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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던 그와 그녀들

2023.12.25

by 황혜원

    내가 사랑하던 그와 그녀들

    누구나 마음에 품었던 배우 한둘은 존재한다. 조숙하던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든 10대 한창 무렵이든, 회사에 매일 지기만 하던 때나 무료하던 30대 어느 날이나, 마음속에 박혀 꼼짝 않는 이들과의 추억을 모았다. 이나영부터 탕웨이까지.

    사랑하다 죽어도 돼요
    <네 멋대로 해라> 이나영

    MBC ‘네 멋대로 해라’
    MBC ‘네 멋대로 해라’
    MBC ‘네 멋대로 해라’
    MBC ‘네 멋대로 해라’

    사랑스러워서 사랑받는 수많은 여자 주인공이 있다. 이건 한국의 TV 드라마가 가진 유구한 공식이다. 그런데 이 공식을 넘어선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가 2002년에 방영된 <네 멋대로 해라>였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전경은 오로지 자기 마음속의 사랑만 가지고 진격하는 여성이다(물론 외모가 이나영이니 사랑스러운 건 맞다). 만남의 시작은 소매치기 전과자 복수에 의한 것이었지만, 전경은 관계의 시작을 이끌고 간다. “내가… 좋아해도 되나요?” 경찰의 손가락을 자른 복수의 어두운 과거마저도 전경은 기꺼이 끌어안는다. “그 험한 기억이 복수 씨가 살아왔던 현실이라면, 난 그것도 좋아할래요. 난 누가 뭐라든 계속 복수 씨 손잡고 있을래요. 난 복수 씨 손이 좋아요.” 전경이 복수에게 하는 사랑의 말은 복수가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원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는 말이었다. ‘나는 가진 게 없는 전과자인데, 그녀를 사랑해도 될까?’ 싶은 순간, 전경은 먼저 좋아해도 되냐고 말한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킨 순간, 전경은 먼저 그의 손을 잡는다. 심지어 죽음을 앞두었을 때도 전경은 먼저 자신을 사랑하다가 죽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여자다. “내가 애인인 동안에 애인으로 살고, 내가 보호자인 동안에는 보호자로 살래요. 지금 사는 것처럼, 지금을 살아요.” 복수의 심정에 이입하던 당시 스물네 살의 복학생이던 나는 그렇게 먼저 날아오는 전경의 한 방에 눈물이 났다. 남자는 이기적이고 또 이기적인 주제에, 매우 소심한 동물이라 먼저 이기적이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경을 사랑한 이유가 이런 것이었다고 하니, 대부분의 여자들은 전경이 복수로부터 진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럴 거다. 복수 같은 남자만이 전경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복수가 전경이 지닌 상처를 보듬은 덕분에 그녀의 멘탈이 그토록 강해진 것이다. “마음이 튼튼해졌어요.” 전경은 그처럼 사랑스럽게 튼튼한 여자였다. 강병진(대중문화 저널리스트)

    50번을 봐도 사랑스럽다
    <첫 키스만 50번째> 드류 베리모어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스틸 컷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스틸 컷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스틸 컷

    “이름은 들어봤어요.” 20대 후배가 드류 베리모어를 그렇게 얘기했을 때 충격받았다. 우리 드류가 벌써 그리 됐나. 젠데이아 이전에 드류가 있었단 말이다. 소피 마르소가 책받침 여신이던 시절을 지나, 2000년대 초반 드류는 싸이월드 여신이었다. 내가 활동한 싸이월드 클럽은 음악, 영화, 패션을 다뤘는데, 소모임 주제 중 하나가 드류 베리모어였다. 드류가 드라이브하며 웃는 사진은 오래 간직했다. E.T.를 보고 소리 지르던 귀여운 아역 배우가 마약과 방황을 딛고 사탕 같은 미소로 복귀했다는 스토리까지 좋았다. 그중 드류가 가장 빛난 작품은 <첫 키스만 50번째>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루시(드류 베리모어)는 매일 아침이면 모든 기억이 사고 당일로 돌아간다. 나처럼 그녀에게 반한 헨리(아담 샌들러)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이뤄간다는 내용. 영화의 배경 하와이만큼이나 빛나는 드류의 금발 머리, 발그레한 볼, 안정된 로맨틱 코미디 연기까지. 이 영화는 50번을 봐도 사랑스럽다. 혹시 이때부터였던가, 내게 하와이가 로맨틱 아일랜드가 된 것이? 무해한 사탕 같은 그녀를 더 보고 싶다면 <웨딩 싱어>(1998), <스물다섯 살의 키스>(2000),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2007)도 추천한다. 김나랑(<보그> 피처 디렉터)

    세상에 없는 영화를 보았다
    노래하는 지창욱

    방금 이별한 남자가 있다. 그는 다정하지만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서툰 사람이다. 누구는 그를 안전하고 믿음직한 남자라 생각하고 누구는 그를 지루하고 소심한 사람이라 평한다. 기실 그는 인생이 던져주는 크고 작은 실망을 묵묵히 삼키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영화는 그가 이별한 이유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대신에 영화는 그의 루틴을 집요하게 좇는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밥을 차려 먹고 출퇴근을 하고 청소를 하고 이따금 가족에게 전화를 걸고 공과금을 납부한다. 그런데 그 안에서 약간씩 변화가 일어난다. 첫날엔 밤잠을 설치고 이튿날엔 면도를 하다 얼굴을 베이고 다음 날엔 청소를 하다 발견한 뜻밖의 사물에 오래 시선을 둔다. 그리고 주말. 그는 빨래를 한다. 하필 흐린 날이다. 그는 아마도 연인의 흔적이 남았을 이불과 최근에 물 얼룩이 생긴 베갯잇 따위를 세탁기에 넣는다. 베란다의 간이 의자에 앉아 세탁기의 동그란 창으로 거품이 차오르는 걸 지켜본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빨래는 잘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비를 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그가 우는지 웃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렇게 영화가 끝난다.

    KBS 레전드 케이팝
    KBS 레전드 케이팝
    KBS 레전드 케이팝

    이 영화는 만들어진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그걸 보았다. 지창욱이 TV 음악 프로그램에 나와서 ‘빨래’라는 노래를 부를 때였다. 배우 지창욱의 작품 취향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그의 인터뷰를 본 적도 없다. 실제 언변이 우아한지 경박한지, 어느 미래에 추문을 일으켜 이 칼럼을 후회하게 만들 남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보그 코리아>에는 티모시 샬라메 얘기나 하는 게 안전할 거다. 하지만 이번 세기 내가 목격한 가장 아름답고 설레는 장면이 그 무대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영화와 드라마는 서사로 서정을 표현한다. 노래는 서정으로 서사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3분짜리 노래 하나가 2시간짜리 영화 한 편보다 큰 울림을 낳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의 서사는 각기 다르지만 서정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사랑의 서정을 잘 연기하는 가수가 드물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슬픈 사랑 노래에 비트와 기교를 얹어 끼를 부리는 참가자가 극찬받는 걸 보고 ‘세상이 단체로 미쳐돌아가나, 아니, 모두가 저런 무대에 동의한다면 미친 건 나일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 있다. 한 곡의 노래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지창욱의 무대를 보면서 그제야 나는 내가 미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 시대 영화, 드라마, 발라드에 결핍된 무언가가 그 안에 있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여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할 만큼 청순하지만 자기 감정을 사방에 발산하며 응석 부리는 대신 단정하게 절제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게 너무 매력적인 나머지 2시간 동안 그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아름다운 남자가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고 싶다는 이 가학적 욕망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고요한 영화에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그래서 이 영화는, 이 캐릭터는,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이숙명(칼럼니스트)

    플러팅의 정석
    <햇빛 속으로> 차태현

    MBC ‘햇빛 속으로’
    MBC ‘햇빛 속으로’
    MBC ‘햇빛 속으로’

    차태현을 보면, 여전히 김현주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던 앳된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다음 신이 키스 신이어서 더 생각이 나는 거다. 차태현이 울다가 키스하는 장면은 지금도 ‘모성애를 자극하는 법’ 1번에 써도 모자람이 없다. 수찬이 아빠는 여러모로 두근거렸다. 밀레니얼을 코앞에 둔 겨울이었다. 날은 추웠지만 새 시대에 대한 갈망으로 들뜨던 연말, 난 정말 열심히 뜀박질을 했다. 9시 50분 학원이 끝난 뒤 10시에 시작하는 드라마 <햇빛 속으로>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새어머니, 이복 여동생과 사는 재벌집 아들 인하(차태현)는 반항아였으나 가난한 여주인공 연희(김현주)에게 첫눈에 반하는 순정파였다. 자신감에 귀여움을 장착한 그는 능청스러웠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고, 츤데레의 매력으로 뭇 여성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고 사랑도 하지만 상대가 거부하면, 획 하고 돌아서버린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나타나 툴툴거리다가도 상대의 약한 마음을 알아챘을 때는 성큼 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런 사람. “넌 그게 문제야. 왜 그렇게 따져, 응? 설마하니 내가 너한테 얹혀살까 봐 그래? 참 나~ 아이 그리고 또 얹혀살면 어때? 엉?“ “나 바쁜 사람이야, 연희도 지켜줘야지, 우리 엄마 보살펴줘야지, 아우 나 너무 바빠.” “아우 왜 이렇게 춥니?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이리 와. 아이, 이리 와, 춥잖아. 아이구 따뜻해.” 난 능청스러운 그를 사랑했다. 연희에게 “너 국문과라며? 국어 잘하겠다”라고 하는 말에 몹쓸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의 길에 들어섰다(드라마 작가들은 여주인공을 페르소나로 삼아 자기 출신 학과를 얘기하는 못된 버릇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츤데레류를 사랑하는 잘못도 저지르게 된다. 사람은 자고로 자상하고 친절해야 하는 법이란 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차태현을 보면 자랑스러워진다. 그래도 연예인 보는 눈은 있다. 황혜원(<보그> 웹 에디터)

    꿈에서 만나요
    ‘Oh No, Oh Yes!’ 나카모리 아키나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 – ‘Oh No, Oh Yes!’, 1987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 – ‘Oh No, Oh Yes!’, 1987

    겨울은 정열적인 사랑을 위한 계절이 아니다. 애틋함, 그리움,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혼자 꼭꼭 숨겨놓았다가 참지 못하고 눈밭에 뛰쳐나가 ‘오겐키데스카’라도 외쳐줘야 속이 풀리는 절절한 마음을 위한 계절이다. 더 이상 이런 마음을 노래하지 않는 작금의 가요계를 보며 시대착오적인 정서인가 남몰래 씁쓸해지지만, 여전히 나는 상대방에 흠뻑 빠져 반쯤 정신 나간 연인의 모습에서 사랑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건 내게 1987년 도쿄 후생연금회관에서 열린 <Live in ’87 A HUNDRED days> 공연 실황 영상 중 ‘Oh No, Oh Yes!’를 부르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수이자 배우였던 그녀.

    나카모리 아키나, ‘Oh No, Oh Yes!’
    나카모리 아키나, ‘Oh No, Oh Yes!’

    “인적 없이 한적한 영화관이나/ 문을 닫고 있는 약국/ 이 거리를 건너면 바로/ 당신이 기다리는 호텔/ 하지만 망설이고 있어요/ 거리를 걷는 연인들은/ 어째서 행복해 보이는 거지?/ 사랑스러운 품에 무너져/ 너무 늦어버린 만남을 눈물로 채워가요.” 가사는 꽤 분명하게 유부남과의 불륜 관계를 암시한다. 자칫 클리셰적인 가사가 아키나의 팬들에게 더욱 와닿는 이유는 실제로 그가 가수 겸 아이돌 콘도 마사히코와의 불안정한 연애 관계로 큰 추락을 겪은 비련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키나는 가사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로 풀어내는 데 탁월했다. 몽환적인 신스 전주가 흘러나오면 마이크를 전화기처럼 귀에 댄 그가 보랏빛 조명 아래에서 오지 않는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린다. 기다림마저 달콤하다는 듯 꿈을 꾸는 표정으로 리듬을 타는 아키나. 그러나 전주가 끝나고 마침내 눈을 뜬 그의 표정은 사뭇 비통하고, 동시에 몹시 관능적이다. 머물 곳을 잃고 흐르는 눈빛, 수척해진 얼굴, 담담한 목소리… 오래되어 안개처럼 흐릿하게 열화된 화면 속 허우적대는 그의 모습에 고등학생 시절 지독한 첫사랑에 잠 못 이루던 구제 불능의 내가, 어느 겨울밤 빨개진 볼로 나의 퇴근을 기다리던 애인이, 누군가가 야속해 눈물짓던 나의 친구가 있다. 그때의 우리도, 1987년의 아키나도 몰랐을 거다. 열병에 몸부림치는 그 모습이 되레 어찌나 가슴 저리게 사랑스러운지. 김용식(콘텐츠 기획)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어
    <기묘한 이야기> 세이디 싱크

    Netflix ‘기묘한 이야기 3’ 스틸 컷
    Netflix ‘기묘한 이야기 3’ 스틸 컷
    Netflix ‘기묘한 이야기 3’ 스틸 컷

    주황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적 있다. 주근깨 있는 흰 피부와 타고난 곱슬머리 때문인지 가까운 한두 명의 지인으로부터 <기묘한 이야기>의 맥스(세이디 싱크)와 닮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심 만족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세이디 싱크의 내추럴한 매력과 애티튜드에 푹 빠진 상태였으니까. 세이디 싱크는 2017년 공개된 화제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 시즌 2에 처음 등장했다. 블랙 트랙 톱에 연청 데님, 초록색 반스 스니커즈로 마무리한 1980년대 스타일에 스케이트보드를 끼고 쿨하게 나타난 세이디는 잠깐의 등장만으로도 아이코닉했다. 이후 포르투갈 <보그>와 <로피시엘> 커버 스타로 등극하고, 샤넬과 프라다, 쇼파드의 부름을 받는 등 승승장구하는 걸 보며 나의 선구안이 내심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묘한 이야기> 제작진 역시 날로 높아지는 세이디의 인기를 의식하듯 맥스에게 더 늘어난 비중과 밀도 있는 서사를 선물했다. 그러다 2022년, 더욱 방대한 이야기로 돌아온 <기묘한 이야기> 시즌 4는 정말이지 맥스의, 맥스에 의한, 맥스를 위한 시리즈였다(만세!).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의붓오빠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 그 때문에 친구들을 멀리하는 데서 기인한 외로움 속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빌런 ‘베크나’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맥스는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를 용감한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시켰다. 애틋한 추억이 깃든 음악만이 심연에 빠진 이를 구원할 수 있기에,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Running Up That Hill’이 흘러나오자 희망을 붙잡기 위해 절규하며 내달리는 맥스의 모습은 시즌 4에서 모두가 손꼽는 명장면이었다. 삶의 애환과 홀로 그것을 감당하려는 의지, 그 속에서 더 투명하게 빛나는 소녀의 매력이 폭발한 순간. 끝내 죽음으로 치달은 맥스의 운명과는 달리 점점 더 찬란하게 빛나던 세이디의 존재감은 시즌 5가 공개되더라도 쉬이 놓기 어려울 것 같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말의 의무가 사라진 시대를 위한 꿈
    탕웨이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컷
    영화 ‘색, 계’ 스틸 컷
    영화 ‘색, 계’ 스틸 컷

    정직한 얼굴이 있다. 설렘, 기쁨, 분노, 공포와 같은 근원적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 나는 탕웨이를 보며 ‘정직함’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서래를 두고, “몸이 꼿꼿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박찬욱 감독이 탕웨이로부터 어떤 분위기를 캐치했고, 그것을 영화 대사에 반영했을 거라 멋대로 추측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색, 계>가 탕웨이의 영화 데뷔작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탕웨이가 연기한 왕치아즈가 가진 딜레마 때문이다. 결코 ‘정직함’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상대를 결국 사랑하게 되고, 조직의 운명까지 맡겨버리는 여자. 아마도 이안 감독이 1만 명의 오디션을 보며 찾은 얼굴은 자신의 마음을 숨길 도리 없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탕웨이의 얼굴에서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해보라. 마음의 소리가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 그런 황홀한 경험을 선사해주지 않을까? 로베르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노트>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들의 얼굴에 의도된 것은 전혀 없다. 우연적인 것 속에 있는 불변의 것, 영원한 것.” 임홍재(‘필름 팍투라’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네가 특별하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어’
    <블레이드 러너 2049> 아나 데 아르마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컷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컷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컷

    미숙함이 가능성으로, 철없음이 패기로 포장될 수 있었던 시기를 지나면 이 한 몸 내가 온전히 책임지는 것이 마땅해지는 순간을 씁쓸히 받아들이게 된다. 삶이 던져대는 수많은 기준에 차여서 나보다 앞서나가는 이들의 그늘 아래 한없이 작아지는 때. 그렇게 나에 대한 사랑이 조금은 부족하던 무렵,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만났다. 복제 인간을 사냥해야 하는 블레이드 러너, K 역의 라이언 고슬링도 인상 깊었지만 울적함에 절어 있던 사회 초년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K의 연인, 조이 역의 아나 데 아르마스였다. 조이는 육체가 없는 홀로그램 형태의 인공지능이다. 하루의 안부를 묻고 책을 읽어달라 어리광을 부리지만 결국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조이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K에게 “넌 특별해”라고 속삭이고, K의 여정에 동행하기 위해 망가지면 복구 불가한 단말기에 자신을 담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인간 마리에트의 몸을 빌려 K와 키스를 나눌 때는 또 어떠했는가. 먹먹하기까지 한 그녀의 사랑 앞에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럴 수 없을 것이란 자기반성까지 하게 만든다. 애틋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캐릭터를 아나 데 아르마스는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깊은 눈빛을 가진 이들에게 유독 취약한 나였으니 이 매력적인 눈의 배우에게 빠진 건 당연했을까? 이 세상에 나조차도 내 편이 아닐 때, “네가 특별하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어”라고 말해주는 조이가 있어 K가 조금 부러웠다. 아프더라도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인간도 아닌 주제에 자기희생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조이는 부족함이 약점이라고 여기던 사회 초년생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고. 가장 인간다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 이 뻔한 질문에 답을 내고 싶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조이를 만나보자. 물론 서툴더라도 ‘나’를 어여삐 여기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만. 김세진(‘이노션’ AE)

    #THE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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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네일 디자인
    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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