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작별들 순간들

2023.02.24

by 정지혜

    작별들 순간들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 글은 모든 순간에 있었다. 나는 글과 함께 있었다.’(p.8)

    @munhakdongne

    순간이 아니라 순간들. 그것도 동시성을 갖춘 순간. 일종의 조각, 파편, 편린에 가까운. 그 속에 함께 있는 글과 나. 배수아의 산문 <작별들 순간들>(문학동네, 2023)은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필시 도달해야 할 목표도, 전개해나가야 할 플롯도, 주력해야 할 장르도, 유지해야 할 형식도 없다. 순간들 앞에서 그것들은 무용하므로. (글에서 ‘나’로 표현되는) 작가가 생각하는 읽기도 다르지 않다. 에필로그의 한 단락. ‘나에게 독서란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 다른 사건이지 책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 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읽기에 대한 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p.250)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문학동네, 2023)

    <작별들 순간들>에는 작가가 지금 읽고 있거나, 언젠가 읽었거나, 다시 읽게 됐거나, 먼 훗날 읽을지도 모를 다수의 책과 작가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으며, 읽는 우리 역시 그 하나하나를 기억하려 들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뭔가가 하나씩 하나씩 발생할 때 일어나는 움직임과 활동을 향한 시선이다. 순간의 감각에 가까울. 그렇다. 감각, 감각, 감각.

    “장소에는 마법적인 힘이 있다”고 말했던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그곳’이기에 가능한 일들. 예컨대 ‘그곳’이기에 피어날 수밖에 없는 꽃이 있고, ‘그곳’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의 씨앗이 있다. 이 책에는 ‘그곳’의 순간들과 순간의 ‘그곳’이 있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오랫동안 머물며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생활하는 베를린 인근의 작은 오두막과 그곳 정원은 이 모든 순간의 시작점이다. ‘누구인가, 이 숨겨진 정원에 낙원의 씨앗을 뿌려둔 이는. 그것은 저절로 탄생하고 저절로 사라지는 생명이었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연히 지나치던 행복한 나그네에 불과했다.’(p.40) 저절로 벌어지고, 이미 그곳에 있는 것과의 예기치 못한 조우가 이 책 안쪽에 생명의 기운을 잔뜩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매번 충만한 사랑으로 이어질 리는 없다. 오히려 그 순간들과 우리는 매 순간 작별할 것이다. 작별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숲 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므로. 글쓰기야말로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기에.(p.83) 우리는 순간들 한가운데 있고 작별들 안쪽에 있다. 읽고 쓴다는 건, 순간과 만나고 작별하길 끝없이 되풀이하는 일이 아닐까. 만나는 동시에 멀어지기. 시작도 끝도 없이.

    나는 ‘작가’라고 썼다. <작별들 순간들>의 ‘나’는 왠지 작가 배수아의 직접적인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라고 지칭되는 존재 역시 직접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그는 ‘나’를 경유해서 그곳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상태인가. ‘…나는 오래전부터 M⁕⁕⁕의 속삭임으로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고 있는데, 스스로 그 목소리의 미디엄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라고.’(p.133) 그렇다. ‘나’는 미디엄이고 미디엄과 같은 상태이길 바란다. ‘나’는 파편과 속삭임이 되길 자처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직감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해도 나는 이 책을 다 읽었노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다시 첫 페이지로, 프롤로그로, 첫 문장으로 돌아가 이 책을 다르게 읽기 시작할 것이다. 저절로 펼쳐진 어느 페이지를 읽어도 좋다. 나는 그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만나고 작별한다. 지금도 계속될 아찔한 순간들 속에서.

    프리랜스 에디터
    정지혜(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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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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