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 제니 홀저의 개인전
현대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개인전은 이 기막힌 2020년의 송가(頌歌)다. 대리석에 새긴 문장, LED에서 춤추는 문장, 기밀문서 위의 문장, SNS에 스쳐 지나가는 문장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간적으로 발화한 언어가 나의 머리에, 심장에 각인된다. 존엄하게 살아남고자 하는 이들을 품어 안는 문장들이 희비극의 경계에 선 우리의 일상에서 공명한다
2018년 초여름에 진행한 인터뷰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이번에는 어떤 분위기에서 인터뷰 답변을 하고 있나? 농장에서 지내며 격리 중이지만, 손자의 장난감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웃음). 지금은 영국 방송을 틀어놨다. 미국 뉴스보다 영국 드라마가 나으니까. 흉측한 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데, 아무도 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도 다행이다. 어쨌든 이 인터뷰는 침실 책상에서 마칠 생각이다. 침실에서 일하는 걸 별로 권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나는 침실의 친밀함이 좋다.
1980년대에 ‘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는 문장을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에 띄운 당신은 올해 ‘PROTECT ME FROM WHAT I DON’T WANT’라는 문장으로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40년 전은 물론 우리가 처음 만난 2년 전과도 상황이 급변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의 간극에는 무엇이 있나? 용감하게, 건설적으로, 자비롭게 행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생각 없이, 잔인하게, 심지어 이 상황을 기회주의적으로 착취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보호하고 생성하는 능력에 대한 동경이 있다. 생사가 달린 순간조차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원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게 옳다고, 내가 제시 또는 제안할 수는 있다. 지금의 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미국 대선 전 투표를 독려하는 SNS 피드도 잘 보았다. 누구보다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는 당신의 삶과 작업에, 이토록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변화가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훌륭한 사람들과 협업해 대선 관련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공공 미술을 통해 배운 바를 이용해 주요한 이슈를 강조하고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독려했다. 이 캠페인을 통해 소셜 미디어에 대해 잘 알게 됐는데, 향후 내 작업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겠다. 미술을 떠나 얘기하자면, 최근의 미국 정치는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기도 한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할 책임에 대해 일깨워줬다. 사회가 분열되고 상처받는 와중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아왔다. ‘미국적 가치’를 회복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이번 전시는 9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이다. 직접 오지 못하기에 공간의 분위기를 더 상상할 것 같은데, 어떤가? 여러분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누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다. ‘서울’ 하면 그곳에서 나눈 인상적인, 의미 있는 대화가 떠오른다. 많은 한국인들은 어렵고 근본적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성향과 능력을 동경한다. 나도 서울에서 함께 설치하고 있다면 좋았을 텐데… 멀리서 작품 설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태평양 건너에서 투시 능력을 써보곤 있는데, 초능력이라는 것이 늘 그렇게 믿을 만한 건 아니라서, 유능한 팀과 일하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전시 제목 ‘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늘 마음에 품어도 좋을 정도로 현재 우리에게 절실한 문장이 아닐까? 이 문장은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긍정적이고, 웃기고, 현실도피적이고, 진지할 수 있어서 제목으로 골랐다. 한 번도 상상되거나 실현된 바 없는 것을 구현해 전달하는 창의적 활동인 미술과 연관된 거다. 액티비즘의 시발점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만들고자 움직이기 전,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를 궁리하며 꿈부터 꾸니까. 더불어 지루하고 지독한 현실로부터의 아름다운 휴가를 연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 있을 땐 수채화 작업만 한다고, 테크 아트나 프로그래밍이 아닌 이젤 앞에서 작업한다는 게 새삼 낯설다고 했는데, 바로 그 작품들을 이번에 보게 됐다. 어쩐지 당신이 ‘오래된 미래’로 진화한다는 느낌이다. 어떤 계기로 수채화를 시도하게 됐나?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을 때조차, 나는 늘 화가이고 싶었다. 1970년대에 수채화에 도전했다 실패한 후로는 다시 손대는 게 두려웠다! 기밀 해제된 문서를 수집하던 어느 날, 그 문서가 비로소 나를 불렀다. 지난 선거 때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 당선을 도왔다는 수사를 담은 ‘뮬러 보고서’ 내용은 좌절, 분노, 비통함의 정서로까지 이어졌는데, 이 범주를 표현해보는 것이 옳겠다 느껴졌다. 때때로 수채화는 보고서의 내용을 강조하거나, 때로는 보고서의 텍스트를 거의 삼켜버리며(익사시키며) 지우기도 한다. 드러내는 것도, 없애버리는 것도, 둘 다 적확하다 싶었다. 최소한 미학적으로는 말이다. 때로 볼 수 있을지언정 행동하지 못할 때가 있고, 보는 것조차 어려울 때도 있다.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때는 통제된 규율을 따라야 하고 복잡한 설치를 진행할 때는 정교해야 하는데, 수채화 작업을 할 때는 와일드한 자유를 즐긴다. 맞다, 나머지 작업에 비해 수채화는 미술 테라피에 가까울지도.
‘궁극의 죄악’,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추문’ 같은 제목이 수채화의 낭만을 배반하는 것도 흥미롭다(웃음). 한편 또 다른 기밀문서를 활용한 유화인 ‘검열 회화(Redaction Painting)’ 연작은 은폐와 공유의 문제를 넘어 ‘엄연히 실재함’과 ‘믿을 수 없는 충격’ 사이를 오간다. 검은색 블록으로 검열된 부분에 금박을 입힘으로써 세상의 비밀을 작업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보지 못하거나, 볼 수 없거나, 볼 필요가 없다 여겼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역할임을 증명한다. 발언이 직접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은 적은 없었나? 물론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어느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였다. 어쨌든 민감한 내용의 문서를 활용해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지만, 나는 이 자료(재료)와 한 몸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당시의 수채화처럼, 최근에는 어떤 작업에 골몰하고 있나? 소셜 미디어 작업을 하며 능력 있는 애니메이터들과 일할 기회가 있었다. 예컨대 텍스트를 뛰어오르거나 녹아내리게 만드는 걸 좋아한다. LED 작품을 프로그래밍하는 데도 애니메이션을 쓰는데, 요즘은 증강 현실에서 애니메이션을 활용할 생각에 매료되어 있다.
더불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여성 문학가들의 문장을 차용한 로봇 LED ‘For You’ 앞에서 남몰래 울었다는 사실도 고백하고 싶다. 작품 속 문장이 기계와 전자 효과(번쩍거리고 사라지고 쏟아지는 등)를 통해 증폭되었고, 움직임의 스펙터클 덕분에 책보다 감흥이 더 컸다. 문장을 ‘보거나’ ‘읽는’ 걸 넘어 온 감각기관을 동원해 ‘만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장치를 통해 전달된 텍스트가 어떻게 느껴지고 읽힐 수 있을지에 대해 언급해줘서 감사하다. 내가 LED를 좋아하는 이유는 구두로 말을 전달하는 행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매번 성공하진 못하지만, 나의 목표는 신체에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고요한 명상의 순간과 못 견디겠다 싶을 만한 감각적 폭발의 순간을 오가는 다채로운 범주를 경험하길 바란다. 특히 텍스트가 속도를 내며 땅으로 내리꽂힐 때는 긴장하시길.
LED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모순적인 문장들은 당신이 일방의 진리로 유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동시에 과정에서 나 같은 관객은 본의 아니게 당황하는 것도 사실이다. 상반된 논조의 문장을 배치하는 이유가 ‘정치적 올바름’과 ‘정치적인 것’이 다른 얘기이기 때문일까? 초기 작업인 경구들(Truisms)은 의도적으로 여러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시각화했다. 다채로운 의견과 현실의 우주를 제시하고 싶었는데, 이는 지나치게 쉽거나 포용적이지 못한 세계관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 외에 여성 학대에 대한 나의 입장 같은 텍스트 연작이나 미술 작품은 꽤 명료하다. 단일의 접근법이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무엇이 효과적일 수 있을지, 오늘의 현실에 유의미할지를 고민하며 실험한다.
어떤 LED 작품 제목은 ‘Statement’로 시작한다. 실천을 향한 공식적인 의지가 느껴지는 단어다. 당신 작품은 기본적으로 실행을 독려하는데, 이를 굳이 제목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나? 그 제목은 텍스트를 사용하는 나의 습관, 그리고 선언을 날리곤 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시사한 것이다. 좋게 말해 어리석은 스테이트먼트도 있고, 변화를 촉진하는 장엄한 스테이트먼트도 있다.
넓고 높은 공간에 가로 형태의 LED 작품 ‘Living’과 ‘Survival’을 세로 LED와 함께 선보인다. ‘과거에 살아남아 현재를 사는’ 스스로를 가장 강하게 인식하는 때는 언제인가? 아주 어린 나이에 학대를 경험했다. 나는 살아 있는 생존자다.
매체의 물질성을 매개로 전달되는 문장이 사유의 순간을 선사할 때 다양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예컨대 대리석에 문장을 새긴 작업은 유일하게 촉각적이고, 손으로 문장을 어루만지다 보면 감정과 이해, 본능과 독해의 범주를 넘나들며 일상적인 행위를 의심하게 된다. 텍스트-매체 간의 조화 및 부조화를 어떻게 조율하나? 텍스트와 매체 간의 화음은 조용하고 온전한 이해에 유용하고, 불협화음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 그들을 잠시 멈추고 혼란스럽게 하는 데 유용하다. 물론 나는 그 둘 다 활용하는 걸 좋아한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Better Life’를 믿나? 그렇다. 하물며 더 못한 삶을 살지 않는 데에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최근 뇌리에 각인된 단어나 문장은 뭔가? 트럼프의 “마녀사냥”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마녀인 것이 자랑스럽다.
어머니가 당신에게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 것처럼, 당신 역시 관객에게 “이것 봐!”의 순간을 선사한다. 작가로서 언제 가장 기쁜가? 내가 내 일을 잘하면 사람들이 다가온다. 나의 빛 프로젝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가까이 서서 침묵에 빠져 글을 읽을 때면, 나는 평화를 찾는다. 세상의 가장 끔찍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그 역시 나를 행복하게 한다.
당신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 혹은 사유하는 데 그치지 않았고 구체적 행동 혹은 행위를 야기하고 유발한다. 읽다, 보다, 당황하다, 울다, 결심하다 등등. 궁극적으로 어떤 행위가 되길 원하나? 당신이 방금 열거한 반응들이 굉장히 맘에 든다. 그것 모두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또 얘기하자면, 가장 주요한 것에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선함과 상식.
2019년 빌바오 구겐하임에서의 회고전은 어떤 시간이었나? 당시 자신의 무언가를 죄다 드러내게 될 거라 예상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 전시가 궁금해서 가끔 구글링하곤 했다. 나의 현존을 정당화하고 싶었다.
농장을 아장거리던 귀여운 손자가 “예술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아, 그 사이 손주가 둘이 됐다. 사진가 딸이 꽤나 바빴다(웃음). 생각해보니 큰 손주가 이 질문의 답을 갖고 있다. 건강한 토양 위에 사랑스러운 나무를 그리고는 “나는 미래를 그린 거예요”란다. 아직 네 살도 채 안 된 인간에게 예술이란 매우 명쾌하고 긍정적인 것이다.
시국이 이렇다 보니, 이런 질문도 더 자주 받는다. “요즘 시대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일까?” 미술이 줄 수 있는 건 변함없지 않을까? 초월적인 숭고함, ‘실재’에 대한, 오해의 여지 없이 회피할 수 없는 재현.
당신이 기다리는 근미래, 2021년의 야심 찬 계획이 있다면? 운이 좋다면, 나이를 더 먹겠다. 응용미술로서는 미국 상원의회 선거 투표 장려 운동을 할 것이다. 빌바오 구겐하임과는 증강 현실을 실험해볼 것이다. 2022년 미술관 개인전도 준비해야 한다. 엄청난 존경과 가슴 뛰는 설렘을 안고 역시 2022년 목표인 루이즈 부르주아 전시를 기획할 것이다.
전시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당신 삶의 ‘Active Fantasy’는 무엇인가? 작가로서 발전하고 싶고, 쓰임이 있었으면 싶은 마음.
이 답변을 들으니 당신이 왜 텍스트 작업에 집중하는지 알겠다. 마지막으로, 사진가이자 당신의 딸 릴리 코비엘스키의 촬영 후기를 기쁜 마음으로 전한다. “사실 엄마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촬영 내내 엄마를 카메라에 담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새삼 상기했다. 렌즈를 통해, 나의 엄마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예술가임을 더 명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에디터
- 조소현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포토그래퍼
- Lili Kobie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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