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표지의 역습
12월 14일 오후 5시경 <중앙일보> 웹사이트에 ‘국내 잡지 최초, 표지 모델 된 레즈비언 커플’이란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보그 코리아> 1월호의 표지가 대문짝 만하게 실렸고, 표지 모델이었던 사진가 코코 카피탄이 어떤 인물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와 더불어 그녀가 SNS에 남긴 말을 인용했더군요. “그는 ‘한국 매스미디어에서 레즈비언 커플을 표지 모델로 내세운 것은 최초’라며 ‘나의 일부인 내 여자 친구 프란세스 윌크스와 함께 내 모습 그대로를 담을 수 있도록 허락해준 보그 코리아에 감사하다’고 소감을 남겼다”라는 대목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10대 딸을 둔 <보그> 아트 디렉터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합니다. “부장님, 좀 전에 중년 여자분이 전화해 <보그> 1월호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이 맞느냐며 격앙된 목소리로 문의했어요. 담당 에디터는 휴가 중이라 나중에 전화하시라고 전했더니, 다짜고짜 맞느냐 안 맞느냐만 얘기하라고 해서 맞다고 했어요. 이걸 확인해서 학부모들에게 알린다고 하더군요.”
논현동 두산빌딩 9층 <보그> 사무실이 일방적 전화로 시달린 하루였습니다. “이번 달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 맞나요?” “어떻게 해서 <보그> 표지에 동성애자가 등장할 수 있죠?” “저는 학부모로서 이 일을 다른 학부모들에게 모두 알리겠습니다!” “불매운동을 벌일 겁니다!” “당장 편집장 바꿔주세요! 이메일도 알려주세요!” “공식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심지어 “웹사이트에서 사진을 내려라!”라는 항의까지, 수화기를 넘치는 소리들이 쩌렁쩌렁 울려댔습니다. 맹렬했고 흥분이 가시지 않는 성량과 음색이었습니다. 그 소동의 한복판에서 고요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검색 몇 번으로 이번 사건의 일등 공신인 신문 기사에 링크를 걸어 <보그>를 향한 매우 호전적 내용과 함께 <보그> 편집부 직원의 특정 전화번호를 기입한 학부모 모임 블로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저를 비롯해 에디터들과 팀원들은 1월호 표지 모델에 대해 생각해야 했습니다. 저희가 등장시킨 인물이 유부남과 바람을 피운 여배우거나, 살아 있는 동물을 껴안고 진짜 모피를 입고 촬영한 모델이거나, 탈세 혹은 절도, 살인 등 범법자였는지, 멀쩡한, 도리어 차가운 머리로 숙고해보게 됐습니다. 표지 모델로 나온 두명의 여자 가운데 한 명은 그 일간지의 몹시 성실하고 정직한 보도대로, 현재 대림미술관에서 전시를 열고 있으며(아주 많은 관객이 다녀간 인기 전시입니다) 구찌 협업을 통해 인기 절정의 예술가로 성장한 20대 여성입니다(다가올 봄엔 파리에서 크나큰 전시도 앞두고 있습니다). 키가 큰 여성은 주인공 코코 카피탄의 여자 친구 맞습니다(‘걸프렌드’인지 ‘피메일 프렌드’인지는 굳이 분류할 까닭, 알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 역시 촉망받는 예술가이자 모델 저리 가라 싶은 용모였기에 동반출연시켰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지난 1월호 표지 모델 2인의 관계가 ‘부정’일 수 있겠습니다. 존재해선 안될 존재. 김수현 선생의 명작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게이 커플 중 사진가 엄마의 말씀처럼 “암수가 엄연히 나눠져 있는데 그게 무슨 망측한 짓”일지도 모릅니다.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딸의 동성 연인을 이해하는 것이 딸이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엄마인 자신이 놓아버리는 것 같아 할 수 없다던 작중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상관도 없는 남’들은 자기도 못하는 ‘기적과도 같은 이해’를 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던 그녀가 손에 잡힐 듯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1월호 <보그> 표지가 전화 폭력으로 인해 한 회사의 업무를 몇 차례 마비시킬 만한 사안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관대 해지지 않습니다. 열두 번도 더 굴려 생각해봐도 제 머릿속엔 안나 윈투어의 조언만 떠오를 뿐입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 그렇다고 새것에 대한 갈증과 성취 때문에 레즈비언 커플을 모델로 세운 건 아닙니다만, 젊고 재능 많은 인물들을 사회상과 시대상에 맞춰 적절히 캐스팅해 최고 사진가들과 일류 에디터들의 지휘 아래 표지를 제작하는 제 원칙을 철저히 준수했을뿐입니다. 게다가 감수할 위험이라고 생각할 것도 없었습니다. 표지에 나오면 안 될 문제적 인물의 범주에 그녀들은 없었으니까요.
사실 <보그> 표지는 늘 사회 정의였고 시대기록의 표본이었습니다. <타임> <뉴스위크>의 일을 <보그>도 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보그>는 휴간하지 않고 적십자와 모델을 함께 표지에 레이아웃해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어느 패션 역사학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나는 맨 먼저 <보그> 표지를 보겠습니다. 그 지면엔 사회, 정치, 문화, 예술 등 모든 게 담겨 있기 때문이죠”라고도 말한 적 있나 봅니다.
무관심보다 혹평이, 무플보단 악플이 더 났다고들 했나요? 유명세를 대표하는 매체의 지면이다 보니 <보그> 표지는 샤넬 백처럼, 언론과 대중의 저격 대상이자 언론의 난도질거리로 자주 지목 됩니다. ‘발리우드 금수저 논란… 톱스타 딸 보그 표지 모델은 무임승차?’라는 제목으로 인도 〈보그>도 곤경에 처한 적 있으며, 킴 카다시안과 칸예 웨스트 커플의 웨딩 사진을 실은 미국 <보그〉가 발간되자 아주 난리도 아니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사우디 공주의 보그 표지 논란’이라며 두들겨 맞은 사우디아라비아 <보그>도 있죠(언론이 빈번하게 쓰는 낱말 중에 ‘논란’을 따라갈 만한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논란이라고 하니 논란인가 보다 하는 사람들을 위해 논란이었으면 하는일들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좋은 단어도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지지 하디드의 태닝 메이크업이 지나쳤던지 흑인 비하라고 욕먹은 이탈리아 <보그> 표지도 있습니다. 지지와 벨라 자매를 <보그 코리아> 표지에 실었을 때도 이에 대해 못마땅한 댓글이 엮어놓은 굴비처럼 줄줄이 달린 적 있습니다. 동양인 비하 발언을 했다는 게 그녀들은 물론 하디드 자매를 실은 저의 ‘죄목’이었죠. 물론 인종의 다양성을 내세운 미국 <보그> 125주년 기념호 표지는 지나친 컴퓨터 그래픽 실수로 인해 그야말로 ‘논란’이 될 만했습니다.
반면 표지 자체만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영화나 드라마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영화 <플래시댄스>에서 제니퍼 빌즈가 보던 잡지부터 하나의 전설이 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 브래드쇼가 들고 나온 크리스티 털링턴이 표지 모델로 나온 잡지가 모두 <보그> 아니었던가요? 이재용 감독의 2009년 작 <여배우들>에서도 맨 마지막은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의 <보그> 표지 촬영장면입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도 홍콩 <보그>(올해 론칭합니다)와 미국 <보그> 표지를 비교하는 대목도 나오죠.
보다시피 디지털 시대가 되고 인스타그램이 대세가 되면서 전형적인 프린트 시대의 위대한 산물인 잡지 표지가 더 쓸모 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세로 직사각형 잡지 표지는 프린트 시대엔 잘해야 한 종류 판매됐으나 지금은 디지털 버전을 비롯해 더 다채로운 표지를 만들어 독자에겐 소장 가치나 선택의 자유를 주고 디지털에선 매체를 더 자유자재로 알릴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보그 코리아> 표지가 매월 나올 때마다 각자 취향으로 인해 ‘좋다’ ‘나쁘다’라는 호불호 품평이 여러 블로그 및 SNS 댓글의 주제가 되는것도 잘 압니다. ‘보그 병신체’처럼 대표적 매체를 향한 마녀사냥으로 저는 여깁니다(다른 패션 잡지와 비교하며 읽다 보면, <보그>야말로 외래어와 외국어를 되도록 절제하고 있음을 아실 겁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몇 차례 이 지면을 통해 드러냈듯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시청 앞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릴 때 그 행렬에 참여하지 않지만, 그 대치 상황에서 악을 악을 쓰며 저 사탄의 무리들은 물러가라며 통성 기도를 하지도 않습니다. 요컨대, 저는 젊은 예술가를 존중한 채 시대상을 반영해 <보그> 1월호 표지에 정정당당히 기록 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드는 <보그>에서는 중요 유력 매체답게, 늘 표적이 되는 패션지답게 표지 인물 선정이 제일 신중합니다. 요즘이야 여성 패션지를 표방한 잡지에 남자 연예인들이 더 자주 나오는 세상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여자를 먼저 위합니다. 또 한류 전성시대라고 해도 무턱대고 ‘누구나’ ‘아무나’ 표지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표지 인물 선정에 대한 제 원칙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패션 바이블에 맞게 패션 모델 위주로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슈퍼모델 시대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당대 패션을 대표할 얼굴들이 매 시즌 새해맞이처럼 뜨겁게 떠오르니까요. 그다음이 시의성과 명분을 지닌 유명 인사입니다. 3년 동안, 소수의 한국 셀러브리티들이 ‘VOGUE’ 면류관을 쓴 채 표지에 나왔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한류 스타들에게 흔한 잡지 표지 모델 그 이상의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그들 경력의 정점을 찍고 싶은 순간에 <보그>는 표지에 그들을 초대합니다. 영화와 드라마 개봉 및 음원 발매에 맞춰 때마다 온갖 잡지 표지에 나올 수 있지만, <보그> 표지만큼은 신성불가침 원칙을 수호하고 싶습니다.
1월호 ‘레즈비언 커플’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보그 코리아> 1월호로 촉발된 ‘보그 성토대회’로 인해 다소 혼미해진 제게 학부모들의 투쟁적 전화 쇄도만큼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도 왔습니다. 심란한 저에게 이메일을 주신 어른부터 언급하고 싶습니다(두 딸의 아버지인 두산매거진 한진권 상무입니다). “1월호 커버 관련 젠더 이슈 때문에 고생 많이 한다는 얘기 듣고,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령대나 문화 감수성의 감도라는 잣대에 비추어 보아, 전화를 해대는 사람들과 동일한 ‘기성세대’의 일원인 제 자신이 부끄럽고 <보그>에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대한민국은 참 전체주의 국가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국민성. 답답하고 때로 숨 막히기도 합니다. 획일화, 효율화를 지상 과제로 삼았던 과거 기성세대들의 유산이 현 기성세대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루고, 여전히 다양하고 찬란한 문화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을 변함없이 황폐화시키고 있다 싶습니다. 문화의 작은 일부지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보그>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보그>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몰이해, 균질화에 적극 반대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힘내세요.”
네, 매우 힘이 나고 또 났습니다. 제 선택은 누군가에겐 옳고 누군가에겐 틀릴 수 있지만, 내잔이 넘칠 만큼 힘이 났습니다. 아울러 문자메시지로 저를 위로한 분도 계셨습니다. “뭔가 당신이 그냥도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이번 표지 일을 보면서 정말 당대에 획을 긋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랑스럽고 멋있고 그렇습니다.” 획을 긋고 있다는 말에 위로받은 것은 정녕코 아닙니다. 자랑스럽고 멋있고 그렇다는 문장에서 제가 선정한 그녀들에 대한 응원 깃든 동의, 존경담긴 인정 같은 것이 느껴져서였습니다.
LGBTQ 기조로 인해 지구 위에 무지개가 창궐할 무렵, 이탈리아 <보그> 2017년 9월호는 남남커플의 키스, 여여 커플의 키스를 표지로 인쇄했습니다. 이탈리아는 되고, 한국은 영영 불가능한 걸까요? 같은 해 3월호 표지로 발렌티나라는 트랜스젠더 모델을 출연시킨 게 파리 <보그>는 되고 저희는 유사 이래 안 되는 일일까요?
지구도 훑고 세계사 연대기도 오르내리며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에 항변처럼 말이 길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보그 코리아>는 그들이 레즈비언이어서, 반향과 논란을 염두에 두고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막무가내, 폭력에 가까운 무례한 전화 세례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의견 다양성의 범주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양성 범주에서 저는 레즈비언인 그녀들을 소개하지 못할 이유 역시 없습니다. 그녀들이 <보그 코리아〉 표지에 등장한 이유는 인물의 매력, 미학적 기준, 도덕적 하자 없음이라는 선정 원칙에 부합해서였습니다. 2019년 1월호 <보그 코리아> 표지는 물론, 앞으로의 <보그> 표지 역시 누군가가 수십 년 혹은 백 년 후 죽었다 살아난다면, 맨 먼저 보고 싶어할 지면으로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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