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패션으로 진입한 보디 하니스

SM 도구 정도로 여겨지던 보디 하니스가 하이패션의 세계로 쑥 들어왔다. 무엇보다 위험하고도 격렬한 구애를 담은 사물이기에 말도 못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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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탈출한 것 같겠네. 병동에서 쓰는 것이 더 넓기는 한데… 입으려고?”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사진을 보며 남편이 물었다. 사진 속 모델들의 몸에는 가죽끈과 사슬, 가죽으로 된 콘브라(대체 무슨 기술이어서 이리도 완벽한 형태를 잡았는지 입이 떡 벌어진다), 의도가 불순한 목줄과 팔찌(<벤허>에서 노예가 된 찰톤 헤스톤이 배에서 노를 저을 때 손목과 발목에 차던 쇠고랑과 똑같다)가 휘감겨 있었다. 벽 타기나 구르기는커녕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캣우먼을 꿈꾸는 내가 입꼬리를 올리고서 실눈을 뜨고 좋아할 때, 남편은 ‘닥터 한니발’ 정도를 떠올린 것 같다. 그래도 “말 같겠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다행인 건가?

보디 하니스(Body Harness), 즉 ‘몸에 두르는 액세서리’의 시작을 굳이 따지자면 아주 쉽게 마구에 도달한다. 마차와 연결하기 위해 말의 목과 가슴, 허리에 두르고 감았던 가죽끈과 쇠고리, 벨트와 버클의 조합. 그다음엔 말을 달리게 할 채찍이 등장하고, 한눈팔지 못하게 할 눈가리개도 있다. 품위 넘치는 말에게 쓰인 마구가 사람의 몸에 살포시 내려앉으면,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유서 깊은 ‘에로틱 페티시즘’의 세계가 열린다.

2013 S/S 컬렉션에서 제이슨 우, BCBG, 에르베 레제(디자인이 곧 여성의 몸에 대한 찬가인 이 브랜드는 최근에도 뭘 이렇게 정성껏 만드나 싶을 만큼 근사한 수공예 가죽 뷔스티에를 만든다) 같은 브랜드가 가죽 하니스 톱을 선보였을 때 북미 패션 매체들은 이게 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소설의 핑크빛 여운을 타고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날 듯하던 하니스가 2016년에는 제법 비중있는 액세서리의 자리에 올랐다. <보그> 컬렉션 부록 끄트머리에도 보디 체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됐고, 아소스(Asos)나 탑샵 같은 대중적이고 트렌디한 브랜드에서도 심심치 않게 가죽 보디 하니스가 나온다. 게다가 작년까지만 해도 쇼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소품(알렉산더 맥퀸, 랑방)이나 마니아들의 수집용으로 보이던 하니스가 현실적 디자인으로 나오는 중이다. 캘빈 클라인의 이번 시즌 컬렉션에서 흰색 실크 드레스 위에 두른 보디 체인은 언뜻 여러 겹의 긴 체인 목걸이 정도로 보일 정도다.

한동안 나는 패션에 관한 한 좀 상식적인 면을 유지하려고 했다. 유행에 민감하지 않지만 겸손하고도 좋은 취향을 지닌 교토의 중년 여인과 실용적인 캘리포니아 여성의 조합이랄까(이놈의 컨셉 놀이!). 물론 여기에 게으름이 더해지는 통에 의외의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나의 상식적이고도 항상성 있는 패션에 대한 비전은 보디 하니스를 보는 순간, 속도 없이 팔랑팔랑 180도 회전했다. 백화점의 그 어떤 반짝이고 예쁜 것도 탐나지 않아 이게 과연 나의 패션 빙하기인가 하던 찰나, 탐스러운 재나 베인(Zana Bayne)의 가죽 보디 하니스를 보는 순간 내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가죽 보디 하니스를 평범한 옥스퍼드 셔츠 속에 입는다”는 니만 마커스 바이어의 말을 듣는 순간엔 절정의 신음 소리가 나올 뻔했다. 그래, 이거였어! 면 티셔츠나 슬립 드레스 위에 묵직하고 질좋은 가죽 하니스를 척 걸칠 생각을 하니 머리가 팽팽 돌며 봄이 빨리 왔으면 싶어졌다. 봄은 주로 미풍에 종아리를 간질이는 비단 치마나 꽃무늬로부터 오는데, 이번엔 좀 ‘쎈’ 분이 봄의 요정으로 등장한 셈이다.

자기 복제와 상호 복제를 빛의 속도로 반복하며 휘발성 찬탄이 난무하는 시절에 나는 일종의 패션 불감증에 걸린 것일까? 이 정도의 자극이 아니면 안 되는 걸까? 뭐, 어쨌든 당장 검정 가죽 요정을 국제 특송으로 영접하려는데, 스몰 사이즈는 품절. 웬열!

SM 도구 정도로 치부되던 보디 하니스가 하이패션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데는 몇몇 젊은 가죽 장인과 패션 디자이너, 그리고 영향력 있는 팝 디바들의 상호작용이 큰 역할을 했다. 꼼데가르쏭과의 협업으로 유명한 런던 가죽 하니스 브랜드 플리트 일리야(Fleet Ilya) 제품은 오로지 가죽을 다루는 놀라운 솜씨로 인해 착용 여부를 떠나 하나쯤 갖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자극한다(이 디자인 듀오 중 기술 파트를 담당하는 일리야의 경력은 말안장 제작 공방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리한나는 꼼데가르쏭×플리트 일리야 모자를 쓴 채 파파라치들에게 포착돼 이들의 협업에 날개를 달았다. 이 모자는 앞에서 보면 그저 챙이 좁고 짧은 가죽 캡 같은데, 뒤에서 보면 금속 버클이 달린 가죽끈이 T자형으로 머리 전체를 감싼다(닥터 한니발이 쓰고 있던 재갈의 패셔너블한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이 매우 SM적인 모자가 자극적이지만 상스럽지 않은 이유는 꼼데가르쏭의 세련된 디자인과 플리트 일리야의 숙련된 기술 덕분이다.

2011년 레이디 가가가 ‘You and I’의 뮤직비디오에서 “다시 너의 인형이 되기 위해 뭐든 다 주겠다”며 파격적인 보디 하니스를 입고 군무를 출 때 미국의 차세대 본디지 여왕이 탄생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재나 베인은 비욘세, 마돈나, FKA 트위그스 같은 뮤지션들을 위한 가죽 보디하니스를 제작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그녀 역시 가죽에 대한 숙명적인 애정의 발견과 함께 커리어를 시작한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리고 작년 봄 마크 제이콥스와 손잡고 발렌타인 한정 컬렉션을 선보이며 하이패션 본디지 여왕의 타이틀을 확고히 했다. 그녀의 디자인은 현재 도버 스트리트 마켓과 셀프리지스, 꼼데가르쏭(레이 가와쿠보는 재나 베인의 하니스도 몇 점 소장하고 있다. 어머, 여사님!) 등에서 판매 중이다.

보디 하니스가 인기를 끄는 건 엄청난 스타일링 파워 덕분이기도 하다. 페티시 시크 전문가 중 한 명인 스타일리스트 패티 윌슨은 상업적 의상에 힘을 실어야 할 때 보디 하니스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의 보통의 나날에 그럴듯한 에지를 주기에도 하니스는 더없이 좋다. 전문가들은 하니스 패션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수갑(팔찌)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클래식한 하니스 수집가들의 입문도 거기서 시작된다). 두툼한 가죽 커프에 금속 고리(원래는 목줄과 연결하는 체인을 거는 용도)와 스터드가 장식된 거라면 낯선 디자인도 아니다. 탑샵이나 아소스에서 나오는 하니스는 얼핏 서스펜더쯤으로 여겨진다. 가느다란 보디 체인은 겹겹이 늘어뜨리는 목걸이의 좀 다른 버전 정도로 부담 없지만 결과는 훨씬 섹시하다.

보디 하니스는 확실히 요즘 패션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고 있다. 하위문화가 하이패션에 진입하며 쿨하고 젊은 에너지를 수혈하는 방식. 하지만 나에게는 이 힘 센 봄의 요정이 자꾸 어떤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사랑을 간단명료하고 솔직하게 정리한다면 그건 ‘나의 것이 되어줘’ 혹은 ‘나는 너의 것이야’가 될 것이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로 시작되는

사랑 노래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엉기는 택이나, 어린 왕자에게 길들이기와 그에 따른 룰을 가르치는 요망한 사막 여우나, 엘리자베스 베넷이 미세스 다아시가 되기 위한 오만과 편견을 버무린 기나긴 소동에서나, 모두의 소원은 결국 ‘나의 것이 되어줘’다. ‘나의 것이 되어줘, 이왕이면 영원히. 내가 대머리가 되더라도, 때때로 너를 아프게 하더라도.’ 결혼반지는 자발적 구속과 페티시의 작고도 낭만적인 형태가 아니던가!

유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라키 노부요시가 수없이 찍어댄 결박된 창녀들의 사진이 내뿜는 기묘한 에너지는 여기에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당신의 것이 되어줄게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죽음의 절벽 앞에서 육체가 손에 잡히는 그 생생한 현재 말고 사랑을 증명할 방법이 뭘까? 가죽끈으로 스스로를 묶은 여자가 여왕이 될 수 있는 건 좀 특별한 취향이 짐작되기 때문이 아니다. “기꺼이 너의 것이 되어줄게”라는, 꿈처럼 마법처럼 안심이 되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