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도 두려움도 없이 극한과 마주하는 남자들

한 남자는 호랑이와 맞서고, 또 한 남자는 높이와 싸운다.  겁도, 두려움도 없이 극한과 마주하는 남자들. 이들은 어디로 향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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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극장가에서 관객을 마주하는 건 웬 중년 남자 둘이다. <히말라야>의 황정민과 <대호>의 최민식. 포스터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두 남자의 얼굴은 어떤 절정의 표정을 짓고 있다. 황정민은 수염에 눈이 쌓인 채 웃음을 내보이며, 최민식은 대결전을 앞둔 사람처럼 근엄하다. 무게가 한껏 느껴지는 얼굴이다. 그리고 또한 남자가 있다. 얼굴 가득 상처를 입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포스터 속 그는 불어난 몸과 거칠어진 얼굴선 탓에 실물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한때 꽃미남이라 불리던 어여쁜 외모는 대체 어디다 두고 왔을까. 하긴 그는 이 영화에서 죽음에서 돌아왔다.

근래 극장가에는 테스토스테론의 비율이 높다. 1인2역으로 출연해 두 남자 분의 역할을 연기한 톰 하디의 <레전드>, 정평의 액션 스타 빈 디젤의 <라스트 위치 헌터>, 경쾌하게 거친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 등이 줄지어 개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히말라야>와 <대호>,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극한의 상황에서 남성호르몬의 최대치를 시험해본 영화 같아 흥미롭다. 극도로 춥거나, 극도로 공포스럽거나, 혹은 극도로 추우면서 공포스러운 상황이 세 영화에선 펼쳐진다. <히말라야>의 황정민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등산복을 모두 버렸다”고 했다는데, 괜한 너스레가 아닐 것이다. 올겨울 극장가는 엄두가 안 나는 영화 간의 대결, 동시에 절정의 강함에 도전하는 남자들의 육탄전으로 어느 때보다 뜨겁다.

<히말라야>는 8,000m 봉우리에 도전한 산악인들, <대호>는 마지막으로 한 마리 남은 조선의 호랑이와 맞서던 사냥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아들을 잃고 복수의 화신이 된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줄거리만 놓고 봐도 굉장한 노동의 영화다. 히말라야의 정상, 지리산에서의 호랑이와의 결투, 그리고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에서 깨어난 남자의 상황을 어찌 구현한단 말인가. 실제로 <대호>는 촬영 기간만 무려 6개월이 소요됐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캐나다, 미국, 아르헨티나를 크게 훑고 나서야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영화에서 배우 못지않게 활약한 것이 CG겠지만 <히말라야>의 황정민, <대호>의 최민식, 그리고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캐릭터 안에 대자연의 풍경, 인간 내면의 극대치를 그려냈다. 강인함으로 도달한 남자의 고유한 봉우리다.

남자 배우는 종종 운동선수와 같다는 인상을 준다. 더 큰 영화, 더 멋있는 캐릭터, 더 많은 작품을 좇는 품새가 레이스 위의 전력 질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정민은 최근 에너지의 엔트로피가 과열되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베테랑>과 <히말라야> 올해 이미 두 편이 개봉한 그는 현재 강동원과 함께한 <검사외전>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를 찍고 있다. ‘올해의 근면상’ 같은 게 있다면 분명 황정민의 것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다작만으로 배우 황정민을 설명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는 액션이 든 멜로든 기본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고, 무엇보다 캐릭터의 봉우리까지 오르고야 마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황정민에게 뜨뜻미지근한 건 없다. 그는 산에 오르는 데만 3일이 걸린 <히말라야> 촬영에서 눈보라와 거침없이 뒹굴었고, 영화 후반부에선 목이 아예 쉬어 있었다. <공공의 적> 시리즈와 <해운대> 등을 연이어 찍던 설경구의 행보가 겹치는 대목이다.

황정민은 <히말라야>에 대해 인터뷰하며 ‘외로움’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극 중 원정대 대장으로서의 외로움을 얘기한 거겠지만 동시에 배우 황정민의 외로움이 떠올랐다. 극한의 영화 <히말라야>에서 황정민은 의외로 힘을 뺀다. 애국심에 고취되어 있던 <국제시장>, 영화 내내 하이퍼 상태였던 <베테랑>에서 기어를 하나쯤 풀어놓은 느낌이다. 과하게 가열된 에너지가 언젠가 터지진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스스로 템포에 쉼표를 찍었다. <대호>의 최민식 역시 예상과는 다른 품새를 보여준다. 그는 이미 사냥을 포기한 포수고, 어쩔 수 없이 호랑이와 맞설 때도 공격보다 기다림을 택하는 남자다. 400kg 거구와의 육탄전은 거의 없다. 대신 최민식은 산과 호랑이의 정서, 신적인 존재의 정령 같은 걸 얼굴에 그려 넣었다. <명량>의 이순신, <취화선>의 장승업 등 운명을 머금은 캐릭터는 최민식의 장기다. 최민식은 <대호>에서 호랑이가 되어 함께 사라진다.

오스카 시즌을 맞아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건 단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일 것이다. 그는 대범한 연기 변신, 지속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남우주연상 수상에 실패했다. <타이타닉> 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에게 밀렸고, <블러드 다이아몬드> 땐 포레스트 휘태커에게 영광을 넘겼으며, 바로 지난해엔 다시 한 번 오스카 보증수표라 일컫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더 울프 오브 스트리트>에 출연했음에도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했다. 꽃미남 체형을 포기하고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종횡무진한 결과로는 매우 초라했다. 그래서 그의 팬들은 2016년에야말로 레오나르도가 오스카를 차지할 거라 확신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속 그는 거의 복수란 감정 덩어리 자체다.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에서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차갑고도 질펀하게 그려낸다. 특히 레오나르도가 숲 속에서 검은 곰과 싸우는 장면은 무아지경의 압권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영화에서 CG보다 더 활약했다.

더 센 영화, 더 강렬한 캐릭터, 더 극한의 상황. 남자 배우에게 극도의 설정은 성취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일 것이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영화라면 실제 등정에 나서듯, 호랑이를 사냥하는 영화라면 그만큼의 체력을 키워, 곰과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다면 스스로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이들은 카메라 앞에 선다. 하지만 이들이 운동선수와 다른 건 극한의 상황에서 극복뿐만 아니라 실패, 허무함, 고독 같은 감정도 그려낼 줄 안다는 것일 거다. 한겨울에 펼쳐진 남자 배우들의 극한 열전, 지리산과 히말라야 설산의 풍경만큼 광활하고 장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