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패션도 소비되는 시대, 컨슈머 꾸뛰르

최근 패션계 진풍경 하나. 패스트푸드를 우물거리며 대형 할인 마트로 가서,
카트에 물건을 쓸어 담고 생활용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영화를 보러 간다?
바야흐로 하이패션도 쉽게 소비되는 시대!

청담 SSG 푸드마켓에서 진열대의 과자들과 한 몸이 된 컨슈머 꾸뛰르 차림의 모델들. 스낵 포장지 디자인의 의상과 M 로고 핸드백은 모두 모스키노, 진주 목걸이는 샤넬, 신발은 모두 프라다.

제레미 스콧의 모스키노 데뷔쇼 직후, 바삭바삭하게 잘 튀긴 프렌치프라이처럼 선명한 노란색 M 로고가 박힌 빨간 오버사이즈 니트는 삽시간에 패피와 셀럽들에게 ‘배포’됐다. 케이티 페리, 리타 오라, 안나 델로 루쏘, 조단 던, 수주 등등. 1년에 두 차례 4대 도시에서 패션 위크가 열린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어느 맥도날드 마니아는 옷을 구하러 맥도날드 매장에 가서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이 프로모션 상품은 언제 어디서 판매된 거죠? 내가 기억하는 한 해피밀 세트에 옷이 포함된 적은 없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소장하고 싶어 하는 그 옷은 디자이너 상품이니까요. 더군다나 맥도날드의 그 어떤 프리미엄 세트 메뉴에도 불가능한 엄청난 가격표가 붙어 있습니다. 무려 108만원!

그뿐이 아니다. 허쉬초콜릿, 치토스, 새콤달콤한 과일 맛 곰 젤리 포장지 드레스(모스키노의 피날레를 장식했다)의 가격은 그 열 배 쯤 된다. 조그만 200ml 사이즈의 우유 팩 가방(올랭피아 르탱)은 100만원대, 1만원 미만으로 사 먹을 수 있는 중국 음식용 배달 박스 가방(케이트 스페이드)은 몇십만 원을 훌쩍 넘는다. 50원도 명목상으로 지불하는 슈퍼마켓 비닐봉지(아시시)를 50만원 가까운 가격에 판매한다니 경악을 금치 못할 현실이다. 이런 된장녀 중의 된장녀 같으니! 디자이너들은 대관절 왜 이런 옷을 만드는 걸까?

최신 패션 경향인 ‘컨슈머 꾸뛰르(그새 거창한 명칭까지 생겼다)’의 선두 주자인 제레미 스콧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좀 재미있게 했을 뿐이죠, 뭐.” 그러나 공작 시간에 만든 장난감처럼(색종이와 가위 대신 실크와 새틴, 금실 은실 자수 등 값비싼 소재와 수작업으로 완성됐다) 그저 유쾌해 보였던 패션은 최근 거센 사회적 저항과 반발을 마주하고 있다.



“맥도날드에서 일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안다면 패션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겁니다.” 미국 인디애나 주의 맥도날드에서 일했던 미아 브루센도프라는 인물은 영국 <데일리 메일>지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맥도날드 직원도 동의했다. “최저임금 노동자인 맥도날드 직원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옷을 사는 데 1,000달러를 쓴다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죠. 저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모스키노 지갑 하나 사기도 힘들 거예요.” 잠깐이라도 그 옷을 입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워해도 좋다. 먹고살기도 빠듯한 노동자 흉내를 내거나, 과자 포장지로 된 할로윈 의상 같은 옷에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패션은 노동과 거리가 먼 신분임을 과시하기 위해 불편한 장식들로 치장했던 신분 사회의 패션과 닮은 꼴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지식과 정보 공유의 시대에 패션이 몇백 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착각과 오해의 발로. ‘컨슈머 꾸뛰르’는 신분 과시가 아닌, 스스로를 조롱하는 자조 섞인 하이패션의 자화상이다.

좀더 진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패션의 유행은 먹이사슬 피라미드를 따라 흐른다. 개체 수와 생산량을 따지자면 피라미드 꼭대기의 상류층 육식동물은 샤넬, 루이 비통, 프라다. 초식동물은 좀더 저렴한 컨템퍼러리 디자이너 레이블. 가장 아래쪽인 분해자는 SPA 브랜드다. 그러나 디자인의 ‘먹고 먹히는’ 관계는 아래 개체가 위 개체의 디자인을 모사해 좀더 싼 가격에, 보다 많은 양을 판매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최종적으로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 시장에 뿌려지는 옷들은 패션이 아니라 공산품인 것. 그러니 모사처럼 보일 정도로 공산품 디자인을 똑같이 도용한(슈퍼마켓 선반에 올려놔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 하이패션 아이템들은 그런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자. 상상 한 무리의 헤드 디자이너를 끌고 코스트코로 향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진열대 사이를 거닐며 거만하게 손가락을 몇 번 까닥이는 것으로 디자인 컨셉 지시를 끝낸다. 그건 SPA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사진을 쫙 펼쳐놓고 반응이 좋을 만한 것들을 ‘체크’해 그대로 복제하는 방식에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 감상이 아닌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패션 위상에 대한 지독한 냉소다.

이런 패션의 민주화(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양날의 검)와 ‘컨슈머리즘’의 확산(도전적 디자인을 제시하기보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가는 패션 경향)으로 인해 평범함을 가장한 비범한 패션 ‘놈코어’가 유행하게 됐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아냐 힌드마치는 ‘반체제(counter culture)’라 이름 붙인 2014 F/W 컬렉션에서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슈퍼마켓 장면을 차용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데서 영감을 얻었죠.” 하얀 미니 드레스, 빨간 구두, 스마일 스카프를 똑같이 차려입고 동일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으로 치장한 모델들은 사이보그 공장에서 찍어 나온 복제인간 같다. 물론 손에는 다이제스티브 비스킷, 켈로그 콘푸로스트, 세제 모양 가방을 들고 있다. 영화 속 스텝포드 마을로 막 이사한 니콜 키드먼처럼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나? 쇼장에는 주디 갈란드의 노랫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걱정거릴랑 잊고 행복하자고요, 태양은 빛나고 있어요.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갑니다. 저 너머는 평화로울 거예요!”



20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패션을 따르는 데는 늘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유행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지만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전자를 ‘모방자’라고 하며 스스로는 개성이 강하다고 여긴다는 것. 그러나 후자 역시 모방과 대립되는 방식을 따랐을 뿐 그들 역시 스스로를 ‘다르거나 독특하다’로 특징짓는 또 다른 그룹일 뿐이라고 짐멜은 지적했다. 또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을 적용하면 패션 엘리트들은 패션의 기준을 정하는 최고 권위자로 그동안 하이패션과 대중을 철저히 분리했다. 이 점에서 ‘슈퍼마켓 시크’는 이전에 통용된 어떤 논리에도 부합하지 않는 듯 보이니, 분명 패션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하이패션은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을까? 놈코어를 따르기 위해 대형 할인 마트에서 생활용품과 나란히 판매되는 옷을 사 입는 것을 하이패션이라고 하긴 어렵다. 또 진짜 켈로그 콘푸로스트 박스 안에 소지품을 넣어 가방처럼 들고 다니는 것을 ‘컨슈머 꾸뛰르’라고 할 순 없다. 이 시점에서 하이패션을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할지 모르지만, 원본은 언제나 복사본보다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법. 유일한 가치는 고유한 의도(무엇을 의도했나?)와 숨길 수 없는 품질(소재와 완성도!)이다.

자, 샤넬 슈퍼마켓의 체인 스트랩을 엮어 만든 쇼핑 바구니, 은색 우유 팩 핸드백, 과자 포장지 모양의 클러치가 바보 같은가? 분명 열에 아홉은 머릿속으로 ‘저런 건 나도 만들겠어!’란 생각이 스칠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컬렉션에는 위트와 유머가 가미돼 있다. 칼 라거펠트는 샤넬이 특별한 날이 아닌 일상의 일부가 되길 원했다(라거펠트 왈, “럭셔리는 오늘날의 팝 컬처다.”). 누군가는 슈퍼마켓이 샤넬 쇼에 대중적인(저렴한) 분위기를 더했다고 개탄했지만, 중요한 건 시대적 메시지가 포함돼 있고 샤넬 공방에서 정성스럽게 제작됐다는 것. 화제가 된 모스키노 패스트푸드 니트가 제레미 스콧이란 디자인 날개를 단 것처럼 말이다. 분명 맥도날드에서 프로모션용으로 뿌린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