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조건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를 아내로 둔 남자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여성이자 까다로운 디자이너를 외조하는 남편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시인 문정희는 남편을 밥동무이자 전투의 적으로 다뤘지만,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남편이란 존재는 든든한 파트너이자 아이디어를 주는 영감의 뮤즈, 선의의 경쟁자다. 잘나가는 여성 디자이너에게 꼭 따라오는 외조의 왕들. 성공한 디자이너들의 남편이 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Fellowship of Fashion
지난 런던 패션 위크에서는 예상치 못한 패션쇼가 열렸다. 록 페스티벌이나 장마철에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장화 브랜드 ‘헌터’가 기성복 컬렉션을 발표한 것. 인공우가 쏟아진 무대 끝에 등장한 디자이너 역시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스텔라 맥카트니의 남편으로 유명한 알레스데어 윌리스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격으로 피날레에 인사를 한 것. 잡지 <월페이퍼>, 가구 브랜드 ‘이스태블리시드앤선즈’ 창립자이자 던힐을 비롯한 패션 브랜드의 컨설턴트로 지내던 윌리스가 처음으로 패션 디자인에까지 손을 뻗쳤다. 제대로 패션을 공부한 적이 없는 그가 헌터를 맡게 된 건 아마 아내인 맥카트니의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 덕분 아닐까. 부부가 동시에 디자인하는 커플은 가끔 존재했지만(AF 반더보스트, 프린, 클레멘츠 리베이로 등등), 각자 자기만의 디자인에 몰두하는 부부 디자이너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프랑스 아가씨들을 대변하는 디자이너 이자벨 마랑의 남편이 프렌치 시크 스타일의 멋진 가방을 디자인하는 제롬 드레이퓌스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카이, 아베 치토세의 남편이 ‘꼼데’ 시절 만난 일본 라벨 ‘칼라(Kolor)’의 디자이너 준이치 아베라는 것도 아는 사람만 안다. 반면 디자이너 남편 홍보에 적극적인 인물은?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세 번째 남편인 안드레아스 크론탈러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무려 스물다섯 살 나이 차를 극복한 웨스트우드(첫 만남은 교수님과 학생 사이)가 크론탈러에게 남성복을 맡긴 것. 이 연하의 남편은 하이힐을 신고 웨스트우드 광고에 출연하는 것으로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Picture Together
알렉산더 맥퀸이 돌연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은 후임자에 대해 궁금해했다. 브랜드의 아틀리에 디렉터였던 사라 버튼이 맥퀸의 뒤를 잇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이 무명의 디자이너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맥퀸 하우스에서 힌트로 남긴 건 사라 버튼의 포트레이트 한 장. 아울러 사진 크레딧으로 ‘데이비드 버튼’이라는 사진가 이름을 표기해달라는 보도 자료를 동봉했다. 패밀리 네임을 공유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데이비드는 사라의 남편이다. 처음 세상 밖으로 나서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직접 카메라를 든 것. 사진가 남편을 둔 디자이너는 또 있다. 스타일리스트이자 구두 디자이너 타비타 시몬스의 남편은 그 유명한 크레이그 맥딘, 앤 드멀미스터의 배우자는 패트릭 로빈이라는 사진가다. 뉴욕 패션계의 떠오르는 스타인이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셔먼은 최근 인테리어 사진으로 유명한 블로거 겸 사진가 토드 셀비와 약혼했고, 뉴욕 다운타운의 아이콘인 마크 보스윅은 마리아 코르네호의 남편!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를 이끌게 된 2000년대 스타 디자이너 루엘라 바틀리의 남편은 인기 절정의 사진가 데이비드 심스다.



Creative Field
공식 석상을 제외하곤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는 셀린의 피비 파일로. 우연을 가장한 채 그녀와 마주치기 위해선 런던의 뉴 본드 스트리트에 자리한 맥스 위그램 갤러리로 향하면 된다. 남편이자 갤러리스트인 맥스 위그램이 운영하는 ‘맥스 위그램 갤러리’에 그녀가 종종 모습을 드러내곤 하니까. 갤러리 소속의 마린 위고니에와 루이즈 제르비니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에서 셀린 컬렉션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않다. 도버 해협을 건너 파리의 튀렌 거리에 자리한 ‘갈레리 프랭크 엘바즈’에서도 멋쟁이 디자이너를 만날 수 있다. 바네사 브루노의 남편이자 아트 딜러인 프랭크 엘바즈가 운영하는 갤러리다.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의 남편도 있다. 클로에를 디자인하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남편 피터 켈러는 건축가다. 그는 부인을 위해 안식처였던 런던을 떠나 파리로 옮길 정도니, 미스터 켈러야말로 헌신적인 디자이너 남편의 롤모델 아닌가.



Business Ally
파리의 꼼데가르쏭 쇼장에 가도 레이 카와쿠보는 머리카락이라도 보일세라 백스테이지에 꽁꽁 숨어 있다. 그녀 대신 쇼장 곳곳을 누비며 기자들과 바이어들에게 안부를 묻고, 또 디자이너 대신 컬렉션에 대한 힌트를 전달하는 인물은 따로 있다. 카와쿠보의 남편이자 사업 파트너 아드리안 조프. 서울에 첫 단독 매장을 열었을 때도 카와쿠보 대신 기자들과 식사하고 직접 매장을 안내했던 그는 사회성이 결핍된 아내를 대신해 거의 완벽에 가깝게 외조를 한다. 이토록 전면에 나서서 아내의 일을 돕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밀라노 여제의 남편은 끈끈한 가족 사랑으로 회사 일에 전념한다. 마르니의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 뒤에는 남편이자 CEO 지아니가 버티고 있으며,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전남편 폴 벡은 여전히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 또 미우치아 프라다는 불독처럼 자신을 지키는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덕분에 맘껏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뜨거운 사내 연애를 즐긴 커플도 있다. 구찌의 프리다 지아니니와 구찌의 새 CEO로 임명된 파트리치오 디 마르코는 연인 사이다. 사랑이 가득한 회사에서 일하는 건 직원들에겐 그래도 축복 아닐까? 물론 디자이너와 회장님이 부부 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직원들에겐 지옥 같은 하루가 펼쳐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