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 디올, 박물관은 살아 있다
설립 75주년을 기념하며 흥미로운 박물관을 개관한 크리스챤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를 비롯해 많은 이가 설립자의 영속적 영향력을 고찰했다.
소이직 파프(Soizic Pfaff)가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크리스챤 디올의 파리 박물관 갤러리 디올(La Galerie Dior)에 처음 들어섰을 때, ‘너무나 대단해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고 한다. 파프는 1974년 라이선싱 부서 직원으로 디올 하우스에 처음 합류했고 거의 반세기 만에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디올 헤리티지 디렉터가 되었다. “구성 면에서 굉장히 뛰어나더군요.”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갤러리에 설치된 카페의 코너 부스에 앉아 말했다. “무슈 디올은 분명히 이런 것을 원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 여전히 북받쳐 오르죠.”
지난봄 대중에게 공개된 이 갤러리는 디올의 오리지널 부티크나 공방과 같은 주소, 즉 ‘파리 8구 몽테뉴가 30번지(30 Avenue Montaigne in the 8th Arrondissement)’를 사용한다. 또한 올해 75주년을 기념하는 이 패션 하우스의 기념비적 목적지다. 이 정도의 장수는 어떤 브랜드에도 주목할 만한 성과다. 하지만 디올에는 특히 더 그렇다. 브랜드 창립자 크리스챤 디올이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한 후 10년 만에 작고했기 때문이다.
“1947년 첫 번째 디올 컬렉션이 깊은 인상을 남겼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말했다. 키우리에 따르면 이 꾸뛰르 컬렉션의 오리지널 디자인은 잘나가던 패션 산업을 피폐하게 만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 패션이 ‘적절한 중심을 되찾도록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하퍼스 바자> 편집장이었던 카멜 스노우(Carmel Snow)가 ‘뉴 룩’이라 칭한 것으로 유명한 이 의상은 풍성한 스커트, 조인 허리 실루엣,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선을 특징으로 한다. 전시에 적합하게 옷차림이 더 실용적으로 바뀐 것이다.
75년 후 디올 여성복과 꾸뛰르 컬렉션의 첫 여성 수장 키우리,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킴 존스, 파인 주얼리를 이끄는 빅투아르 드 카스텔란을 통해 크리스챤 디올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럭셔리 브랜드의 하나로 명맥을 이어간다. 키우리와 파프는 이 성공의 상당 부분이 브랜드 헤리티지에 몰입한 덕분이라고 평했다. 디올의 회장이며 CEO인 피에트로 베카리(Pietro Beccari)가 갤러리 디올의 개관과 인접한 플래그십 부티크의 리뉴얼을 통해 그것을 재확인시켰다.
1905년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란 크리스챤 디올은 비료 사업으로 성공한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다”고 오랜 시간 문화 프로젝트 관리자이자 전시 큐레이터로 활약한 엘렌 스타르크만(Hélène Starkman)이 전했다. 부모는 정치학에 매진할 것을 강요했지만 그는 끝내 그 공부를 마무리 짓지 않았다. 디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디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트 갤러리 개관 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작품을 수준 미달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디올은 1931년 자신의 아트 갤러리를 울며 겨자 먹기로 닫아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고, 로베르 피게(Robert Piguet) 밑에서 보조로 일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는 디자이너 보조로 복귀해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 밑에서 일했다. 직물 제조업자였던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이 필리프&가스통(Philippe et Gaston) 브랜드의 부활을 위해 1946년 디올에게 접근했다. 디올은 딴생각을 품고 있었다. 스타르크만에 따르면 그가 부삭에게 “전쟁 전에 시작한 패션 하우스를 다시 열고 싶겠지만, 이제 그것은 그다지 의미 없는 것 같습니다. 1946년입니다. 전쟁이 끝났어요. 전후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두 사람은 몽테뉴가 30번지에 크리스챤 디올 사무실과 공방을 열었다. 1947년 2월 12일 디올은 그곳에서 자신의 첫 번째 컬렉션인 ‘모래시계 모양 실루엣의 크림 재킷과 플리츠 A라인 스커트를 비롯한 룩 95점’을 언론과 일부 상류사회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성공이 뒤따랐고, 그는 1953년까지 해외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하고 할리우드 영화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뉴욕과 카라카스에 부티크를 열었다.
“어떤 면에서 크리스챤 디올은 ‘크리스챤 디올’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스타르크만이 말했다. “그는 오로지 특정 고객을 위한 작품만 만들고 싶어 했죠. 최고 부유층과 가장 세련된 사람들 말입니다.” 그녀가 덧붙이면서, 고급 패브릭으로 맞춤 제작했기 때문에 그의 의상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누구나 아는 이름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디올은 1957년 52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기업과 그의 후임자들이 번창할 수 있도록 확고한 정체성을 남겼다. 이브 생 로랑, 마르크 보앙,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와 라프 시몬스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2016년부터 키우리가 그 자리를 맡아 잘 이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집중했고, 사업 지향적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스타르크만이 고인이 된 그 디자이너에 대해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75년 후 디올이라는 패션 하우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겠죠.”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1984년 디올을 인수할 무렵, 브랜드는 사업 영역을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코스메틱 라인까지 다각화한 상태였다. 아르노 회장이 처음 단행한 큰 모험 중 하나는 이 패션 하우스의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87년 파리 장식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한 것이다. 전시용 의상과 기록을 찾기 위해 소규모 팀을 꾸렸다. 아카이브 부서를 설치했고, 1996년 파프가 그 부서를 맡았다. “제가 갈리아노보다 3주 빨리 합류했죠.” 그녀가 말했다. “그에게 많이 배웠어요. 둘이 서로 배우면서 일한 거죠.”
파프와 그녀의 팀은 기록물로 가치를 지닌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다양한 곳을 찾아다녔다. 주로 경매나 박물관에서 많은 작품을 찾아내고 매입했다. 1949~1950년 디올 컬렉션의 주넌(Junon) 드레스 같은 몇몇 작품은 클라이언트에 대한 디자이너의 방대한 기록을 참조해 일일이 연락한 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드레스는 플로리다의 미시즈 뉴먼(Mrs. Newman)이라는 여성(그녀의 가족)에게 되사왔어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그녀 대신에 남편이 그녀가 디올에서 구매한 모든 의상과 액세서리를 경매에 부쳤습니다. 당연히 전부 사들였죠.”
“이 갤러리를 계획한 것은 정말 미친 짓이었습니다.” 베카리가 2018년 구상한 갤러리 디올에 대해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목표는 “파리에서 디올이라는 브랜드를 위해 정말 독특한, 즉 흉내 낼 수 없는 뭔가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디올이 몽테뉴가 30번지에 자리한 플래그십 부티크, 사무실, 공방의 문을 2년 이상 닫아야 했던 이 프로젝트를 보고하기 위해 “아르노 회장을 찾아갈 때 정말 큰 용기를 내야 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협업해온 피터 마리노에게 건축을 맡겼고, 다양한 공간 분위기 연출은 과거 여러 차례 디올 전시를 맡은 나탈리 크리니에르(Nathalie Crinière)에게 일임했다. “디올의 이야기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워요.” 크리니에르가 전한 바에 따르면 그녀의 동료들 모두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에 박물관을 지어야 한다는 데 동감했다고 한다.
전시 공간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위로 솟은 나선형 계단이다. 그리고 그 뒤에 설치된 3층 높이의 진열장에는 3D 프린터로 제작한 1,800점 이상의 미니어처 작품을 무지갯빛으로 진열했다. “지루할 틈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도록 하기 위한 아이디어였죠.” 크리니에르가 설명했다. “이 거대한 콜로라마(Colorama)를 보고 놀란 사람들은 특별한 뭔가에 점차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리지널 스케치, 초창기 언론 기사, 디올이 컬렉션 구상에 사용한 패브릭 견본 차트 등을 통해 디올 하우스의 태생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과거와 현재가 여러 공간에서 뒤얽혔다. 여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디자인한 플로럴 모티브 드레스로 채운 공간 두 곳은 꽃을 향한 디올의 사랑을 찬양한다. 모델들이 쇼를 준비하는 수선실을 방불케 하는 백스테이지 재현 공간은 유리 바닥을 통해 훤히 들여다보인다. 피카소, 만 레이, 달리의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스트 시절의 디올과 미스 디올 향수를 기리는 공간도 마련했다. 한 곳에서는 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영상이 연속 재생되고, 또 다른 곳에는 하우스의 가장 유명한 의상 몇 벌만 드러나게 놓여 있다. 프랑스 영화 <올 파이어드 업(Tout Feu, Tout Flamme)>에서 로렌 허튼이 입은 마르크 보앙 디자인의 골드 라메 드레스와 찰스 왕세자와 이혼 직후 스캔들에 대한 장난스러운 찬성의 뜻으로 1996년 멧 갈라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입은 존 갈리아노 디자인의 네이비 슬립 드레스 등을 전시했다. 디올의 재치 있는 임기응변을 보여주기 위해 꾸민 공간에서는 공방의 다양한 부서에서 파견된 두 사람이 자신의 기술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20대 견습생과 디올에서 40년간 활약해온 60대 장인이 함께 작업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볼 수 있습니다.” 스타르크만이 말했다. “갤러리 디올은 매일 1,000명 정도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어요. 박물관을 거닐다 보면 다양한 언어를 듣게 됩니다. 패셔니스타와 패션 전공 학생을 비롯해 패션 전시관에서 볼 법한 사람들을 보게 되겠죠. 하지만 그보다 더 다양한 관람객이 그곳을 찾고 있어요.”
갤러리 디올을 건축하는 동안 인근에 자리한 플래그십 스토어도 개조하면서 파티스리와 무슈 디올 레스토랑(Le Restaurant Monsieur Dior) 같은 음식점 두 곳, 정원 세 곳, 오뜨 꾸뛰르 전용 살롱과 이자 겐츠켄(Isa Genzken)의 조각 ‘높이 솟은 장미’ 등 눈에 띄는 다양한 요소를 설치했다. “우리 부티크 앞에 사람들이 매일 줄 서 있습니다.” 스타르크만이 말했다. “들어와서 뭔가를 꼭 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둘러보기도 하죠.” 베카리는 그것을 ‘안티 메타버스(Anti-metaverse)’에 비유했다. “여기에 와서 이런 정서를 느껴야 합니다.” 지난봄 부티크를 방문할 때 분명해졌다. 바깥에는 디올이 새겨진 파티션 뒤로 이 브랜드의 열광적인 팬들과 호기심 넘치는 관광객이 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실내에서는 여성들이 구두와 가방을 주문 제작하는 전용 공간에서 실 색을 자세히 살펴보고, 위층에서는 셰프 장 앵베르(Jean Imbert)가 구현한 디올이 좋아하는 레시피의 음식을 맛보았다. 모든 사람이 곳곳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섬세하게 정원으로 조경한 루프, 크림과 시나몬 가루로 만든 디올 로고 라테 아트를 올린 카푸치노, 수없이 많은 셀카를 렌즈에 담고 있었다.
“며칠 전 직원들에게 사람들이 이곳을 나서면서 ‘디올’에 대한 강한 인상을 문신처럼 새겼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베카리가 박물관과 부티크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디올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할 뿐 아니라 잊지 않는다는 뜻이죠. 기억에 남는 것은 옷일 수도 있고, 갤러리나 근사한 식사를 한 레스토랑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그들은 디올을 떠올리는 뭔가를 간직하게 되는 겁니다.”
2016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와줄 것을 제안했을 때, 키우리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는 펜디를 거쳐 피엘파올로 피촐리와 함께 발렌티노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갈피를 못 잡겠더라고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피해서도 안 되는 도전 과제라는 걸 깨달았죠.” 이 로마 출신 디자이너는 우아함과 매혹뿐 아니라 실용성까지 요구하는 여성에게 적합한 디자인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접근법은 디올 하우스의 여성적인 스타일을 풀 스커트, 코르셋 보디스, 자수 튤 드레스로 유지하면서도 더 많은 티셔츠와 데님, 스니커즈를 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키우리와 존스 모두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 같은 예술가와 협업한다. 그리고 매년 디올의 수익 증대를 돕는 재출시 제품 가운데 이 두 사람이 보앙의 사선 프린트와 갈리아노의 새들백을 재해석한 작품도 있었다. <보그 비즈니스>는 디올 하우스의 지난해 매출액을 2019년 46억 달러보다 훨씬 더 늘어난 70억 달러에 이를 거라고 추정한다.
“여성을 위한 패션 아이디어와 페미니즘에 대한 요구를 아우를 수 있는 현대 여성성을 성공적으로 구체화한 점이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키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디올의 소통 능력 덕분에 여성에게 헌신하는 아티스트, 활동가와 이론가에게 도움을 준 점도 자랑스러워요. 여러 곳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니 잘해왔구나 싶습니다. 물론 그런 것으로 자만하지는 않아요.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하지만 그것은 계속 전진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죠.”
마찬가지로 베카리도 “제품 판매가 아니라 제품을 통해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몽테뉴가 30번지에서 진행된 리노베이션 같은 프로젝트가 그 비전의 핵심이다. 가장 안전한 베팅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사업에 어느 정도의 혼돈을 가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은 성공에 이르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도발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키우리는 패션과 시간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75년 동안 명품 패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디올의 위업이 키우리의 지휘 아래서도 잘 이어지고 있다. “브랜드가 견고해야 비전에 진정성을 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가 시간의 시련을 견뎌내는 거죠.” 그녀가 말했다. “마법을 만들어내는 모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장인의 감수성을 통해 동시대를 이해하는 법을 알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디올은 패션이 지닌 소통의 힘과 문화적 힘을 보여주는 탁월한 표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죠. ‘현시대’와 대화하는 법을 꿰뚫고 있습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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