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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잠이나 자라?” 우리가 원하는 철학자의 조언

2024.02.05

by 김나랑

    “힘들면 잠이나 자라?” 우리가 원하는 철학자의 조언

    쇼펜하우어의 ‘팩폭’이 인기다. 인터넷에 밈처럼 떠도는 어록 “인생은 원래 고통이다” “힘들면 잠이나 더 자라”가 진짜인진 몰라도, 진심 뻗고 싶은 이들이 그의 책을 베스트셀러에 올렸다. 200년 전 철학자의 말에 새삼 쫑긋한 이유는 뭘까.

    새해 첫날부터 쇼츠만 2시간째 넘기고 있었다. 연초라고 다이어트나 서울대 추천 도서 100권 읽기 같은 계획은 더 이상 세우지 않지만, 이러고 있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카페에서 책이라도 보자며 일어났다. 원 마일 룩은 수면 바지에 패딩이지만 처진 몸을 뒤집고 싶어 막스마라 카멜 코트에 빨간 캐시미어 목도리를 두르고 같은 색 립스틱까지 바른 뒤 하루키의 에세이를 챙겼다. 오후 1시밖에 안 됐는데, 베이커리 진열대가 텅 빌 만큼 스타벅스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뱉은 이산화탄소와 웅성거리는 소리, 히터 열기까지 가세해 금세 피곤해졌다. 찬 바람을 쐴 겸 거리를 걷다 얼마 전 문을 연 동네 서점에 들어갔다.

    서점은 스타벅스보다 인구밀도가 훨씬 낮았다.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진열대를 둘러본다. 10위권에 쇼펜하우어 관련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24>와 함께 말이다. 서점 구석에 세로로 꽂히지 않고 프런트 로에 앉아 온전히 얼굴을 드러낸 200년 전 철학자라니.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느 배우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는 장면이 나와 미디어 셀러로 도약한 면도 있지만, 지금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떠오르는 밈이다.

    인스타그램에 #쇼펜하우어 게시물이 1만여 개다. 보통 그의 어록 한 줄을 편집한 게시물이다. 그것만 보면 쇼펜하우어는 괴팍한 염세주의자 같다. “혼자 잘 살면 된다.” “어울리려고 애쓰지 마라.” “인생은 고통이다.” “삶이 힘들면 평소보다 더 먹고 잠이나 더 자라.” 자극적인 편집본임을 알지만,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팩폭’, 타인보단 나에게 집중하란 지침이 호응을 얻고 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쇼펜하우어 저서 제목도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다. 모델 김아현은 쇼펜하우어 책에 끌린 이유를 유튜브에서 이렇게 말했다. “‘얄팍한 행복 대신 단단한 외로움을 선택하라’는 책 속 글귀가 눈에 들어왔어요. 지난해 내 키워드가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면 그 누구와도 행복할 수 없다’였거든요.”

    나는 쇼펜하우어 책과 자기 계발서계의 새해 연금인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샀다. 집에 와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 대신 <인간관계론>부터 펼쳤다. 1936년에 출판된 자기 계발서가 여전히 찬양받다니 놀랍다. 데일 카네기는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방법을 조언한다. 면전에서 비판하지 말고, 경청하고, 진심으로 칭찬하라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일을 해내는 사람은 세상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외로운 길을 걸을 것이다.” 그래, 내가 주변에 무심하긴 하지. 읽기를 멈추고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단체 문자가 아니라 나름 진정성 있어 보이게. 따뜻한 답신이 온다. “연락 줘서 고맙다, 너도 복 많이 받아.” 조용한 거실에 계속 울리는 카톡카톡. 점점 짜증 나 무음으로 바꿨다. 요즘엔 업무 연락을 카톡으로 하다 보니 그 소리만 들어도 사무실에 있는 거 같다. 솔직히 그들도 공휴일에 울리는 카톡이 귀찮지 않았을까. ‘차라리 혼자가 낫다. #쇼펜하우어’란 SNS 게시물이 떠올랐다. 쇼펜하우어가 읽고 싶어졌다. 늘 타인에게 호감을 사려 애써왔는데, 나 언제까지 그래야 돼?

    책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무거운 담론이 아니라,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견해를 에세이처럼 풀어 쓴 <소품과 부록>의 일부와 그의 일기, 편지 등을 엮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고통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하는 추’라는 부분에 밑줄을 쳤다. ‘불에 함부로 손을 넣어서 데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말에 내 인간관계를 떠올리고, ‘행복하려 애쓰기보단 덜 고통스럽게 살아보라’는 말에 안심했다. 맨날 행복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

    쇼펜하우어의 유행을 분석하는 공통 기조는 이거다. 수많은 사건 사고와 재해를 보며 타인과 세상에 대한 기대치는 낮아지고, 사회에서 배제돼 고독한 우리에게 쇼펜하우어의 철학(세상은 원래 그렇게 혼자여도 괜찮다는)은 숨통을 터준다고. 그간 헛소리에 가까운 자기 계발서에 지친 나도 고전이 된 이들 철학서를 믿어보고 싶어졌다.

    얼마 전 한국 영화 <괴인>을 봤다. 지난해 최고의 독립 영화로 손꼽히는 <괴인>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다. 목수인 기홍은 피아노 학원 공사를 맡는다. 어느 날 기홍의 차 지붕이 찌그러지고, 블랙박스에 찍힌 범인 소녀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사건일까. 그보단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매력적이다. 기홍이 <나는 솔로>의 상철로 출연한다면 전설의 16기를 눌렀을 거다. 하지만 내내 ‘왜 저래’ 싶진 않다. 나이 많은 공사장 인부에게 반말을 하다가도, 마트에서 임산부에게 계산 줄을 양보한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경계인간’이다. 나만 그런 거 아니구나. 번듯한 척 살다가도 잘 보일 사람이 없으면 구질구질해지는 거.

    기홍은 인스타그램에 자기 것처럼 멋진 주택 사진을 찍어 올린다. 실상은 방 한 칸에 세 들어 산다. 테이블의 책 <니체의 말>을 우연히 앵글에 걸린 척 찍어 올리기도 한다. 기홍의 허세를 보여주는 장치일 수 있지만, 나는 그가 <니체의 말>을 읽으려 애썼을 거 같다. 우린 구질구질함과 번듯함의 경계에 있지만, 보통 나은 쪽으로 가고 싶어 하니까.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철학자들의 이름을 캘리그래피로 표현해달라고 니콜라 우셰니르(Nicolas Ouchenir)에게 부탁했다. 그는 많은 패션 브랜드와 컬렉션 초대장에 비싼 글씨를 쓰는 아티스트다. “철학자 이름을 써달라고? OMG, 내가 지금 니체를 읽고 있어.” 니콜라가 표지에 니체의 얼굴이 인쇄된 <Premiers Écrits>(초기작) 사진을 보내왔다. 니콜라도 <괴인>의 기홍도 니체의 말에서 답을 구하는 중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도 10여 년간 스토아학파를 위시해 철학이 유행했다(명상이 패션 아이템처럼 소비되기 시작한 지역도 실리콘밸리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스트레스 관리를 열망하는지 느껴진다). 이 열풍의 대표 인물로 트위터 창업자 잭 도시(Jack Dorsey)가 거론된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시간 반 동안 휴대폰을 꺼둔 채 명상하고 8km를 걸어 회사에 가는 그가 스토아 철학에 빠져 있다고 한다.

    아마존 인문 철학 부문 베스트셀러는 1900여 년 전에 태어난 로마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학파 관련 서적이 절반 이상이다. 스토아학파의 인기는 우리의 쇼펜하우어 부상 이유와 비슷하다. 스토아학파는 외부 세계를 통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통제 가능한 나의 행동과 신념, 평온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이 점이 불확실성에 무력해진 현대인에게 통했다는 것이다. BBC는 ‘2024년 꼭 읽어야 할 철학서’ 중 하나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선정했다.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레딧의 ‘Am I the Asshole?’ 게시판은 자신이 정말 XX인지 묻는 사연을 올리고 유저들의 심판을 받는다. 여기서 핵심은 내 행동이 옳은가보단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것이다. BBC는 그런 질문은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기초한다면서 이 책을 추천했다.

    1월이 갈 때쯤, 구입한 쇼펜하우어 책을 거의 읽었다. 가장 기억나는 부분은 그의 반려견 이름이 ‘아트만’이라는 것. 아트만(Atman)은 인도철학에서 변치 않는 초월적인 자아를 일컫는다. 쇼펜하우어는 인도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반려견 덕분에 인도에서 머물며 철학 수업을 듣던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필기한 스프링 노트를 펼쳤다. 세상사가 왜 복잡한지, 어떻게 완성형 인간으로 살지 등 인도 고대 경전 <베다>를 기반으로 한 철학과 역사, 신화가 미숙하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걸 받아 적는 수준이지만, 배우면서 위로를 받았다. 서울의 나나, 수천 년 전 인도인이나 살기 녹록지 않았다는 것, 미숙했다는 것, 어떻게 하면 평안할지 고심했다는 것, 세상과 우주에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 때문에.

    에디터 후배는 1년 6개월째 매주 목요일 철학 수업을 듣고 있다. “살면서 점점 좁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위로도 받는다고 덧붙였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을 몇천 년 전 사람들도 다 했다는 사실에 안정감이 생겨요. 사람마다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 싶고요.” 그는 이번 주에도 네이버 밴드에 들어가 서양 철학사를 클릭할 것이다.

    나도 인도철학 교실에서 느낀 충만함을 되찾고 싶어서, 매일 아침 고전 문헌학자 배철현의 <삼매>를 한 챕터씩 읽기로 했다. 이는 파탄잘리라는 전설의 요기가 쓴 <요가 수트라>의 ‘삼매’ 편을 해석한 책이다. 15분 정도 읽는다. 눈을 감고 복기하며 그날 버틸 힘을 충전한다. 물론 점심시간 전에 무너지기 일쑤지만.

    나는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살아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유행의 하수인이었다. 통장과 체력을 불태운 헬스 PT나 러닝이나 서핑도 당시 유행에 편승했을 뿐이고, 고양이를 키운 것도 어쩌면 휴대폰에 고양이가 많이 보여서 그들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일 거다. 이번 취미, 철학 공부도 세상의 흐름을 좇아갈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철학이 패션이 될지라도. (VK)

    캘리그래퍼
    NICOLAS OUCHEN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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