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존감 <2>

〈내 딸 서영이〉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이보영. 약해서 민폐 끼치는 상투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운명을 개척하고 주변을 성장시키는 타이틀 롤을 소화한 그녀, 이 아름다운 자존의 여배우를 〈보그〉가 만났다.

볼레로 재킷과 슈즈는 샤넬(Chanel),블랙 레이스 원피스는 모스키노(Moschino),실버 네크리스는 벨앤누보(Bell&Nouveau).

국문과 출신에 책도 많이 읽는다죠? 책 이야기 좀 해봐요.
내 인생의 책이라면 <어린 왕자>, 그리고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또… 음, 고전도 종종 다시 읽는데 <테스>가 좋았어요. 김형경 소설은 심리학적인 기반이 있어서 ‘나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구나’를 알 수 있고, <테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 중심의 사고로 이뤄진 세계에서 느껴지는 ‘여자라는’ 벽 때문에 공감이 가요.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에 조인성의 첫사랑 ‘현주’로 나왔을 때가 생각나네요. 아주 강단 있어 보였어요.
강단이라기 보다는 제가 겁이 없어요.

그동안 당신을 겁먹게 하는 감독이 없었나요?
윤종찬 감독하고 <나는 행복합니다> 할 때는 좀 고통스러웠어요. 다들 윤 감독님 영화 한다니까 저한테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그랬어요.(웃음)

그분은 배우를 궁지로 몰고 가서 기를 뽑아내는 스타일이죠.(웃음)
현빈 씨가 정신병자 역할이고, 제가 정신병동 간호사 역할이었는데, 현빈 씨는 과대망상 환자인데도 오히려 행복하고, 제가 점점 미쳐가는 스토리였어요. 감독님이 저를 괴롭히면서 벼랑 끝까지 몰고 갔어요. 현장에서 의자에 앉지도 못했어요. ‘똥배우’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었죠. 감독님 때문에 괴로워서 밤마다 가위에 눌렸는데, 그래도 그분이 밉지는 않았어요. 저한테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아니까.

대단하네요! 힘들긴 해도 미워하진 않았다니….
그렇게 단련되니까 원태연 감독(시인)하고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할 때는 날아다녔죠.

그 현장에선 여배우로 존중을 받았나요?
감독님이 처음엔 친근한 척 반말을 하시길래, 소주 두 잔 글라스에 따라 마시고(참고로 전 술 못해요), 그랬어요. “왜 저한테만 반말하세요?”

얘기를 들어보면 사랑에 낭만적으로 도취되는 성격은 아닌 듯하네요.
사랑보다는 계절에 도취돼요. 꽃망울이 터질 듯 말듯 하는 봄이 되면 정신을 못 차려요.

이번 겨울은 너무 길어서 정말 꽃이 필까 싶기도 해요.
그런데 전 이번 겨울엔 봄이 안 기다려져요. 왜냐면…, <내 딸 서영이> 드라마 찍는 게 너무 좋아서, 이 겨울이 좀 천천히 갔으면 해요. 이젠 첫사랑 이미지를 넘어섰다고 보나요? 신뢰 가는 사람, 쭉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요.(웃음)

전도연 씨나 전지현 씨처럼 도전적인 배역에 대한 야망은 없나요?
전 제가 행복한 게 좋아요. 즐겁게 일하는 과정이 더 중요해요.

랩으로 여미는 미니 원피스는 봄빅스(Bombix),그린 슈즈는 왓아이원트(What I Want).

자존감이 튼튼해 보이네요.
존중받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연예인 생활이 화려한 것 같지만 의외로 존중을 못 받아요. 밥 먹을 때 휴대폰 카메라 들이대는 분도 계시고. 직업이라 어쩔 수 없지만…, 다들 존중받고 싶다는 기본 욕구가 있잖아요. 그러려면 우선 내가 나를 존중해야 하죠.

한 개인의 자존감은 부모님이 키워주시는 경우가 많죠.
엄하고 바르게 키워주셨어요. 그런데 그러려면 날 연예인 시키지 말았어야지.(웃음) 엄마가 밀어주셨거든요. 내가 초반에 그렇게 부딪히고 힘든 게 따지고 보면 다 가정 교육 탓이었어요. 내가 몸으로 부딪혀서 깨닫기까지 고생을 좀 했죠. 그래도 엄마한테 감사한 게 내가 20대 후반에 방황할 때 그냥 내버려두셨어요. 미친 듯이 돈 쓰고 쇼핑하고 그럴 때도 놔두시더라구요. 예전 같으면 카드 잘리고 머리 깎였을 텐데.(웃음)

인생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 중 가장 자랑스러운 걸 꼽아볼까요?
당연히 드라마 <내 딸 서영이>를 한 거요. 쉬지 않고 달려와서 제 나이가 이제 서른 다섯인데, 서영이는 마흔 돼서는 못할 역할이었어요. 결혼하기 전까진 열심히 하자,는 결심이 섰죠. 50부작이라는 데서는 좀 망설이긴 했어요. 예전 경우를 보면 그 정도 길이면 중간에 캐릭터가 산으로 가요. 지금도 작가님이 존경스러운 게 처음 잡은 캐릭터를 끝까지 밀고 나가주셨어요. 보통 처음엔 근사하게 시작해도 타협하고 민폐 끼치는 역할로 변질되기 쉬워요. 그런데 서영이는 한결같은 캐릭터죠.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인간을 이상적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어요. 사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잖아요. 50, 60이 돼도 성장하는 게 사람인데… 전 서영이가 사람 같아서 좋아요. 현실에 발붙인 캐릭터라는 점이. 저희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는 처음엔 제각각 불완전하지만 모두가 성장을 하는 역할이에요. 전 그게 사랑스러워요. 이런 대사가 생각나네요. “그렇게 단정적으로 남의 인생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딸 서영이>를 하면서 보영 씨 스스로도 성장을 했을 거예요.
더 성장해야죠. 전 사고가 편협해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죠. 예전에 드라마 대사를 할 땐 속으로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래? 어떻게 뻔뻔하게 이런 대사를 해?’ 그랬거든요. 서른 넘으니까 세상에 희한한 사람이 많구나, 드라마 같은 일이 정말 많구나, 알게 돼요. 예전엔 ‘왜 저래?’ 했던 마음이 이젠 ‘그래, 저럴 수도 있겠다’로 바뀌어요.

어른이 되어 가는 거죠.
제 나이는 이미 어른이잖아요.(웃음) 그런데 아직도 실수하며 살고, 그걸 조금씩 줄여나가는 정도예요. 그게 사람인 거죠. 제 나이 때 엄마를 생각하면, 아! 엄마도 뭘 잘 모르면서 날 키웠겠구나, 싶어요.

앞으로 어떤 여자가 되고 싶은가요?
중심을 잘 잡고 싶어요. 저한테 가장 큰 과제예요. 최근에 관심을 많이 받으니까 좀 무서운 마음이 들더라구요. 과거 사진도 들춰지고. 13년 전 우연히 <사랑의 스튜디오>에 나온 사진이 공개되고, ‘얼굴을 갈아엎었네’ 이런 멘션도 달리는 거 보면 황당해요. 아마 다들 13년 전 자기 사진 보면 촌스러워서 마음이 달라지실 거예요.(웃음)

좋은 건 좋은 것대로, 창피한 건 창피한 것대로, 들춰내서 가십을 만드는 게 미디어의 본능이에요. 유명해지면 질수록요.
알면서도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아요. 사람들이 왜 나한테 악의적이지? 내가 밉상인가? 그래서 요즘엔 결심을 했어요. 드라마 끝날 때까지 맘껏 즐기자. 시청률이 43%넘었는데, 제가 이렇게 시청률 높게 나온 적이 없었어요. 이거 끝나고 다음 작품할 땐 그 허탈과 결핍을 어떻게 견딜까 벌써부터 걱정도 되고. 그래서 마음을 계속 다잡아요. 저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해요. 전 제가 행복해서, 하고 싶어서 배우를 하고 드라마를 해요. 인생 밸런스를 잘 맞춰서 살고 싶어요. 적어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소중한 날 놓고 살진 않겠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