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를 갖고 노는 드라마 ‘서초동’
드라마 <서초동>(tvN)은 제작진(CJ ENM 스튜디오스, 초록뱀미디어)의 탄탄한 내공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기획, 극본, 연출, 촬영, 심지어 타이틀 타이포그래피까지 모두 완성도 높고 조화롭다. 한국 제목은 실제 법조타운의 지역명을 땄고, 글로벌 OTT(디즈니+)에서는 <로 앤 더 시티(Law and the City)>라는 제목으로 메시지의 연속성을 취했다. 사건 중심의 스릴러나 정의 구현 영웅물이 아니라 현대 도시 직업물이라는 지향점이 뚜렷하다. 서초동을 묘사하면서 검찰이 아니라 변호사를 주인공 삼았으니, 요즘 시국을 고려하면 운도 따라주는 드라마다.


<서초동>과 기존 법조물의 차이는 첫 화부터 재치 있게 각인된다. 드라마에 심취한 1년 차 변호사(김도훈)가 “존경하는 재판장님!”을 외치며 벌떡 일어선다. 긴박한 음악과 함께 그의 얼굴이 줌인된다. 법정 드라마 하이라이트에서 흔히 쓰이는 연출법이다. 하지만 곧 음악이 멈추고 앵글이 바뀌면서 리얼리즘이 펼쳐진다. 방청석에 앉은 누군가는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수군거린다. 재판장은 “좌석으로 돌아가서 마이크에 대고 말하라”, “증인 진술은 서면으로 제출하라”며 신입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경력 9년 차인 상대 변호사 안주형(이종석)은 이런 꼴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다. 법정을 나설 때, 의기소침한 1년 차에게 안주형이 충고한다. “드라마로 변론 배우지 마세요. 그리고 그 드라마는 형사 사건이잖아요. 이 사건은 민사고. 볼 거면 맞춰서 보든가.”

이쯤에서 짐작하겠지만 <서초동>의 이승현 작가는 현직 변호사다. 그렇다고 리얼리티만 강조한 게 아니라 도시, 커리어, 성장, 로맨스 등 일상 드라마의 매력은 충분히 담아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안주형과 식사 모임 동료들이 있다. 이들은 1화의 드라마킹처럼 의욕, 동정심, 정의감 넘치던 시절을 지나 일에 과몰입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데 능숙해진 인물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고객을 믿지 않는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영웅심이 없고, 사건의 승패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그보단 주식 단타로 커피 값 벌기, 블로그 관리, 점심 저녁 메뉴, 법인카드 식대 한도 따위가 중요하다.
안주형과 조창원(강유석), 배문정(류혜영), 하상기(임성재)는 마치 옛 시트콤 <프렌즈>에서 주인공들이 매일 카페에 모이듯 식당에서 만난다. 현실이라면 아무리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더라도 변호사들이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여기서 작품의 또 한 가지 노림수가 드러난다. 연출을 맡은 박승우(<파수꾼>(2017), <카이로스>(2020))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시청자의 오감을 만족시키고자 공을 들였다. 일상에서 늘 들려오던 도시의 소음, 계절의 분위기, 식탁 위에 올라간 음식을 모두 즐겨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것이다”라고 했다. <식샤를 합시다> 시리즈(2013~2018)처럼 미식이 메인은 아니지만 현대 도시 전문직의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 모더니즘 드라마에서 음식이 빠질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일상에 낙이 없는 직장인이 밥에 민감한 건 현실이다. 이 드라마의 자연스러운 ‘먹방’은 시청자의 식욕을 돋우는 동시에 주요 캐릭터들을 친근하게 만든다.


<서초동>은 이처럼 편안한 일상물의 토대 위에 ‘문제 발생 – 추리 – 은폐된 진실의 노출 혹은 논리를 통한 반전 – 해소’라는 카타르시스 구조, 정의와 직업윤리에 대한 논쟁 등 법정물의 매력도 알맞게 부려놓는다. 앞서 법정 드라마의 클리셰를 희화화하며 변별력을 강조했지만, 식사 모임에 의욕 가득한 신참 변호사 강희지(문가영)가 들어오면서 등장인물들이 클리셰에 빨려들어간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있다.
주인공 안주형은 얄미울 정도로 감정을 절제하고 선을 지키는 인물이다. 하지만 실력이 출중하고 정의감도 있다. 폭행 사건의 피고가 된 시각장애인을 변론하는 에피소드에서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의뢰인은 감추는 게 많고, 안주형은 어차피 의뢰인의 말은 안 믿을 테니 묻지도 않는다는 태도다. 대신 안주형은 조사와 논리를 바탕으로 의뢰인의 비밀을 유추해낸다. 의뢰인에게는 상처가 되겠으나 변론은 수월하게 해줄 만한 비밀이다. 안주형은 그 비밀을 이용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승소를 이뤄낸다. 고마워하는 의뢰인에게 안주형은 “있는 증거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유리한 사실을 만들어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답한다.


유능하고 감정 없는 인물은 최근 한국 직업물에서 흔히 보이는 캐릭터다. 이종석은 그 무감함을 겉멋이나 위악, 과도한 자기방어 기제가 아니라 현실주의처럼 보이도록 깔끔하게 연기해낸다. 하지만 아직 경력이 짧은 희지는 안주형을 오해한다.
저축은행이 채무자의 공공임대주택 보증금을 차압하려는 사건에서 안주형이 은행 측을 대리하자 강희지는 그를 비난한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오갈 데 없게 만드는 파렴치한 변호사라는 거다. 하지만 안주형은 그 나름대로 공공임대주택 담보 대출 회수를 어렵게 만들면 은행이 이들에게 아예 대출 자체를 안 해줄 거라 염려한다. 둘의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특히 사회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섣불리 정의와 불의를 판단해선 안 된다는 안주형의 철학이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다만 이번에는 안주형이 관련 판례를 알고도 판사를 속이려 한지라 정의를 입에 담기 민망하다. 강희지와 논쟁를 벌인 후 안주형의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데서, 이 작품이 일종의 성장 드라마임이 드러난다.


<서초동>의 또 다른 매력은 시청자에게 요령 좋게 수수께끼를 던진다는 점이다. 극 초반 식사 모임에 처음 참석한 강희지는 자신이 안주형을 잠깐 만난 적 있다, 홍콩이었다, 10년 전이었다, 안주형이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만나기로 해놓고 약속을 지키기 않았다라는 정보를 시간차를 두고 제시한다. 동료들은 새로운 정보에 맞춰 둘의 관계를 이리저리 추측한다. 하상기는 “자꾸 중요한 얘기를 뒤에 하시네. 이야기꾼이야”라고 눙친다. 이 드라마의 서술 방식도 강희지 스타일이다. 안주형이 강희지를 기억하는지, 둘의 재회가 엇갈린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가 강희지를 모르는 척하는지 등의 정보 제공이 지연되면서 로맨스에 긴장감이 생겼다.
2화에서는 건물주 김형민(염혜란)이 층층이 입주한 법률회사 사장들을 불러 모아 합병을 권하면서 새로운 궁금증이 생긴다. 사장들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인데, 건물주가 왜 이런 일에 관여하는지는 속 시원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내막, 합병으로 벌어질 일, 사장들의 역할도 시차를 두고 설명된다. 여러 이야기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수수께끼가 감질난다기보다 흥미롭다.

앞서 드라마킹의 법정 데뷔 장면처럼 재치 있는 연출과 카메라 워크도 곳곳에 숨어 있다. 강희지가 식사 모임에 처음 등장할 때 파란을 예고하듯 지진이 벌어진다거나, 건물주의 제안을 받고 야심에 불타오르는 사장의 마음을 안경에 비친 벽난로 불꽃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심드렁한 어조로 말하지만 은근히 유머 성공률이 높은 사람들이 있다. 이 드라마가 그렇다. 수작이 될 기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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