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승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 전시의 작가
〈보그 코리아〉는 1996년 창간 이래 동시대 여성을 지지하고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걸어왔다.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보그 리더: 2024 우먼 나우(VOGUE LEADERS: 2024 WOMAN NOW)’라는 행사를 개최하며 그 역사를 이어간다. 2024년 그 첫 번째 주제는 ‘WOMAN NOW’로, 전통적인 한옥에서 우리가 신뢰하는 여성들이 연사로 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주목받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1930년대생부터 1980년대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조각, 회화, 사진, 설치미술, 가구공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참여한다. 이들이 만든 작품, 작가들의 삶에 동지애를 느끼고, 삶의 방향성에 힌트를 얻길 꿈꾼다. 전시작 중 일부만 지면에 담았다. 전시 기획자인 독립 큐레이터 전수연과 참여 작가 윤석남, 차승언, 표영실, 정희승, 황수연, 한상아, 소목장세미, 전현선, 구정아가 〈보그〉 페이지를 빌려 연대의 말을 건넨다.
정희승(1974) 작가는 사진을 통해 대상의 본래 의미와 이면에 존재하는 의미를 탐구해왔고, 나아가 사진 매체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일상의 사물과 신체, 공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전시 공간에 따라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시퀀스를 만들며 공감각적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런던 칼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에서 사진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2012년 다음작가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현대사진계를 이끄는 주요 작가로 입지를 굳혀왔고,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어 사진과 글, 음악이 긴밀하게 혼합된 설치 작품을 선보여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전시 참여 계기
이번 전시는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해 기획한 것으로 들었다. 올해의 캠페인 테마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Inspire Inclusion’이라고 한다. ‘포용성에 영감을 불어넣으라’는 것인데, 물론 포용성의 가치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포용보다는 배제와 혐오의 언어가 현재의 우리 주변에 더 가까이 만연해 있다고 느낀다. 상충하는 가치나 정치적인 입장 차가 너무 커서 그 간극을 언어를 통해 좁히는 것이 요원할 때,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예술가들이 오랜 기간 천착해온 각자의 세계에서 길어 올린 다양한 비언어적 감각을 발견하고 그에 감응하는 경험이 포용과 연대의 감수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의 삶 혹은 예술
작업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돌아보면 지나온 시간은 작업을 통해 세상에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실현하는 일과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좌충우돌해온 나날이었다. 30대 중반의 다소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동 전반에 걸쳐서 가족을 돌보고 작업과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병행하고 있다. 여전히 외줄 타는 심정으로 살고 있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하며 나의 걸음이 내딛는 자리를 조심스럽게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많은 동료 작가와 작업을 통해서 만난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은 성찰과 연대감이 큰 힘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위태로운 가운데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는 것인데, 그 힘은 결국 이 긴 여정에서 마주치는 우연한 만남과 나를 열어놓고 유연한 상태를 유지할 때 맺어지는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 같다.
공감하고 위로받는 것
친구, 가족, 때로는 화창한 햇살과 집 앞마당의 목련나무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극도의 절망과 무기력으로 무너져버릴 때가 있다. 그때는 나 자신을 힘껏 다독여 일으켜 세우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최근에 비슷한 좌절을 겪고 있던 시기에 읽고 정신이 번쩍 난 책 구절이 생각나서 옮겨본다. 이성복 시인의 <극지의 시>에 나오는 대목인데, 안나푸르나 등반에서 조난당한 젊은 대원의 일기를 옮긴 것이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 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이 작품을 선보이는 이유
이번에 전시하는 사진은 2020년 올해의 작가상에서 소개한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이라는 작업의 일부다. 이때 작가 24명과 함께 예술과 삶 전반에 관한 대화를 나눈 후 남겨진 인상과 단어를 토대로 사진을 만들었다. 사진은 각 작가의 삶에 관한 다양한 테마를 담고 있고, 사진의 대상도 인물, 사물, 공간 등 다양하지만 그 모든 요소는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이미지로 수렴된다. 그중 ‘행복한 루저들’이라는 사진 연작이 있다. 배윤환 작가의 ‘파쇄기’라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영상 작업을 보고 작업에 등장한 캐릭터들을 촬영했다. 파쇄 전문 회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에피소드를 골자로 하는 해학적인 작업이었다. 천진난만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무능하거나 이기적인 각각의 캐릭터가 작가의 각기 다른 페르소나라고 보았고 이에 공감해 작가의 초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소망하는 WOMAN NOW
‘NOW’ ‘지금’이라는 단어는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를 떠올린다. 기후 위기와 환경문제 같은 이미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더 큰 위협으로 닥쳐올, 하지만 너무 거대해서 애써 외면하게 되는 엄연한 현실 말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단어는 긴박함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지금, 여기서 잠시 멈추고 돌아보고 고려하기를 요청하는 것 같다.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 번아웃을 겪다 보니 삶을 돌보는 일의 의미를 다시 헤아리게 되었다. 지금은 나 스스로 삶의 속도를 약간은 늦추고 치열한 경쟁의 패러다임과 생산성의 경제 바깥으로 밀려나 있던 잉여와 타자들을 발견하고 감춰진 주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소 느리게 가더라도 마주하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와 좀 더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관계를 향유하는 풍요로운 지금이 이어지기를.
동시대 여성에게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경구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이 두려움 없이 자유롭고 청정하게 살아가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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