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한걸음

드라마 〈아이리스 2〉의 첩보국 여성 리더와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수더분한 아내로 극과 극의 이중적인 매력을 보여줄 배우 오연수.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쿨하고 시크하게 제 몫의 최선을 다하는 그녀야말로 현대 사회가 원하는 ‘콜드 플레이’의 달인이다.

하이네크 라인의 화이트 셔츠는보브. 크리스털 링과 브레이슬릿은스와로브스키, 가죽 뱅글은 페르쉐,이어링은 제이미앤벨.

15년 넘게 가족처럼 지내온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경민 원장 말로는 연수 씨는 생각이 시크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소녀처럼 여리여리하고 감성적으로 보이지만, 과감하고 다혈질이고 뒤끝 없는 반전의 여인이라고….
전 아주 심플한 사람이에요. 자잘한 고민을 안 해요. 큰 일도 별 고민 없이 툭툭 해치우는 편이고, 그래서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요.

여배우에게 흔치 않은 특이한 성격이네요.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는 거죠.

가령 오늘 촬영 컨셉이 틸다 스윈톤이다,라고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어? 그런가? 알아서 잘 해주겠지.

따지고 재는 게 없군요. 어떤 대접을 받아야겠다거나 어떤 평가를 듣고 싶다거나.
남이 나를 평가하는데 왜 내가 좌지우지돼야 해요?

정말 불필요한 고민이 없으시군요.
고민이 오면 지워버리는 편이에요.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거죠.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어제 왜 그랬을까 후회도 없고, 내일 어떻게 될까, 걱정도 없어요.

그게 이 시대 멘토들이 끝없이 부르짖는 ‘삶의 평화’의 핵심이에요. 정작 오연수가 보는 오연수는 어떤 여자인가요?
전 감성적으로는 이중적인 사람이에요. 내 안에 두 가지 모습이 충돌할 때가 많아요. 그리고 나만 아는 개인주의자라서 남에게 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그동안 특별히 시련이 없었다는 건 자기 관리가 잘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겠죠?
대박도 없었고 슬럼프도 없었고, 가늘고 길게 왔죠. 참 지루한 인생이에요. 하하. 출연했던 드라마도 잔잔했고, 제가 부러 어떤 이미지를 만든 적도 없어요.

40대에 전성기를 누리는 기분이 어떤가요?
일이 많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성과가 있어야죠. <아이리스 2>는 방송하는 날이 다가오는 와중에〈남쪽으로 튀어> 개봉 일도 잡혔어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어요.

영화가 15년 만이라니, 믿어지지 않았어요. 내공 깊은 중년 여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더군요. 김희애 씨도 1993년 <101번째 프러포즈> 이후에는 영화 출연이 없었고, 윤석화 씨도 작년에 개봉한〈봄날>이 24년 만의 영화출연이었어요.
저도 일부러 영화를 안 한 건 아니에요. 영화계가 결혼하고 아기 낳은 여배우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애매해 한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전 이번이 일곱 번째 영화예요.

<게임의 규칙> <불새>… 다 90년대 멋진 누아르 영화였어요. 2000년대 현장에 적응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놀랐어요. 필름도 안 갈고 디지털 칩으로 하던 걸요. 촬영하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편집해서 보여주고…. 그리고 감독의 전지전능함도 덜해졌죠. <남쪽으로 튀어>에서 보니 김윤석의 연기가 정말 튀더군요. 반면 저는 절대 튀지 않아요. 저는 남편의 조력자일 뿐이죠.있는 듯 없는 듯 서포트하는 게 내 몫이라 생각했어요. 결혼 전엔 ‘안다르크’라는 별명을 가진 운동권 여학생이었지만, 결혼 후엔 무조건 남편의 행동을 지지하는 여자죠.

존재감이 없어 보일 수 있겠어요.
전 그림자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너무 욕심이 없어 보이네요.
영화가 하고 싶었다는 게 제 욕심이죠.

오쿠다 히데요의 원작에선 아들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잖아요. 이건 아빠의 시선으로 구성돼 마치 <완득이>의 건달 선생님을 연기했던 ‘김윤석의 2탄’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완득이> 때보다는 사회성도 짙고 훨씬 통쾌할 거예요. 제목처럼 정말 이 사회의 부조리가 체질적으로 안 맞아서 가족이 함께 남쪽 섬으로 튀어버리거든요.

누드 컬러 보이수트는 버버리프로섬, 블랙 드롭 이어링은제이미앤벨.

“대한민국 국민이면 꼭 국민연금 내야 합니까?” “TV도 안 보는데 TV 수신료는 왜 내야 합니까?” 김윤석의 대사는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하지만, 실제 직업도 없이 문제만 일으키는 남편이라면 아내 입장에서 길에 내다버리고 싶지 않을까요?
골칫덩어리 진상이죠. 그런데 또 저는 그 사람을 묵묵히 지지해요. 그런데 그게 설득력이 없진 않을 거예요. 대학 시절 전 그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거든요.

실제 대학 시절엔 어땠나요?
운동하는 대학생들…, 이해 못했죠.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고교 1학년 때 CF 모델로 데뷔해서, <춤추는 가얏고>로 이름이 알려지고, 그 후 20대 시절엔 무조건 돈 벌려고 연기를 했어요. 쉬는 날도 없어서 왜 해야 하나 푸념만 하고 살았어요. 보람을 느낄 틈도 없었고. 제가 집안의 가장이어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어요.

채시라 씨도 최진실 씨도…. 당시엔 그런 소녀 가장 연예인들이 많았어요.
그렇죠. 30대에 결혼하고 내 가정이 생기면서 그제서야 일하는 현장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돈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하니까 돈이 모이는구나, 일하는 맛을 알았죠.

계기가 된 작품이 있었나요?
<달콤한 인생>이 좋았어요. 김진민 감독이 배우 김여진 씨 남편인데, 배우를 연기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요. 어르고 달래서… 커트 머리도 그분이 설득해서 하게 됐어요.

여배우가 커트를 하기는 쉽지 않은데, 오연수 씨에겐 이제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처음엔 망설였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줘서 다행이에요.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 중에 김희애 씨는 김수현 드라마 쪽으로 강하게 어필했고, 김남주는 똑 부러지는 미시족으로 이미지가 잡혔는데, 오연수 씨는 그에 비하면 일관된 패러다임이 없어요. 고전미와 도회적인 미를 동시에 갖고 있어서인가요?
저는 매년 쉬지 않고 드라마를 했어요. 애 엄마부터 못사는 여자, 잘 사는 여자 두루두루… 정말 고정된 이미지가 없었어요. 예전엔 단아한 고전 미인이라고들 해서 그게 너무 싫었는데, 이젠 또 절더러 도시 여자라고 하니 저도 그게 신기해요.

배우로서 지향하는 어떤 목표가 있나요?
진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연기
를 하는 게 최선이라고 봐요. 완벽주의자까진 아니더라도 전 현장에서 찜찜하게 넘어가는 걸 싫어해요. 매사 긍정적이고 아무 생각 없다가도 현장에 가면 사람들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써요. 기회가 된다면 노희경 작가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분 드라마가 시청률은 안 나오지만 명작이잖아요.

젊은 남자, 중년 남자… 고루 연기를 해오셨는데, 40대 여배우가 바라보는 청년과 중년의 매력은 뭐죠?
나이 어려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 있고, 나이 들어도 철없는 남자가 있어요. 요즘엔 나이 하고는 아무 상관없더라구요. 그냥 그 사람 자체의 매력이죠.

블랙 재킷은 이상봉, 화이트드레스는 랄프 로렌 컬렉션,화이트 뱅글과 이어링,초커는 모두 제이미앤벨.

김윤석 씨는 어땠죠?
그분은 되게 열심히 하세요. 영화에 애정이 정말 강하고 인물에 몰입하려는 노력이 대단해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특히 연기 안 하는 것처럼 연기할 때는 너무 멋져요.

그런 부분에 갈증이 있나요?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늘 있죠. 나이 들수록 겁도 많아지고.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나 혼자 풀어야 하는 숙제라는 게 부담이죠. 작품 들어갈 때마다 신인이 되는 기분이에요.

언제 행복을 느껴요?
전 사소한 일에 행복해 해요. 밤이 되면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잠이 드는 걸요. 전 이뤄질 수 없는 헛된 꿈을 안 꿔요. 욕심도 크게 없고요.

그런 기질은 엄마에게 물려받은 건가요?
아뇨. 엄마는 걱정이 많으세요. 저하고는 달라요. 요즘엔 연세가 드셔서 저한테 섭섭해 하는 게 더 많아지셨는데, 전 그때도 그냥 모른척 해요. 엄마는 엄마 삶을 살고, 전 제 삶을 사는 거니까요.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어머니가 잭팟을 터뜨리셨잖아요. 그래서 항간에선 손지창·오연수 부부는 앞으로 일 안 해도 돈 걱정은 없겠다, 그랬어요.
라스베이거스에서 잭팟을 터뜨린 사람은 엄마예요. 저희는 그 일과는 금전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지요.

놀라운데요?
전 결혼해서 집을 나올 때도 따로 제 돈을 안 챙겨 나왔어요. 왜냐하면 엄마도 살아갈 ‘몫’이 필요하니까요. 그런 부분에선 서로 정확하고 안달복달하지 않아요.

흥미로운 가족이네요.
가족은 각자 서로 피해주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공동체여야 해요.

<남쪽으로 튀어> 영화 속 최해갑 씨네 가족과는 다른데요?
최해갑 씨네 가족도 냉정해요. 부부가 피신해서 가는 상황이긴 하지만, 아이들을 두고 ‘엄마 아빠는 떠난다’ 하고 쿨하게 가버리거든요. 전 제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얘기해요. “니 인생은 너의 것이야. 엄마는 어드바이스를 해줄 뿐이지.” 큰애가 중학생인데 밤늦게 공부하면 전 불을 꺼요. 공부 한 시간 더 한다고 인생 달라지지 않는다고. 피아노나 기타도 아이가 배우고 싶다고 하면 그 즉시 좋은 선생님을 구해줘요. 그런데 하기 싫다고 하면 다음날로 끊어버려요. 관심을 갖고 챙겨주지만, 그 책임도 아이가 지도록 교육시켜요.

아이들 엄마라서 할 수 있는 역도 있지만 반대로 그래서 할 수 없는 역도 있겠죠?
노출이나 욕설이 있는 배역은 안 하려고 해요. 큰아들은 그게 드라마라는 걸 이해하는데, 둘째 아들은 초등학생이라 그런지 남자랑 뽀뽀하는 것도 싫어하더라구요.

스스로에게 어떤 잠재력이 있다고 느끼나요?
그런 말은 좀 거창해요. 제가 원체 실망하기 싫어해서 멀리 안 보고 헛된 꿈 안 꾸거든요. 현재 하는 드라마 <아이리스 2>를 잘 이끌어 나가야겠다, 긴장 늦추지 말고. 그런 의지라면 의지가 있는 정도죠.

<아이리스 2>에서 맡은 첩보기관 부국장 역할은 중년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배역이에요. 미국 펜타곤 출신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출신의 여성 리더라니…. <공동경비구역 JSA>의 중립국 요원 이영애가 떠오르더군요. 미국 드라마 <24>의 첩보국도 연상되고요.
이 나이에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운이죠. 대통령과 맞대면할 정도로 힘이 강해요. 전 주로 지시만 하는데, 절대 목에 힘을 주지 않아요. 부드럽게, 제 스타일대로 한없이 부드럽게 갈거예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