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비즈니스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어떤 존재일까?
변화가 숙명인 당대 패션 비즈니스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어떤 존재일까. 한 사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거대 패션 하우스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지난해 말, 유럽 패션 하우스와 미국 브랜드에서 패션 산업을 뒤흔들 만한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11월 중순 에스티 로더는 톰 포드 제국을 28억 달러, 약 3조7,000억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많은 언론이 이 대규모 인수에 떠들썩하던 며칠 동안 발렌시아가는 두 광고 캠페인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한 광고에는 어린아이가 가죽끈 하니스에 묶인 테디 베어를 안고 있는 이미지가 포함되었고, 다른 광고에는 아동 포르노의 광고는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문이 등장했다(발렌시아가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향후 유사 사례에 대한 방지 조치를 공개했다). 이어서 라프 시몬스가 27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 후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8년 만에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떠나며 결별을 공식화했다. 이 모든 뉴스가 패션계를 뒤흔드는 가운데 패션 관계자들과 팬들은 리카르도 티시가 버버리에서 퇴장한 후 보테가 베네타에서 버버리로 도약한 다니엘 리의 첫 컬렉션을 기대하며 루이 비통에서 누가 버질 아블로의 뒤를 이을지 숨죽인 채 기다렸다.
투모로우 프로젝트(Tomorrow Projects)의 대표로 베테랑 패션 경영인이자 컨설턴트인 줄리 길하트(Julie Gilhart)는 지난해 말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패션은 늘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비즈니스는 변화를 통해 번창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런 변화는 2023 F/W 패션 위크를 거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구찌와 모회사인 케어링 그룹은 발렌티노의 패션 디렉터였던 사바토 데 사르노를 미켈레의 후임으로 임명했고, 케어링의 또 다른 자회사인 발렌시아가는 세련된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LVMH는 퍼렐 윌리엄스에게 루이 비통 남성복의 지휘봉을 맡겼다. 그런가 하면 제레미 스캇이 10년 만에 모스키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이런 변화가 장단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지켜봐야겠지만, 패션계의 현재와 향방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미켈레가 2023년 봄 쇼를 끝으로 구찌를 떠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구찌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미켈레의 구찌를 만들었고, 세계관은 매우 독특하고 일관성이 있었으며 명확했죠.” 2022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올해의 신인 디자이너 후보에 올랐던 뉴욕 디자이너 바흐 마이(Bach Mai)가 말했다. 풍부한 질감, 중성적 실루엣, 더블 G 로고의 화려한 재해석을 특징으로 하는 미켈레의 구찌는 큰 인기와 상업적 성공을 거뒀지만, 구찌의 향후 목표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패션 평론가 아요 오주(Ayo Oju)는 예측했다. “구찌는 브랜드로서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구찌의 DNA라고 할 수 있죠.” 바흐 마이가 말했다. 구찌 스튜디오가 디자인한 2023 가을 컬렉션은 톰 포드 시대의 홀스빗 백, 미켈레풍의 오버사이즈 아우터 등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는 아이템으로 구성되었다. 아울러 9월에 열릴 데 사르노의 첫 런웨이 컬렉션에 대한 기대감은 벌써부터 높아지고 있다.
지난 시즌 뉴욕 캘린더에서 톰 포드는 빠졌지만, 에스티 로더의 톰 포드 인수 소식은 여전히 큰 반향을 일으킨다. “한동안 업계에서 톰 포드가 매각을 고려한다는 얘기가 돌았기 때문에 매각 소식에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회장인 카산드라 딕스(CaSandra Diggs)가 말했다. 계약 조건에 따라 에스티 로더는 톰 포드의 단독 소유주가 되고 에르메네질도 제냐와 마르콜린은 각각 패션과 아이웨어의 라이선스를 보유하게 된다. 에스티 로더는 톰 포드 뷰티를 계속 경영할 계획이다. “진정한 변화의 신호죠. 전례 없는 인수이며,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할 수 없게 됐어요.” 길하트가 말했다. 딕스에게 이번 인수는 미국 패션계를 뒤흔든 쿠데타였다. “미국 디자이너가 이 정도의 가치를 브랜드에 반영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는 브랜드를 판매하거나 투자자에게 어필하려는 다른 디자이너에게도 낙관적인 신호죠. 이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가 제공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포드는 미국만의 매력을 알리고 구찌에서 획기적인 일을 이룬 선구자일 뿐 아니라, 단순한 디자이너를 넘어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을 정의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 역할을 구현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죠.” 마이가 말했다.
구찌와 루이 비통은 데 사르노와 윌리엄스라는 전혀 다른 두 후보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했다.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 중 일부는 데 사르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을 때 구글에서 검색해보기도 했다. 반면 윌리엄스는 20년 넘게 음악과 패션 분야에서 크리에이티브 인재로 주목받아왔다. 하지만 정식 패션 교육을 받거나 메이저 브랜드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그의 영입은 많은 이에게 충격이었으며, 현재 패션계에서 위대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란 무엇이며, 디렉터 한 명이 유명 패션 하우스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책임이 큰 자리라 많은 압박이 있기 때문에 이런 압박을 견디면서 팀을 이끌어가는 동시에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안정성이 있으면서 커뮤니티 구축으로 기존 고객뿐 아니라 새로운 고객까지 유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 같아요. 버질이 아주 좋은 사례죠. 버질은 새로운 커뮤니티를 유치하고, 크리에이티브 팀을 관리하고, 소셜 미디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마케팅에 대한 이해와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길하트가 말했다. 데 사르노가 13년간 발렌티노에서 근무했고, 돌체앤가바나와 프라다에서 디자인한 경력이 있는 반면, 윌리엄스는 스트리트 웨어 브랜드 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을 공동 설립하고, 루이 비통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했으며, 현대적인 스타일 아이콘으로 인정받지만 주로 음악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마이는 파슨스와 인스티튜트 프랑세 드 라 모드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오스카 드 라 렌타, 캘빈클라인, 프라발 구룽,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사내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성공이 교육과 훈련에만 달려 있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교육이 패션과 의류 제작, 창작 과정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패션계에서 훈련된 안목과 관점의 가치가 더 인정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배경과 상관없이 브랜드를 이끄는 일은 어느 때보다 힘든 일이 됐다. 시몬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을 접기로 결정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과거 질 샌더, 디올, 캘빈클라인에서, 현재는 프라다에서 미우치아 프라다와 함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하우스 최고의 자리를 지키면서 레이블을 유지하는 것은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오주는 디자이너의 시간과 주의를 요하는 수많은 시상식, 갈라, 시사회, 레드 카펫 행사를 언급하며, “요즘은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봄/여름 컬렉션과 가을/겨울 컬렉션이 아니라 봄/여름, 가을/겨울, 프리폴, 리조트를 모두 진행해야 해요. 게다가 모든 유명 행사에도 참석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소셜 미디어의 시대인 오늘날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직면한 또 다른 현실은 아무리 잘 만든 옷과 액세서리도 대중의 관심을 끌고 유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패션쇼 앞줄에 앉아 있는 유명인과 쇼의 규모, 소셜 미디어용으로 제작된 콘텐츠는 브랜드의 가시성과 생존력에 영향을 미치는 일부 요소에 불과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발렌시아가의 뎀나는 디자인(굽 높은 크록스, 2,090달러의 쇼핑백 등)과 캠페인을 통해 도발적인 정반대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2023년 가을, 테디 베어 광고 논란 이후 뎀나는 시계를 되돌려 오버사이즈 블랙 수트, 해체한 바지로 만든 여성복, 플로럴 플리티드 드레스를 선보였다. 이 모든 것을 군더더기 없는 흰 배경에서 표현했으며, 뎀나는 쇼 노트에서 “패션은 더 이상 오락이 아니라 옷을 만드는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딕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제가 만난 패션계 관계자 모두 옷을 찾는 소비자가 점점 더 소규모의 신흥 레이블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패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디자이너로 브랜든 블랙우드(Brandon Blackwood), 테오필리오(Theophilio), 페 노엘(Fe Noel)을 꼽았다. 그녀는 코로나19로 생산 일정과 공급망이 뒤바뀌었지만, 브랜드와 대형 리테일러의 불균형한 관계가 균형을 찾을 수 있었다고 언급하며, 소비자 직접 판매(D2C)와 이커머스에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고 전한다. 오주는 브랜드의 윤리와 지속 가능성에 점점 더 신경을 쓰는 사회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이 실제로 실사를 하고 매우 윤리적인 방식으로 의류를 생산하는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대 패션은 그 어느 때보다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모스키노의 악명 높은 맥도날드 테마 컬렉션, 보스의 2023년 봄 런웨이 파멜라 앤더슨과 DJ 칼레드 캐스팅, 몇 년 전만 해도 전혀 불가능해 보이던 최근의 협업(티파니×나이키 에어 포스 1, 마르니×칼하트 윕 등등)을 보면 열렬한 패션 애호가를 넘어 영향력과 인지도를 확대하려는 업계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디자인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유지하면서 이를 달성하는 것은 야심 차긴 하지만, 모든 하우스가 추구하는 목표일 것이다.
톰 포드,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의 작품에 감탄하며 성장기를 보낸 마이 역시 부흥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 “에디터나 다른 디자이너와 얘기할 때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패션은 지난 수십 년간 상업적인 측면에 치중해왔고, 많은 사람이 함께 성장하던 예술과 감성, 환상적인 측면은 줄었다고 말이죠. 우리 모두를 처음 패션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 마법을 되찾고 싶다는 열망과 갈망이 아주 강합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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