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청춘에 대하여

모두가 몸 좀 만들겠다고 달리는 시절에, 어떤 게으른 옛날 풍의 여자는 오래된 ‘달리기’를 생각한다.
정체불명의 것이 가슴 속을 꽉 채워서 일렁이는 지표면을 내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니,
달리니까 청춘이다.



사람들이 달린다. 스마트기기 광고 속 미국 삼촌도, 패션 화보 속 팔등신 누나도 잘만 뛴다. 내 주변 보통의 사람들마저 모두 달린다. 몸과 운동이 세련된 생활 태도의 핵심이 되면서 ‘달리다’는 뜨거운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에디 슬리먼(그간 작업한 록 뮤지션들의 포트레이트 사진을 "Sonic"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하고 있다)이 미국 <보그>와의 이메일 인터뷰에 적어 보낸 내용은 나에게 전혀 다른 의미의 ‘달리다’를 떠오르게 한다. 록 뮤지션들이 드러내는 정서를 설명하는 그 문장들 속에는 자유, 때때로의 무모함, 청춘 또는 시작하는 사람들, 부서질 듯한 연약함, 젊음 같은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단어들로부터 ‘달리다’를 떠올리는, 다소 비약적인 연상작용이 일어난 것은 아마 전날 본 영화 ‘프란시스 하’ 때문일 것이다.





흰 종이에 검은 잉크로 쓴 도시와 거리에 보내는 러브 레터이자 여자들의 청춘에 관한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정서적인 동조가 가장 크게 일어나는 장면은 주인공이 뉴욕 거리를 달리는 씬들이다. 무용수(그러니까 말이나 문자, 노래, 그림이 아니라 몸의 언어를 쓰는)인 프란시스는 영화 속에서 내내 길을 달리고, 걷고, 춤춘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처럼 달리고 싶어하고, 나 같은 ‘오래된 사람’은 가을이 시작되는 밤에 불현듯 아주 많이 달리던 18살 때가 떠오른다. 고3, 키 순서대로인 반 번호 6번인 나는 5번인 ‘경희’와 함께 밤색 플레어 스커트 교복을 입고 1993년 내내 이유도 없이 달렸다. 마룻바닥 복도를, 보라색 꽃이 피는 등나무 아래를, 아름드리 나무가 줄지어 선 테니스 코트 언저리를, 머리 위에 커다란 하늘 밖에 없는 운동장을, 친구의 화실까지 가는 1930년대에 지어진 식민지 풍 건물의 뒤편을. 그리고 그 달리기는 바다를 보겠다고 소나무 숲길을 함께 달려갔지만 간조라 눈 닿는 곳에 바다는 없고 대신 바다보다 더 파란 하늘만 펼쳐져 있던 겨울에 끝났다.





트렌디한 단어 ‘달리다’는 청춘의 동사이기도 하다. 가슴 속에 정체불명의 것들이 꽉 차서 달리지 않으면 베길 수 없는 것도 청춘이고, 일렁이는 지표면을 달릴 수 있는 것도 부서질 듯 연약하고 무모한 청춘뿐 인 것 같다. 20년이 훨씬 더 지난 어느 날 밤에 나는 93년의 달리기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에만 가능한 달리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기가 멈춘 것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달리는 행위 말고는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되지 않던 그 당시의 ‘기분’ 같은 것을 나누던 친구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스스로 비행사이기도 했던 생텍쥐페리는 <야간비행>에서 ‘하늘 위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길은 바다 아니면 집에서 끝난다’고 했다. 그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집으로도 바다로도 가지 않은 길 위의 발들을 생각한다.





황진선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뒤 <마리 끌레르>와 <보그>에서 패션 에디터로 일했다. 웬만한 문장가 뺨치는 어휘력과 우아한 비유, 세련된 상상력과 약간의 괴짜 기질을 지닌 A형 여자. <보그>에서 패션 에디터로 이름 날릴 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며 스테파노 필라티, 크리스토퍼 베일리, 프리다 지아니니 등 패션 슈퍼스타들과 독대해 그들의 속사정을 들었다. 현재 아내와 엄마를 겸하며 ‘보그닷컴’을 위해 전성기 시절의 필력을 다시 발휘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