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빈, 기쁨은 기꺼이, 슬픔은 오해 없이

2026.06.07

권현빈, 기쁨은 기꺼이, 슬픔은 오해 없이

권현빈 작가가 요즘 몰두하는 작업은 대리석이다. 남극 빙하처럼 파란 물감으로 물들인 흰 조각품이 가득한 작업실에서 만난 30대 작가의 일상과 조각적 태도에 대하여.

작업복으로 점프수트를 즐겨 입는 권현빈 작가. 조각가인 부모님이 작품 활동을 하던 이곳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돌가루를 만지며 놀았다.

권현빈의 파주 작업실은 그야말로 조각 공원이다. 부친 권석만과 모친 차현주 역시 조각가이며, 온 가족이 공장을 개조한 건물을 작업실로 같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마당에서부터 대형 조각과 대리석이 가득하며, 햇빛이 잘 드는 건물 가장 안쪽이 권 작가의 작업실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권 작가가 이곳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는데, 요즘 완전히 작업에만 빠져 사는 생활을 만끽하는 중이다. 그녀는 제25회 송은미술대상전과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열린 제1회 서울조각페스티벌 전시에 선보인 하늘색으로 물들인 돌조각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주로 대리석을 이용한 조각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녀의 조각 형태는 현대적이지만, 전통적으로 조각가들이 사용하던 대리석을 주로 이용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작업실에서 만난 그녀는 이자벨 마랑의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다.

점프수트 차림으로 작업 중이다. 즐겨 입는 패션 스타일은?
특별히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를 누르는 옷보다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고 크게 웃어도 괜찮은 옷을 주로 입는다. 작업실에서는 점프수트를 즐겨 입는데, 이자벨 마랑은 점프수트를 잘 만드는 브랜드라서 눈여겨본다. 패션 스타일이 있다기보다는 그날그날 눈에 들어오는 대로 입는 편이다. 요즘 꽂혀 있는 신발 브랜드는 블런드스톤이다. 운동화보다 편해서 한여름만 빼고는 거의 매일 이 부츠를 신고 있다.

근황이 궁금하다. 요즘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나?
패들러스의 기획으로 12월에 열릴 판화 단체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나처럼 판화 베이스가 아닌 작가들이 참여하는 실험적 프로젝트다. 예전에도 오종 작가와 판화를 전시한 적이 있다. 탁본을 해본 적도 있기에 돌과 판화를 어떻게 접목할지 고민하는 중이다. 판화도 조각처럼 기술이 필요하고 새롭게 배워야 할 부분도 있어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부모와 작업실을 공유하고 있다. 선배 조각가이기도 한 그들에게서 받은 영향은 무엇인가?
작업실에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이 아닐까? 대리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부모님이 몇 년간 작업할 때도 동행했는데,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희미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늘 작업실에 있어서인지 편안하고,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2012년에 부모님은 이곳에 정착했고, 나는 2018년부터 같이 작업실을 쓰기 시작했다. 조각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학원에 다닐 때도 작업을 계속하면 조각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어느새 조각가가 되어 있었다. 여러 전시를 하고 있지만, 사실 미술가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늘 부모님의 작업실에서 심심하게 있으면서 돌가루를 가지고 놀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심심한 것을 좋아한다.

최근 선보인 전시에 대해 소개해주기 바란다. 어떤 작품과 전시가 대표작과 대표 전시인가?
지난 2024년 열린송현녹지광장에 설치한 조각이 기억에 남는다. 45m에 이르는 길에 대리석 조각 16점을 설치하고, ‘스카이 플러스’로 명명했다. 돌과 하늘이 만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 재미있었다. 미술관에서는 조각품을 가까이하기가 어려운데, 사실 돌은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만지고 싶어지는 재료다. 작품을 살짝 만지고 싶은 관람객을 배려해 동글동글하게 깎은 부분이 있다. 반면에 돌은 깨지는 것이 불안하면서도, 깨졌을 때 해방감도 있는 소재다. 여러 조각가와 열린송현녹지광장이라는 멋진 장소에 작품을 설치한다는 것이 흔치 않은 기회여서 좋았다. 조각이라는 것 자체가 홀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공간에 기대는 부분도 분명히 있고, 공간과 상호작용을 한다.

관람객이 작품을 만지는 것은 조각가에게 실례일까?
사실 작품을 만지면 기름때가 묻곤 한다. 하지만 만지고 싶으면 살짝 만져도 되지 않을까?(웃음) 물론 어떤 때는 작품을 잘 지키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깨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때그때 성실하게 반응하면서 살려고 한다. 조각가로서 내세우는 원칙은 거의 없다.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외에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후회하지 않고 잘 지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데, 모든 것을 마음대로 다루겠다고 여기면 과제가 너무 많이 늘어난다. 작업만 열심히 하기에도 “내 코가 석 자”라서, 고민을 미리 소거하는 것이 좋다. 누구나 컵 안에 소용돌이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터득한 생존 기법이다. 돌을 깎을 때도 깨져서 떨어지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 그 모양대로 받아들여야 하기에, 작업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를 갖게 되었다.

빙하를 닮은 하얀 대리석 작품이 특히 눈에 띈다. ‘자연과 풍경’이 작품 세계의 키워드라는 의견에 동의하나?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겠다. 하늘과 산을 자주 보는 것은 사실이다. 자연은 내 삶의 큰 요소이며, 여름이면 텃밭에서 가지를 따 맛있게 먹는 태도가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전면적인 주제냐고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하늘을 보는 것일 수도 있고, 하늘을 보는 나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조각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하늘을 보듯 돌을 보며, 재료와 접촉하는 순간이 좋아서 작업을 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좋은 작품을 보면 시간이 금방 가는 것처럼 보기만 해도 충분한 순간이 있고, 아직은 주제가 분명하지 않아서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면 쉽지 않다. 기회와 적절한 전시 장소가 있으면, 그간 원했던 작업을 하고 싶다.

각종 대리석과 스티로폼, 돌 등을 늘 쌓아둔다. 작가는 재료와 접촉하는 순간이 좋아서 작업을 한다.

여러 종류의 대리석을 사용한다. 전통 조각 재료로 새로운 현대 조각을 만든다는 관점으로 해석해도 될까?
스티로폼과 스펀지 작업도 했다. 요즘은 돌 작업을 하느라 다른 재료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지만,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스티로폼에 잉크를 스미게 해서 물성을 드러내기도 했기에, 그런 점에서는 대리석도 그 연장선이다. 나에게는 하늘, 스티로폼, 돌이 모두 비슷하다. 재료라는 점에서 차이가 별로 없다. 하늘에 구름이 떠 있듯, 돌이 깨져서 먼지가 되는 일이 뭐가 다를까? 대리석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돌은 힘이 세다. 돌은 반짝이고 우아하면서 매정하지만, 사실 그냥 돌이다. 의미나 감정을 투영하려고 해도 돌이 그런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매정하고 무심하다. 그렇긴 해도 돌은 모든 것을 머금어주는 재료다.

작가에겐 하늘, 스티로폼, 돌이 재료라는 점에서 차이가 별로 없다. 하늘에 구름이 떠 있듯, 돌이 깨져서 먼지가 되는 일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재료의 물성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서 비롯됐나? 재료는 어떻게 선택하며, 영감을 어떻게 배치하는지 궁금하다.
계획하지는 않고 스티로폼을 만지다, 스티로폼으로 추상적 형태를 만들며 멋을 너무 부리는 것 같다고 느껴지면, 멋을 부리지 않게 하는 재료를 떠올린다. 재료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은 계획적이지 않다. 자연스럽게 하게 되거나, 어느 공간이나 어떤 분위기를 가늠해보다 아이디어가 발전하기도 한다. 전시장이 결정에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전시를 위한 작업을 많이 하진 않지만, 공간은 많이 염두에 둔다. 공간에 따라 조각이 예민하게 바뀌기에 고민이 많아지는 것이다.

두산갤러리의 기체 전시에서는 대리석 조각을 벽에 건다는 개념이 재미있었다.
조각의 형식을 바꾸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돌을 마주 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벽에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시도했다. 정확히 말하지 않지만 흥얼거리는 돌의 얼굴을 보기 위해 벽에 거는 것도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 낙차를 좋아한다. 무겁지만 가벼움을 보게 하는 것. 돌에 햇빛이 비치며 하얀 대리석이 반짝이는 순간은 무겁지 않다. 그런 것처럼 붕 떠오르는 분위기를 벽에 거는 것이 돌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돌의 성격이나 옆모습은 가벼울 수 있겠다고 느꼈다.

두산갤러리 전시에서 “흥얼거리는 돌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작품을 벽에 걸었다. 작가는 무겁지만 가볍게 보는 시선을 좋아한다.

조각가로 불리기를 기대하나? 미술가와 조각가 중 정체성이 궁금하다.
그 분류가 어떤 이미지를 만드는 건 사실이다. 조각가로 불리지 않을 이유가 있나(웃음)? 예를 들어서 작가가 다른 어떤 존재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상한 관념을 가지고 불리는 것이 아닌 이상, 나는 조각가인데 여성일 뿐이다. 어찌 보면 오래된 것들을 다뤄서 이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 있다. 돌도 오래되고, 조각도 오래된 장르다. 뭔가 깎고 연마하는 행위도 오래되었기에, 그것에 기대면서 기분 좋게 지내는 것을 즐긴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지금 하는 작업에만 푹 빠지는 것은 아닌지, 고민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래된 것이 주는 어떤 조응이 하늘을 보며 둥둥 떠 있는 기분을 돌과 조각이라는 뿌리로 잡아주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기분을 유지하면서 깨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한다. 그런 점에서 조각을 계속하더라도,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더 이상 작품이 아닐 수 있다. 돌 더미를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부분이 어렵다. 시간과 힘을 들여 삶을 살고 조각을 하는 건데, 쓰레기를 만들 수는 없다. 이는 모두가 대면하는 문제일 것이다.

여성 작가는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연약하기에 조각가로서 불리하다는 것에 대한 의견은?
조각 자체가 어렵다. 남녀의 차이보다 조각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물론 신체적으로 힘이 부족하기에 더 건장한 사람이었으면 한다. 하지만 크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조각도 분명히 있고, 물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조각을 본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힘이 필요하면 장비도 있고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 방법은 많다. 그렇게 해서 그 작품이 의미를 지니는지가 오히려 더 문제다.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건강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할 수 있다면 할머니 조각가가 되고 싶다. 쉬운 일은 아니다. 작업실에서 하루하루 지내는 일상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삶이면 좋겠다. VK

김나랑

김나랑

피처 디렉터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매번 배웁니다. 집에 가면 요가를 수련하고 책을 읽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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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디렉터
    김나랑
    이소영(미술 전문 저널리스트)
    사진
    이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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