물건으로 집을 가득 채우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오늘부터 맥시멀리스트가 되겠어!’라고 결심한다고 당신이 맥시멀리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나의 서울 집은 맥시멀리스트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나에게는 엄마도 말리지 못한 수집광적 취미가 있었다. 외국에 가면 벼룩시장을 가장 먼저 찾았다. 내가 구입한 가장 기이한 물건은 파리의 방브 벼룩시장에서 산 100년 된 아기 천사 흉상일 것이다. 천사의 얼굴은 5월 파리의 햇살 아래서 영롱하게 빛이 났다. 아름다웠다. 가져야만 했다. 2주일 뒤 서울에 도착해 수트케이스를 여는 순간 금방이라도 입을 열고 주문을 읊을 것 같은 흉상이 튀어나왔다.  그 흉상은 5월의 파리에나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나는 흉상을 다시 수트케이스에 넣고 밀봉했다. 1,000유로짜리 실패였다. 흉상을 다시 꺼낸 건 아파트로 이사한 직후였다. 그즈음 나는 이미 훌륭한 맥시멀리스트로서의 자격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홍콩에서 산 모택동 동상. 프랑스 니스에서 구입한 개코원숭이 도자기. 오랫동안 수집한 온갖 빈티지 그릇. 뉴욕에서 구입한 핑크색 사슴 머리 촛대(그렇다. 세상에는 그런 물건이 존재한다). 한국 배송을 강요하다시피 해서 받아낸 거대한 브론토사우루스 조각. 좋아하는 신인 작가들의 전시회에 가서 구입한 그림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만약 내 집에 있는 물건을 모두 거론한다면 그 리스트만으로도 이 지면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목적으로 구입한 물건은 아니었다. ‘이것들을 차곡차곡 모은 뒤 1960년대 덴마크산 미드 센추리 사이드 보드에 올려놓으면 완벽한 맥시멀리스트의 집을 완성할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그때의 나는 덴마크식 사이드보드를 국제 배송으로 구입할 만한 돈도 없었다). 그 물건은 벼룩시장이나 이베이에서 보자마자 어쩔 도리 없이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고민 없이 사들인 집착적 쇼핑의 결과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40대가 됐다. 물건을 모조리 꺼내놓을 만한 크기의 공간을 얻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 그제야 깨달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아보이지 않던 물건은 사이드보드에 늘어놓기만 해도 근사하게 서로 어울렸다. 오랫동안 봉인했던 아기 천사 흉상마저 조화로웠다. 나라는 사람이 수십 년간 키워온 일관적인 취향이 수집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건은 나의 역사였다. 유치한 것도 나였다. 어색한 것도 나였다. 괴상한 것도 나였다.

    나는 인스타그램으로 종종 “집 사진 잘 보고 있어요. 저도 맥시멀리즘이 좋은데 어떻게 하면 인테리어를 그렇게 꾸밀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므로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좋아하는 물건을 차근 차근모으세요. 그러면 저처럼 친구들이 ‘애오개 박수무당집’이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인테리어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진짜 정답은 아니다. 다정한 답변일 따름이다. 사실 말로는 간단하다. 미니멀리즘은 비우면 된다. 맥시멀리즘은 채우면 된다. 단어로만 따지자면 그렇게 명확할 수가 없다. 그런데 공간을 빼곡히 채우기만 하면 진정한 맥시멀리스트의 집이 완성되는 걸까?

    어쩌면 당신은 한 달 만에 근사한 맥시멀리스트 인테리어를 완성할 수도 있다. 루밍에서 구입한 러그와 이노메 싸에서 구입한 북유럽 원숭이 소품과 사무엘 스몰즈에서 찾은 오렌지색 의자처럼 잘 알려진 인테리어 숍에서 파는 물건만으로도 금세 인스타 맥시멀리스트 맛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곧 다른 인스타그램 인테리어 맛집에서 당신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물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근사한 물건에는 ‘당신’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 것이다.

    당신이 진정한 맥시멀리스트의 집을 갖고 싶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하나다. 시간이다. 다음 달 계약할 마포의 오피스텔을 꾸미기 위해 한국의 숍에서 일단 구할수 있는 미드 센추리 가구와 소품을 한 번에 주문하는 과감한 짓은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된다. 맥시멀리즘은 당신 고유의 취향과 충분한 시간이 함께 완성하는 것이다. 맥시멀리스트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국 벼룩시장에서, 당근마켓에서, 이베이에서, 엣시(Etsy)에서 천천히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찾아내고 수집하는 끈질김이 필요하다. 잡지에는 등장하지 않는 빈티지를 찾으며 몇 년을 지내다보면 당신 주변은 어느새 함께 사는 엄마가 버리라고 난리를 치는 전 세계의 잡동사니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은 그 잡동사니가 더없이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텐데,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인테리어의 신이 당신에게 맥시멀리스트 칭호를 하사하는 기념비적 출발점이다.

    만약 당신이 맥시멀리스트 인테리어 따위를 완성하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을 감내할 자신은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고 강요하는 강박적 정리 요정 ‘곤도 마리에’를 소개해줄 생각이다. 그 앞에서도 “못 버려. 모든 것이 설레는데 어떻게 버려. 그치?”라고 말한다면 그건 당신이 미니멀리스트의 삶으로 다시는 복귀할 수 없는 맥시멀한 존재가 됐다는 증거다. 맥시멀리즘은 인테리어가 아니다. 당신 인생에 굴러 들어온 작은 파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철학에 가깝다. 그리고 그 철학을 감당하며 살기 위해서는 까탈스럽게 매일 반복해야 하는 강박적 먼지 청소가 필요하다. 게으른 사람은 맥시멀리스트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이 글의 가장 실용적인 정보일지도 모르겠다. (VK)

    에디터
    조소현
    글과 사진
    김도훈(작가, 영화 평론가, 칼럼니스트,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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