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향기에 대한 모든 것
기억의 시, 감정의 공유, 자아 발견의 여정, 윤택한 삶을 위한 예술. 〈보그〉가 만난 세계 최고의 조향사들이 ‘향수’를 정의한 표현이다. 이렇듯 향은 그저 공기를 타고 코끝에 닿는 후각적 개념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 태어날 때 가장 먼저 발달하는 후각은 뇌와 바로 연결된 감각으로 우리는 향을 통해 감정을 인식한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시각적 만족감을 주고, 새콤달콤한 화학식은 미뢰를 자극하며, 피부로 느낀 감촉 또는 어떤 리듬을 떠올리게 하고, 겪어본 적 없는 고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오감을 뛰어넘는 감각,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는 〈보그〉식 향기 프레젠테이션.
Eye-Catching
이미지의 후각화. 미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향에서 모티브를 얻은 색색의 아름다운 디자인은 두 눈을 사로잡는다.
Maison Francis Kurkdjian
2009년, 브랜드의 창립과 함께 선보였던 경쾌하고 우아한 무드의 향수 ‘아폼 뿌르 옴므(APOM Pour Homme)’와 ‘아폼 뿌르 팜므(APOM Pour Femme)’. 2020년 단종으로 모두의 아쉬움을 샀던 향수 라인이 재개 소식을 알렸다. 이름은 그대로 ‘나의 일부(A Part Of Me)’를 축약한 ‘아폼(APOM)’. 과거 성별을 기준으로 구분하던 두 향수의 장점만 합쳐 한 병에 향을 담아낸 것이 핵심이다. 네롤리와 라벤더, 오렌지 블로섬의 절묘한 균형을 통해 조향사 프란시스 커정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나’라는 빛나는 존재에 찬사를 보낸다.
이번 향수의 첫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나요?
공동 창립자이자 CEO인 마크 차야(Marc Chaya)가 다시 ‘아폼’을 출시할 의향을 물었을 때 떠오른 생각이 여성과 남성 버전의 향수를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펜티멘토’ 작업이 연상되더군요. 이전 작업을 돌아보고, 수정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의도적으로 그림에 덧칠을 하는 화가처럼요. 두 향수는 동일한 분위기와 기술적 근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달콤한 앰버 베이스에 라벤더, 시더우드, 오렌지 블로섬을 조합한 단일 후각 매트릭스로부터 비롯됐죠. 화사한 관능미, 우아한 중독성이라는 각각의 장점을 결합한 2024년의 ‘아폼’은 현대적인 푸제르 잔향 위에 따뜻한 바닐라, 섬세하고 달콤한 꽃 향을 쌓아 올린 결과물입니다.
과거의 남녀용 향수와 이번 신작까지 모두 당신이 창조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향수 월드를 둘러싼 변화에 당신의 향기 비전은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향수는 ‘시대의 거울’이며, 향기 취향은 문화적 진화에 의해 정의되죠. 메종 프란시스 커정이 출범한 2009년에는 ‘남녀 공용’ 옵션이 턱없이 적었으나, 현재의 우리는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 대부분의 향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유행보다는 스스로의 창의적 가능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유의 비전이나 접근 방식은 변하지 않는 것 같군요. 뛰어난 품질은 언제나 필수적이며, 감정은 제 창작물을 형성하는 요소입니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익숙한 동시에 새롭다고 얘기해주더군요.
‘아폼’이란 향수가 당신에게 주는 의미는?
향기는 다른 사람에게 남기는 ‘자신의 일부’임을 암시합니다. 이번 작업은 ‘나의 일부’를 뜻하는 향수 이름처럼 15년 전 제 자신의 유산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죠.
유년 시절, 큰 영감을 준 영화나 책을 공유해준다면?
제 뷰티 아이콘인 오드리 헵번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가장 좋아합니다. 책은 아니지만, 열다섯 살 때 유명 조향사들의 인터뷰가 담긴 프랑스 잡지의 기사도 떠오르는군요. 그 글을 읽은 후에 조향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제 인생을 위한 계시나 다름없었죠.
최근 새로운 자극을 얻는 곳이 있나요?
조향사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세상과 계속 연결돼 있어야 해요. 문화와 예술, 패션과 사람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기에 그 원천은 매일같이 새롭죠. 전 항상 보편적인 느낌에 집중하고자 노력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것이 기초가 된 다음 방향성을 제시하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이름’을 정하곤 합니다. 재료 자체는 결코 출발점이 될 수 없어요. 단지 스토리텔링을 위한 여러 도구일 뿐이죠. 화가는 색을 사용하고, 음악가는 노트를 사용하며, 조향사는 ‘향’ 그 자체를 활용하죠.
애정이 각별한 향조가 있나요?
글쎄요. 늘 앞을 내다보며 다음 단계, 다음 향수를 생각합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죠.
당신이 생각하는 훌륭한 향수는?
구매한 시점부터 그 향을 입을 때마다 기억에 남는 경험을 선사하는 향수. 탁월한 품질은 기본입니다. 특히 향수의 흔적, 즉 지속 시간과 강도를 고려하고 그 잔향을 평가하는 것이 조향사의 주요 임무예요. 훌륭한 향수는 단순히 ‘좋은 향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감성, 스토리텔링, 기술 등 예술성과 노하우가 골고루 혼합된 결과물이에요. 쉬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일이죠.
Olfactory Instinct
코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가장 아름답고도 원초적인 수단. 〈보그〉는 우리의 삶을 한층 다채롭게 만드는 후각 센서로 ‘꽃’을 탐닉한다. 올가을 향긋함을 책임질 두 가지 플로럴 작품과 그에 영감을 불어넣은 예술가들과 나눈 대화.
Prada Beauty
절제된 감각과 무한한 창의성으로 아름다움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프라다 뷰티가 마침내 한국에 상륙했다. 브랜드의 본질을 후각적 언어로 번역한 대표 여성 향수의 이름은 ‘패러독스(Paradoxe)’. 한 가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여성에게 내재된 다차원적 면모를 ‘역설’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향기는 밝고 화사한 플로럴과 강렬한 앰버 노트의 대조가 돋보인다. 향긋한 네롤리와 재스민꽃 향은 점차 진한 우디 노트로 변모하며 플로럴 향수의 지루한 공식을 탈피한다. 이토록 여성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향수는 3인의 조향사로부터 탄생했다. 우아하고 직관적인 향 감각을 지닌 조향사 앙투안 메종뒤(Antoine Maisondieu), 그리고 두 여성 조향사 나데주 르 갈란테젝(Nadège Le Garlantezec), 샤말라 메종뒤(Shyamala Maisondieu)와 나눈 대담.
세 사람의 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우린 20년 넘게 함께 일해왔기에 이제는 파트너라기보다는 가까운 친구들처럼 느껴져요. 각자의 개성이 향에 역동성을 부여하며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상반되는 요소를 결합하는 방식을 즐기는 나데주가 우디 앰버 향을 구조화하며 ‘패러독스’ 특유의 강렬한 아우라를 만들었다면 샤말라는 점차 깊어지는 향의 중독성을, 앙투안은 쉽게 유행을 타지 않는 세련된 플로럴 노트를 가미해 더 대담한 향기가 완성됐죠.
역설이란 단어를 조향사만의 언어로 정의해본다면?
본질적으로 역설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합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파괴적인 것을 만들어내며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주죠. 향기로는 상쾌함과 극명히 대비되는 관능미가 조화롭게 느껴진다는 점이 모순 그 자체예요. 하지만 처음 분사한 순간부터 마무리 잔향까지, 향은 유려하게 변주되며 편안한 기분마저 들게 합니다.
향기의 관전 포인트를 알려주세요.
네롤리의 ‘꽃눈’ 에센스부터 설명해보죠. 꽃이 피기 전 봉오리 모양의 싱싱한 상태로 수확한 다음 증류하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향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과수원에서 산책하는 듯 톡톡 튀는 신선한 꽃향기를 재현하는 거죠. ‘앰브로픽스™’는 향의 유혹적 감각을 형성하는 중추로 작용합니다. 생명공학 신기술로 개발된 분자는 사탕수수에서 자연적으로 추출되는 성분으로, 향이 강력하지만 기존 생산 방식에 비해 농지를 100배나 적게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에요.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같군요.
물론이죠. ‘역설’이란 컨셉을 품고 있음에도 향이 낯설기보다는 포근하고 깔끔하게 느껴지는 건 ‘세레놀리드(Serenolide™)’라 불리는 화이트 머스크 분자가 사용된 덕분입니다. 글로벌 향료 기업 지보단(Givaudan)이 개발한 이 분자는 현존하는 합성 머스크 가운데 가장 확산성이 뛰어나며 재생 가능한 최신 문물이죠. 생물 전환 과정을 여러 번 거쳐 친환경적으로 추출한 향료와 합성 분자를 사용하는 건 브랜드만의 혁신성과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프라다 뷰티 전체를 관통하는 리필 가능 패키지 역시 자원을 절감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요.
삼각형 모양의 향수병 역시 인상적입니다.
‘패러독스’의 보틀은 향을 개발할 때 동시에 만들었어요. 프라다 하우스를 상징하는 삼각형 모양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초기에 설정했던 세 가지 원료인 네롤리와 앰버, 머스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삼각형의 각 꼭짓점이 균형을 이루는 향기와 딱 맞아떨어지죠.
몇 가지 키워드로 이 향을 설명해본다면?
클래식, 예상치 못한 아방가르드함.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향기를 즐기길 바라나요?
내면의 다양한 정체성을 찾길 바랍니다. 관능미, 모던함, 강한 카리스마, 편안함, 그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해보세요.
Acoustic Wave
고막을 자극하는 청각, 심금을 울리는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에서 향기가 비롯되기도 한다. 첫 향부터 마물의 여운까지, 리드미컬하게 흘러가는 향의 변주는 음률과 닮아 있다.
Tactual Sensation
공기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후각과 피부에 닿는 촉각. 두 감각의 긴밀한 연결은 조향사의 철저한 화학식과 창의성을 따른다. 질감이 주는 분위기 또는 가죽의 동물적이고 강렬한 향취. 두 가지 방식으로 촉감을 재해석한 최신작과 그 창조자를 만났다.
Hermès
“8년간 은밀하게 제작해온 향수입니다. 누구도 이 작업을 의뢰한 적 없지만, 시간 제한 없이 취미 생활을 하듯 틈틈이 만들었기에 즐거웠죠.” 지난 5월 말, 에르메스의 조향사 크리스틴 나이젤은 <보그>를 자신의 파리 작업실로 초대했다. 브랜드에 합류한 지 어느덧 10년. 그녀는 창작자에게 자유를 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일터에서 일한다는 걸 인생의 가장 큰 행운으로 꼽는다. “에르메스의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 알렉시 뒤마는 늘 제게 말하죠. ‘크리스틴, 실수해도 괜찮아요. 나는 당신이 대담하게 여러 가지를 시도하길 원해요.’ 조향사 커리어에서 더없이 중요한 향수이자, 앞으로 이곳에서 단 하나의 향수를 만들어야 한다면 이것일 거라 단언했습니다.”
이토록 개인적인 애정과 짙은 노고가 담긴 신작의 이름은 ‘바레니아(Barénia)’. 아이디어는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유연한 가죽에서 출발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흔히 가죽의 질감을 떠오르게 한다거나 레더 어코드로 무장한 향이 아니라, 익히 시원한 나무 향으로 직결되는 시프레 계열이라는 점이다. “바레니아에 손톱으로 작은 스크래치를 낸 뒤 어루만지면 흔적이 사라집니다. 피부와 정말 비슷하지 않나요?” 크리스틴은 피부에 와닿는 가장 관능적인 향에 대한 예찬을 펼쳤다. 그 일념으로 창작된 향수는 전에 없던 시프레 노트다. 가죽과 자연의 향이라니, 생경한 조합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 이 향을 구성하는 원료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대화는 더 깊어졌다. “플로럴, 프루티, 우디 향이라고 하면 단어 자체에서부터 향이 그려지죠. ‘시프레’는 좀 더 복잡할 수 있어요. 재료가 아니라 향수의 원형이자 조향사의 의도가 만들어낸 개념이니까요. 요리사가 베아르네즈 소스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죠. 달걀과 허브, 레몬즙 등 대표적인 몇 가지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시프레 향조 역시 마찬가지로 필수 향료 몇 가지가 필요해요. 감귤류, 장미와 재스민, 오크모스와 파촐리 등이 가장 대표적인 클래식한 라인이죠.”
그녀가 향수의 도입부를 위해 선택한 것은 바로 베르가모트. “익기 전, 녹색을 띠는 시칠리아의 베르가모트를 수확하면 생생하고 맑은 향을 냅니다. 첫 향에서 명확성을 주고 싶었어요.” 여기에 장미와 재스민 대신 이제껏 향수 월드에서 활용된 적 없는 ‘버터플라이 릴리(Butterfly Lily)’라 불리는 꽃생강이란 원료를 사용하며 차별화를 뒀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자라는 이 작은 흰색 꽃은 백합처럼 강하지만 한결 우아한 향을 발산한다. 오크모스 대신 바닐라처럼 부드러운 참나무로 향수의 중추를, 날것에 가까운 파촐리를 공수해 생명공학 분야의 첨단 분자와 합성해 독특한 개성의 노트를 함께 사용한 과감함에서 시프레 향수를 향한 크리스틴 나이젤의 열정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하나 남아 있어요.” 크리스틴은 인터뷰에 앞서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에 등장했던 새빨갛고 작은 열매를 언급했다. “어린 시절 동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의 전래 동화책을 수집했죠. 자라면서 어린 시절 추억을 잊기 마련인데, 딱 하나 머릿속에 남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바오밥나무에 살았던 꼬마 마술사를 주인공으로 한 아프리카 설화였죠. 이 작은 마술사는 뛰어난 마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작고 빨간 열매로 쓴맛을 지닌 모든 것을 달콤하게 바꿀 수 있었거든요. 조향사가 되고 난 후부터 마음 깊이 남은 이 이야기 속 작은 열매를 찾고 싶었죠.” 그러다 4년 전, 우연히 검색을 통해 한 프랑스 청년이 가나에서 기억 속 열매와 닮은 과일을 수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크리스틴은 샘플을 받은 직후 15kg의 과일을 주문했다. 하지만 얻어낸 것은 겨우 아주 작은 한 방울. 아쉽게도 향을 뽑아낼 수 있는 과일은 아니었다. “이 과일의 향을 맡았을 때 살짝 말린 살구 또는 건과일의 향이 나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중독적인 향기의 분자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은 열망으로 그 향을 재구성하기에 이르렀죠.”
그녀는 내게 이 빨간 열매를 내밀며 입안에 10분가량 머금고 서서히 녹여 먹는 것을 제안했다. “가운데에 씨가 있으니 깨물지는 말아요. 껍질이 물러지도록 천천히 먹으면 말린 살구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이 나죠?” 몇 분이 지나 과육이 없어진 후 남은 씨앗을 뱉자 크리스틴은 레몬 조각을 한입에 깨물어 먹으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레몬에서는 단맛이 났다. “그래서 우린 이 열매를 ‘미라클 베리’, 기적의 열매라고 부르죠. 과학적으로는 ‘미라쿨린(Miraculin)’이라는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어 모든 쓴맛을 달게 만드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의 기분까지 달콤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게 마법 능력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영감의 원천은 어디에서도 올 수 있다는 것과 놀라운 이야기를 품은 이 작은 기적을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완성된 향은 청량함이 강한 기존 시프레 노트보다 한층 감미롭고 포근하게 피부에 스며든다. 한마디로 향긋한 ‘살 내음’을 추구한다면 마음에 쏙 들 만한 향기다. 첫 향은 짜릿하며 상쾌하고, 과즙과 플로럴 노트의 달콤함이 느껴지다가 그윽하지만 무겁지 않은 잔향으로 마무리되는 균형은 몹시 세련됐다. 피부를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듯한 향을 계속 맡고 있으니 바레니아 가죽과의 연결 지점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에르메스를 사랑하고 입는 여성들은 자신감, 확고한 취향을 지니며 자신의 본능을 매우 신뢰합니다. 본능과 후각은 매우 밀접하고요. 오랜 시간 이 향수에 몰두하며 영감을 주는 여성들을 떠올렸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가진 여성들 말이죠.” 그녀는 이 향수를 사용하는 모든 여성이 자신의 ‘본능’을 믿고 따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따르고 싶은 본능은 무엇일까? “향을 통해 추구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제게는 본능적인 겁니다. 영원한 것이죠.”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풍부한 문화유산, 이국적인 향신료와 장엄한 자연. ‘향’에 심취한 이들에게 중동은 곧 매력 넘치는 미지의 영역이다. 향수 월드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브랜드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은 2014년 앰버 우디 계열의 향수 ‘더 나이트(The Night)’를 시작으로 중동이 가진 신비로움에 대한 찬사를 담은 ‘데저트 젬(Desert Gems)’ 컬렉션을 론칭했다. 대담하고 강렬한 향이 돋보이는 향수 라인 가운데 다섯 번째 향수 ‘홉(Hope)’이 오는 10월 1일 공개된다. 그리고 프레데릭 말의 오랜 향기 파트너, 조향사 도미니크 로피옹이 또 한 번 현대적인 감각으로 고차원의 레더 노트를 창조했다.
‘데저트 젬’의 시작인 ‘더 나이트’와 ‘프로미스’의 창작자입니다. 신작 ‘홉’만의 관전 포인트는 뭔가요?
오우드(Oud)만의 절대적인 고귀함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외적으로 태국산 오우드 에센스를 사용했죠. 제가 즐겨 사용하는 최상급의 플로럴 원료인 아퀼라리아(Aquilaria)에서 분비되는 수지로 꽃 향은 물론 동물적인 향과 감귤 향까지, 예상치 못한 분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스모키한 레더 노트의 베티베르와 스파이시하면서도 상쾌한 향취의 핑크 페퍼콘, 사이프러스, 주니퍼가 어우러지죠. 궁극의 우아함을 자아내는 향입니다.
강렬한 향료를 정교하게 배치하는 당신만의 조향 방식은 특출하죠.
말과의 작업에선 늘 극도의 정확성이 요구됩니다. ‘디테일’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죠. 오우드는 강력한 개성을 가진 원료이기에 이번 작업에서 정확한 균형을 찾는 일이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다른 성분을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홉’이라는 향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강한 것들이 이룬 균형’이라 말하고 싶군요.
직역하면 ‘희망’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지난 몇 년간 중동 지역으로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만의 향수 문화, 향에 대한 깊은 조예와 전통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특히 오우드 시장을 가장 많이 방문했죠. 도처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묵직하고도 은은하고 청량한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불에 태운 오우드 위에 그들의 전통 의상인 아바야를 부드럽게 흔들어 향을 풍기는 법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기도 했어요. 매혹적인 향 외에도 사람들의 관대함, 자연과의 공생, 아름다운 환경, 특히 광활한 사막 등이 영감의 원천이 되어 신작의 모티브가 됐습니다. 모든 경험이 ‘희망’을 심어주는 것들이었죠.
프레데릭 말과는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오고 있습니다. 향이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나요?
수십 년 동안 이어온 관계이기에 이제 눈빛만으로도 서로 마음이 통합니다. 하지만 후각에 관해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논의하죠. 성분, 향수의 구조와 공식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며 원하는 목표에 점차 가까이 도달합니다.
그를 위해 제작한 향수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을 꼽는다면?
부모에게 가장 좋아하는 자녀가 누구인지 묻는 것과 같아요. 각 창작물마다 고유의 소중한 이야기와 취향이 담겨 있어 하나만 선택하기는 너무 어렵군요.
요즘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은?
잠재적으로는 모든 것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됩니다. 제가 작업하는 모든 향수는 새로운 만남에서 비롯되고, 그로 인해 원동력을 얻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을 만나 논의를 펼치고, 이를 향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여전히 즐겁죠.
수많은 프리미엄 향수를 탄생시켰습니다. 조향사로서 훌륭한 향수가 갖춰야 할 요건은 무엇이라 여기나요?
탁월한 성분은 필수적입니다. 진귀한 천연 성분, 뛰어난 분자를 접할 수 있는 건 조향사만의 특권이죠. 물론 그 성분으로 완벽한 밸런스를 추구하는 데까지 들이는 노력과 시간 역시 중요해요. 전문 기술과 신중함, 인내심이 없다면 근사한 재료를 아무리 조합해도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들어요. 오뜨 꾸뛰르 작품, 파인다이닝의 메인 디시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비슷하죠.
세상에 남기고픈 당신만의 유산이 있다면?
향수 제조 기술이죠. 제가 훈련받은 혁신과 향수에 대한 열의를 젊은 조향사들에게 공유할 거예요. 그들이 잘 이어받아 또 다음 세대에 전파하길 바랍니다.
Savory and Sweet
미각과 후각의 상관관계는 다시없이 깊다. 입안에 넣은 음식을 미뢰가 감지하고, 후신경이 향을 확인한 순간 뇌는 두 가지 정보를 통합해 ‘맛’을 인식하고 감상한다. 자연의 식재료에서부터 입안을 달콤하게 휘감는 구르망 노트의 향수를 맡는 순간 특정한 풍미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
Diptyque
‘에디터’라는 직업은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지난 5월 말, 파리로 딥티크가 <보그>를 초대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오는 9월, 이들이 선보이는 다섯 가지 향수 이야기는 상상력 없이는 결코 들을 수 없으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난해한 일이다. 특히 꽃이나 식물에서는 더욱 그렇다. 딥티크는 실제로 향기가 없는 자연물의 향을 창조하고자 세 명의 조향사와 동맹했다. 파브리스 펠레그린, 나탈리 세토, 알렉산드라 칼린이 그 주인공이다. 혁신을 향한 도전과 투쟁으로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딥티크의 친환경 프리미엄 프래그런스 라인 ‘레 제썽스 드 딥티크(Les Essences de Diptyque)’는 다섯 가지 시리즈물로 자연에 대한 찬사를 최대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노트로 완성했다.
개혁의 포문을 여는 ‘코라이 오스쿠로(Corail Oscuro)’의 ‘코라이’는 프랑스어로 산호를 의미한다. 이 향수의 제작자 알렉산드라 칼린(Alexandra Carlin)은 “딥티크 팀이 처음 향을 의뢰했을 때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들은 산호에 대한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코로나 시기 동안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선박 운항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베네치아의 석호에서 붉은빛을 띤 산호가 다시 발견됐다는 이야기였죠.” ‘책벌레’ 알렉산드라 칼린은 다양한 문헌을 찾아보며 산호의 매력을 입체적으로 탐색했다. “최초로 산호가 발견됐을 당시, 사람들은 산호를 광물로 간주했습니다. 수생식물로 불리던 때도 있었죠. 그리고 마침내 동물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일명 ‘산호색’으로 불리는 선명한 진홍빛은 이 재능 넘치는 조향사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산호를 떠올리며 완성한 다른 예술가들의 창작물을 보자 아주 많은 아이디어가 샘솟았습니다. 이어 개발팀과 향수 개발을 진행하며 매우 연약하고 귀중한 산호의 특징에 집중했죠.” 바다의 수면과 하늘에서 비치는 환한 빛의 조화를 이뤄내는 꽃. 산호 향을 구상할 때 떠오른 막연했던 이미지가 ‘코라이 오스쿠로’로 분명해졌다.
두 번째 향수, ‘루나마리(Lunamaris)’의 출발점은 조개 속 영롱한 빛을 내는 ‘진주모’다. 개인적으로 다섯 가지 시리즈 중 가장 신비로운 향을 풍기는데, 아마 현존하는 딥티크 작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향이 아닐까 싶다. 그 복잡 미묘한 향을 구상한 인물은 파브리스 펠레그린(Fabrice Pellegrin). 2005년 출시 이후 딥티크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도손’의 아버지다. “먼저 진주모는 여러 층이 겹치며 특유의 형태와 질감, 색감이 형성된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향료를 통해 자개 위에 내리쬐는 빛의 방향, 그로 인해 드러나는 오묘한 색조를 풀어내고자 했죠.” 향료를 고를 때는 자연이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원료를 택했고, 시스투스(물푸레나무)의 앰버리로 빛나는 부드러움과 함께 핑크 페퍼의 스파이시 악센트가 살갗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 배치했다.
조향사 나탈리 세토(Natalie Cetto)는 딥티크와 첫 만남인 만큼 도전 정신이 상당하다. 일단 ‘부아 꼬르세(Bois Corsé)’라는 이름부터 특별하다. “나무껍질은 프랑스어로 ‘에코스(Écorce)’인데, 여기서 ‘꼬르세’라는 이름을 구상했어요. 진한 향기를 뿜어낸다는 표현을 할 때 쓰는 프랑스어죠. 특히 진한 커피 향을 일컬을 때도 ‘꼬르세’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그런 이유에서 커피를 향료로 사용했습니다.” 나무껍질은 특정 향이 없기에 이들은 새로운 묘안을 떠올렸다. 겉은 거칠지만 속은 부드러운 양면성과 감각적인 질감에 집중하는 것이다. “샌들우드가 이번 향수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위로 시더우드 향을 덧입히고, 나무의 거친 질감과 강인함을 브라질산 커피 노트로 풀어내 매력을 배가시켰죠. 커피 노트는 달콤하진 않아도 아주 매력적인 향이 나는데, 여기에 통카 빈 노트를 더해 잔향을 완성했습니다.”
네 번째는 나탈리 세토의 두 번째 작품 ‘릴리피아(Lily Phéa)’. 프랑스어로는 ‘네뉴파(Nénuphar)’, 즉 수련을 의미한다. 모두가 수련을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기에 그에겐 더없이 뜻깊은 작업이었다. “수련은 사실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수련의 꽃이 아니라 잎에 집중했습니다. 수련이 주는 초록빛을 떠올렸죠. 또 이미지 면에서 수련에 내재된 신비한 면모와 불교적 상징성이 차분하면서도 평화롭고, 시적인 표현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작업 내내 물 위를 유영하며 꽃 위에서 춤을 추는 수련의 잎을 상상했죠.” 또 수련은 두툼한 잎 안에 다량의 수액을 품고 있다. 쿠션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수련 잎의 텍스처를 떠올리며 제작한 ‘릴리피아’는 맑은 물 위에 떠 있는 수련의 우아한 자태를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향수 ‘로즈 로슈(Rose Roche)’의 프랑스어 표기는 ‘로즈 데 사블레(Rose des Sables)’. 모래로 만들어진 꽃송이 모양의 광물 ‘데저트 로즈’를 의미한다. 그 이름에서 사막에 피어오른 한 송이 장미가 떠오른다. 그래서 아주 동양적이고 관능미를 드러내면서도 이국적인 향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저는 데저트 로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했습니다. 사실 데저트 로즈를 만들어내는 건 바람입니다. 그래서 아주 청량하고 시원한 바람을 상상했죠.” 향을 가지고 노는 베테랑, ‘파브리스 펠레그린’다운 발상이다. 식물과 미네랄의 미묘한 조합으로 탄생한 ‘로즈 로슈’는 장미 향수의 새로운 기준이 될 준비를 마쳤다. (VK)
Embracing Curiosity
향이 없는 대상에서 ‘향’을 추출할 수 있을까? 넘치는 호기심으로 클리셰을 깨는 것, 그것이 딥티크의 도전 과제다.
- 뷰티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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