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로마식 아파트
낭만적으로 빛바래고 낡은 것에 대한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순수한 찬사. 수 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그의 웅장한 로마식 아파트가 은밀히 문을 개방했다.
어느 도시에 가닿든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가 신성한 의식처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새집을 물색하는 일. 특히 빛바랜 아름다움, 유구한 역사와 과거의 위엄이 깃든 오래된 장소에 대한 미켈레의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낭만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습관이지만 현실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애정이 바로 로마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건물, 팔라초 스카푸치(Palazzo Scapucci)를 리모델링하는 기가 막힌 작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1990년대 초 감수성 풍부한 10대였던 미켈레는 늘 어딘가에 몰두한 표정으로 고독하게 ‘영원의 도시’라 불리는 로마를 하염없이 거닐곤 했다. 밝은 초록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모히칸 스타일로 한껏 세운 그는 동네의 유일한 펑크 키드였다. 오래전부터 부유한 지역으로 유명했던 콰르티에레 트리에스테(Quartiere Trieste)에 자리한 보수적인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그는 무정부주의자인 친구들과 훨씬 더 자주 어울렸다. 로마는 그에게 모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비밀스러운 골목길이 그랬고, 길에서 흘러나오는 귀청이 떨어질 듯한 테크노 음악, 페인트로 제멋대로 리폼한 컨버스 올스타와 자유를 상징하는 팔라디움 스니커즈, 인도산 실크 스카프, 헤비메탈 액세서리, 망사 스타킹, 인더스트리얼 펑크 의류 더미로 가득했던, 이제 빛바랜 과거 속으로 사라진 아방가르드 창고인 ‘바빌로니아(Babylonia)’와 ‘다코타(Dakota)’로 향하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모든 아웃사이더가 쇼핑을 하고 음악을 듣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모여드는 안식처였다.
미켈레의 삼촌 비아 마르구타(Via Margutta)도 당시 정원 한구석에서 앤티크 가구를 복원하는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접착제와 유향 수지, 테이블과 암체어에서는 그의 말에 따르면 “화려했던 지난날의 꿈 냄새”가 났다. 미켈레는 국립 에트루리아 박물관(National Etruscan Museum)이 있는 르네상스 왕궁 빌라 줄리아(Villa Giulia)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원을 거닐거나 로마 시대 이전의 유물과 테라코타 장례 기물을 감상하면서. 밤늦게까지 파티에 취하거나 악명 높은 아페리티보를 즐기러 도심 피자집에서 주로 모이던 친구들과 달리 미켈레는 도시의 지붕과 돔을 올려다보며 건물이 자신에게 말을 걸기를 기다리곤 했다. “로마는 사람을 홀리는 곳이에요. 아주 어수선한 방식으로 모두를 환대하죠.” 미켈레가 입을 열었다. 사색하는 성향은 곧 온갖 사물과 예술, 책, 패션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그가 8년 가까이 구찌(Gucc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브랜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비결 또한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그의 참을 수 없는 이끌림, 역사적인 유물과 건축물, 인물들의 전생으로 깊이 빠져드는 경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저는 부서지고 허물어져가는 집을 고치는, 일종의 의사와 비슷해요.” 오래된 궁전처럼 보이는 저택에서 마주한 미켈레가 이야기했다. “훼손되거나 버려진, 제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집을 사죠.” 미켈레를 처음 만난 곳은 그가 최근 리모델링 작업을 마친 팔라초 거리의 피아노 노빌레(Piano Nobile, 저택의 주요 층으로 주로 2층을 의미한다)였다. 짙은 갈색의 풍성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그는 진청록색에 가까운 ‘페트롤 블루’ 색상의 튜더 시대 벨벳 암체어에 앉아 있었다. 구찌를 떠난 지 8개월 만에 만난 그의 얼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뒤 비로소 안식을 누리게 된 이의 차분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비쳤다. 800년 된 낡은 저택을 보수하는 일이 ‘안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팔라초 스카푸치는 중세 시대의 탑을 아직까지 보유한 로마의 몇 안 되는 건물이다. (이 탑에서 11세기에 ‘산토토네(Sant’Ottone)’로 불렸던 수도승 오토네 프란지파네(Ottone Frangipane)가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1400년대에는 저택 주변의 온갖 구조물이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의 수녀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미켈레는 복원 과정에서 이곳의 높은 기둥에 새겨진 1400년대 후반 교황의 문장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에는 부지 전체가 명망 높은 스카푸치 가문 소유로 넘어갔다. 미켈레는 이 탑과 관련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1871년에 출판된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책 <나다니엘 호손의 프렌치 & 이탤리언 노트북>에 실린 이야기였다. 스카푸치 가문의 사랑을 듬뿍 받던 애완 원숭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가문에서 첫아이가 태어나자 그 원숭이는 아이를 질투한 나머지 요람 속에 곤히 잠들어 있던 아이를 훔쳐 탑 꼭대기로 올라가버렸다. 당황한 아이의 아버지는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성모 마리아를 부르짖으며 아이만 무사히 돌아오게 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탑의 석유램프를 영원히 켜두겠다고 기도했다. 그러자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원숭이는 아이를 돌려주었고, 그때 이후로 탑에서는 정말로 불이 꺼진 적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다.
두 팔로 크게 제스처를 취하며 열정적으로 내게 이야기를 건네는 미켈레의 양손에서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금반지가 앞다투어 번쩍거렸다. 그에게 그런 역사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는 시간이 달력이나 시계로 가늠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흘러간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 벽들이 거친 800년이라는 세월은 저에게 바로 지금, 이곳에 존재하죠. 지나간 과거를 그리워하는 게 아닙니다. 전 죽은 사람들이 완전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고 여기지도 않아요. 모든 사람은 세상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가니까요.”
미켈레의 아버지는 소유의 개념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자유로운 반체제 인물이었다. 그는 1970년대에 집세를 감당하지 못하는 노동자 계층에게 주거지를 제공하기 위해 투쟁했던 극좌파 정치 세력 로타 콘티누아(Lotta Continua) 거주 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강한 정치적 신념을 지닌 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을 무척 사랑하셨어요. 거의 애니미즘에 가까운 믿음을 갖고 계셨죠. 아버지는 우리를 산으로 데려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고 하시곤 했어요. 이러시면서요. ‘너희는 말이 너무 많아. 가만히 앉아서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들어보렴. 그게 바로 신이란다.’” 미켈레의 가족은 집세를 내기 어렵게 되자 로마 북부 끄트머리에 있는 로타 콘티누아가 점거한 불법 주거지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어린 미켈레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떠돌이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남편에 비해 비교적 덜 급진적인 가치관을 지녔던 미켈레의 어머니에게는 특히 더 고달팠다. 미켈레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생판 모르는 대가족들과 공간을 나눠 썼어요.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경험한 시기였죠. 눈치를 익혔고, 가족 너머의 타인에 대한 진솔한 애정을 갖게 됐어요.” 미켈레는 야심한 시각에 건물을 드나드는 낯선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을 즐겼고, 구석에 앉아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흥미롭게 엿들었다. “창녀부터 마약상, 살던 곳에서 쫓겨난 딱한 사정의 홀어미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그래서 전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중요한 일인지 잘 알아요.” 그가 포르투갈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시작해 포용과 회복의 장소로 자리매김한 바로크 양식의 산탄토니오 데이 포르토게시(Sant’Antonio dei Portoghesi) 교회 맞은편에 살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켈레는 고향(라치오 북부의 에트루리아 지역)에 있는 자신의 집을 예술가들의 거주지로 제공할 생각도 하고 있다. 구찌에 있을 때는 세계를 누비며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창작자들이 언제든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사무실을 활짝 열어두기도 했다.
미켈레가 팔라초 스카푸치에 맨 처음 들어섰을 때, 이 아파트 천장에는 어이없는 스티로폼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층고는 한껏 낮아져버린 어둡고 음울한 곳이었다. 정말이지 매력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아주 특이한 구조였어요. 홀마다 조그만 방이 연달아 있었고, 그 모든 방은 작은 창문이 있는 더 작은 방으로 연결되었죠. 왠지 모르게 자꾸만 이 집으로 돌아와 곳곳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저는 어떤 집에 반하면 단순히 그 집을 사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집착에 가깝게 쫓아다녀요.” 그 후 미켈레는 집주인들을 찾아다녔다. “여러 사람 소유였던 역사가 있는 집이었어요. 다시 말해 공동 주거지였던 거죠.” 미켈레는 집을 구매하면 할 일이 산더미처럼 쏟아질 거란 걸 알았지만, 끝내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후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 중 하나는 이중 천장 아래 감춰져 있던 원래 지붕을 발견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조각, 프레스코, 앞서 말한 교황의 휘장, 프랑스 왕의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 왕가를 상징하는 백합 문장), 그리고 델라 로베레 가문의 상징인 방패 문양 등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높은 작업대 위에서 보냈다. “천장 구석구석과 친구가 되었죠.” 그가 웃었다. “그러다 보니 복원 팀에게 노이로제에 가까운 스트레스를 안겨줬을지도 모르지만요.”
먼 곳에서 여유로운 교회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우린 이곳에 얽힌 유령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고, 더 늦기 전에 집을 둘러봐야 했다. “정말 준비된 거 맞죠?” 미켈레가 씩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반려견 보스코와 오르소가 꼬리를 흔들며 따라나섰다.
두 번째 거실에는 오크나무 형상으로 조각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실제로 사용하진 않아요. 장식용이죠. 샹들리에가 공간에 드리우는 분위기가 좋거든요.” 볕이 잘 드는 부엌을 따사롭게 물들인 로마의 나긋나긋한 태양 빛이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건너온 우아한 타일과 목재, 유리로 이루어진 유서 깊은 캐비닛을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원숭이 전설이 깃든 탑의 대리석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작업실 겸 서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죠.” 미켈레가 뒤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최근 그는 이곳에서 시집을 읽는 일에 빠져 있다고 했다. 앞으로 펼쳐질 여정과 현재 머물러 있는 순간에 대해 사색하며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에겐 명상과 다름없다. “확실히 지금 저에겐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해요. 시집의 단어를 통해 드러나는 것과 종이 빈 여백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죠.” 그러다 한순간 그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 좀 보세요!” 그가 책상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열어 보였다. 꼬마들이 엄청난 호기심을 느낄 만한 회전하는 책장 문이었다. 건물 곳곳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수많은 비밀 공간과 통로는 미켈레가 이 집에 매료된 큰 이유였다. 그리고 미켈레는 인테리어를 완성하며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옷장 안에도 비밀 공간이 또 하나 있다며 내게 윙크했다.
시인이자 음악 연구가였던 아멜리아 로셀리(Amelia Rosselli)의 두꺼운 문집을 포함한 수많은 책과 필기구로 가득한 거실 테이블을 지나 우린 침실로 향했다. 아름다운 베네치아풍의 문 프레임을 침대 헤드보드로 활용한 감각이 눈에 띄었다. 다음은 미켈레의 작업실. 아직 작업 중이던 복도와 이어진 작업실에는 크고 작은 상자가 가득했으며 인도풍의 유리 작품과 마리오네트 같은 귀한 오브제가 잘 전시되어 있었다. 그 틈에서 미켈레가 갑자기 국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런 황당한 일도 있답니다. 얼마 전 여기 어딘가에 쌓여 있던 상자를 열어보다가 이 국자 컬렉션을 발견한 거죠. 어찌나 많이 모아뒀던지 규모가 정말 놀라웠어요.” 이후 우리는 몇 번 더 계단을 올랐고, 그가 보여준 것보다 훨씬 많은 방을 거쳐갔다. “정말 끝이 없죠.” 테라스를 함께 걷던 그가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산탄토니오 데이 포르토게시 교회의 오르간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빽빽이 우거진 나뭇잎, 덩굴장미, 바나나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스르르 지나갔다.
미켈레가 늦은 밤에도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를 즐긴다는 사실은 지극히 낭만적으로 들렸다. 낮도 좋지만 인구 밀집 지역에 거주하는 탓에 바깥에 나가면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알아보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인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파는 바 산테우스타키오(Sant’Eustachio)에 커피 한 잔 마시러 갈 때도 그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착용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미켈레가 사랑하는 영화와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1년에 보는 영화는 고작 몇 편. “그러나 그 영화는 제게 굉장히 깊은 의미를 남긴답니다.” 자리를 옮기기로 한 우리는 바에서 나와 천천히 걷다가 서점과 오래된 극장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거 보세요.” 그가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Sant’Andrea della Valle) 교회의 마니에리즘적인(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회화를 중심으로 전개된 예술 양식으로, 관찰이나 사실보다 독창적인 해석을 중시했다) 파사드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로마는 거대한 카오스 한가운데 이런 자잘한 안전지대가 퍼져 있는 도시예요.” 그러다 코르소 비토리오(Corso Vittorio) 앞을 지나는 우리에게 어떤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며 소리쳤다. “안나모 운 포(Annamo un po, 빨리 좀 갑시다)!” 미켈레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도 늘 제가 ‘메차리아(Mezz’aria)’처럼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메차리아는 ‘허공에 떠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큼지막한 스테인드글라스를 거쳐 들어온 빛이 교회 한가운데 있는 거울에 반사되어 건물 전체에 찬란한 황금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미켈레는 매일같이 이곳에 드나들지만 볼 때마다 자신을 반겨주는 이 아름다운 빛에 항상 새롭게 매료된다고 말했다. “로마의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런웨이 같아요.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범죄 현장을 다시 찾듯 저는 언제나 이곳으로 되돌아와요.”
미켈레가 즐겨 찾는 또 다른 장소는 시장 상인과 과일 판매상의 활기로 가득한 캄포 데 피오리(Campo de’ Fiori)다. 거리를 거닐며 보니 미켈레는 이곳 상인들과 전부 친해 보였다. 우리는 피아차 파르네세(Piazza Farnese) 광장 맞은편에 자리한 유명한 피자집에서 풍기는 군침 도는 냄새를 겨우 참아내고, 광장 한가운데 오크나무 한 그루가 외롭지만 당당한 풍채로 서 있는 예스러운 광장 피아차 델라 퀘르차(Piazza della Quercia)로 이동해 어느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문득 미켈레가 꿈꾸는 눈빛으로 티베르(Tiber) 근처의 오래된 상업 지구를 가리키더니 영감을 얻기 위해 즐겨 찾는다는 팔라초 스파다(Palazzo Spada)를 가리켰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여전히 꿈꾸는 듯한, ‘허공에 붕 뜬’ 모습으로 테이블 위에 지갑을 남겨둔 채 자리를 떴다. 다행히도 어느 친절한 여행객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에게 지갑을 건넸다. “제가 이렇다니까요.” 미켈레가 웃었다. 그리고 바람을 타듯 팔라초 스카푸치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새로운 공상에 빠져들었다. “로마는 수천 년 동안 바로 여기에 존재했어요.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라지지만 로마는 계속 여기에 남을 거예요. 이 도시는 우리를 유혹하는 동시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나와 함께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거야. 나는 더없이 아름답지만 너의 진을 쏙 빼놓을 테니까. 나는 일도 안 하고, 그저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서 완전히 널 못살게 만들 거야.’” (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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