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함윤이 ‘유언집행자’
집에 돌아가면 나는 딸이 된다. 할머니는 천국에 갔지만 여전히 나의 할머니다. 오늘 우연히 만난 당신과도 가족이 될지 모른다. 여러 세대의 소설가들이 가족에 관해 쓴 초단편소설 8편.
유언집행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먼 친척이 돌연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이야기는 늘 인기 있는 소재다. 이 이야기가 품은 고통은 매우 가벼운 데 비해, 대가는 크고 알차기 때문이다. 유산을 물려준 가족은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존재조차 흐릿한 타인이므로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 딱히 슬퍼하지 않아도 좋다. 행여 안타까운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사적인 관계나 기억에서 말미암은 게 아니라 보편적인 죽음을 향한 추상적인 비통에 불과할 테다. 반면 막대한 유산은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밝고 명확한 무엇이다. 고로 어떤 사람들은 부끄럼도 없이 크게 소리 내어 말한다. 내게도 그런 행운이 주어진다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죽어 내게 크고 귀중한 유산을 물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유언집행자가 찾아와 내게 상속될 유산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기꺼움보다 두려움에 더 가까웠다. 만일 나에게 평생을 산 집이 있고, 어느 날 그 집에서 정체도 기원도 모를 문을 발견했다면, 분명 비슷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누가 이 문을 만들었지? 이 문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야? 연달아 질문하며 문짝을 노려보았을지도 모른다.
허둥지둥하는 나와 달리 유언집행자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치는 내내 시종일관 차분했다. 그는 어떤 거리나 길목에서 만나도 금세 얼굴을 잊을 만큼 평범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체구와 목소리 모두 작았는데,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정렬하는 손짓만은 놀랍도록 신속했다. 마치 노련한 점술가처럼, 그는 내 셋방의 탁자 위로 서류들을 차례차례 늘어놓았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다.
유언집행자의 말에 따르면 내 상속인은 아버지의 사촌 누이로서 아주 어린 나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는 나의 돌잔치에 와서 내가 갓 만들어진 손으로 실을 움켜쥐는 순간을 보았다. 몇 년 후 홀로 남은 내가 친척들 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계속 귀를 기울였다. 반면 나는 평생 아버지에게 괴짜 사촌 누이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었다. 나는 탁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불가사의한 문을 두려운 눈길로 응시했다.
“이 서류를 보세요.”
유언집행자가 유언장 사본 옆에 놓인 토지대장을 내게 건넸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에 있는 500평의 땅에 관한 문서였다. 나의 피상속인은 내게 그 땅을 모두 물려주기로 약속하고 세상을 떠났다. 가족만큼이나 오래된 병마에 마침내 패배한 결과라고 했다.
유언집행자는 몇 장의 서류를 더 꺼내며 내가 이 땅을 상속받는다면 밟아야 할 행정과 세무 절차에 관해 이야기했다. 취득세나 상속세 같은 것은 뉴스로나 들어봤을 뿐, 내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리라 생각하던 단어였다. 유언집행자는 내가 그 땅으로 무얼 하든 내 자유라고 말했다. 세금이 부담된다면 땅을 국가나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도 좋고, 빚을 내 땅을 받은 뒤 건물을 세우든 다른 용도로 운영하든 상관없었다. 모든 게 내 선택에 달려 있었다. 선택지가 생기는 것. 그 또한 내게는 낯선 상황이었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그를 쳐다보자 유언집행자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물었다. “어머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질문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제 어머니는 당신 이야기를 종종 했고, 언제나 당신을 아이 또는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당신 같은 아이가 너무 일찍 세상에 홀로 남아 겪어냈을 슬픔을 상상하며 혼자 불안해했고, 그 감정을 나와 나누기도 했습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점괘처럼 놓인 서류와 유언집행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한테는 무슨 땅이 주어져요?”
유언집행자가 웃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평온에 하나의 금이 갔다.
“제가 물려받을 땅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물려준 건 유언집행자라는 역할 정도죠.”
그가 서류를 한데 모아 봉투에 넣고 내게 건넸다. 나는 봉투를 받지 않고 또 질문했다.
“당신이라면, 당신이 저 땅을 받는다면 어떻게 쓸 거예요?”
유언집행자가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평온 위에 난 균열은 점차 두껍고 깊어지더니, 너머의 맨얼굴을 조금씩 드러냈다. 유언집행자의 얼굴이 붉어졌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순간 나는 조금 안심했다. 유언집행자가 찾아와 건넨 모든 말과 약속은 낯선 것, 삶에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내보이는 젖은 눈시울과 벌게진 이마는 가족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친숙했다.
유언집행자는 재킷 소매로 눈을 한 번 닦고 말했다. 만약 자신이 그 땅을 물려받는다면 그곳에 불을 지필 것이라고. 땅의 모든 것이 검게 그을릴 때까지.
일주일이 지나 나는 유언집행자와 함께 그 섬으로 갔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1시간 만에 섬 안쪽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토지대장에 적힌 위치 부근의 정류장에 내리자, 소금기 섞인 안개가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순식간에 짜고 눅눅해진 얼굴을 훔치며 물었다.
“그 땅에 가본 적 있어요?”
나보다 몇 걸음 앞선 유언집행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럼 당신 어머니가 그 땅을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도 아느냐고 물었다. 유언집행자는 걸음을 늦추더니 살짝 고개를 틀었다. 안개에 싸인 옆얼굴이 말했다.
“직접 보세요.”
좁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몇 분 정도 더 올랐을 때, 나는 그의 말대로 직접 그 땅을 볼 수 있었다. 땅은 우리가 걸어온 길과 마찬가지로 희부연 해무 속에, 다만 검은 소나무로 에워싸인 채로 있었다. 유언집행자는 ‘사유지’라고 적힌 펜스 위를 가볍게 넘어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오간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펜스를 넘어 숲속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는 제법 깊어 보이던 소나무 군락은 금세 끝났고, 대신 옅은 색의 풀잎이 뒤덮은 들이 나타났다. 바로 앞에서부터 저 멀찍이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지대까지 모두 풀잎으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 서 있던 유언집행자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건 약쑥입니다.” 뒤이어 그는 본래 이 섬의 쑥은 바닷바람과 안개를 맞고 자라 일반 쑥의 세 배 가까이 자라며, 향과 효능이 좋아 각종 약재로 쓰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안개로 축축해진 얼굴을 쓸며 어린 자신과 어머니가 어떻게 이 밭을 보살폈는지도 이야기했다. 막 경운기 운전을 배운 어머니가 어린 저를 태우고서 어떻게 이 땅을 오갔는지부터, 땅을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다른 주민들을 따라 무작정 밭을 태우는 화전(火田)을 시도했다가 호된 호통을 듣고 과태료를 물었다는 이야기까지. 그처럼 서툴던 시절에도 쑥은 힘껏 자라나 단단한 줄기와 사자 발처럼 갈라진 잎사귀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유언집행자가 가방에서 다시 서류봉투를 꺼냈다. “만약 농사를 이어 짓는다면, 감면받을 수 있는 금액이 꽤 클 거예요. 그 절차를 밟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곳은 당신 땅이니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유언집행자는 거의 억지로 내 백팩에 서류봉투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나를 마주한 그의 이마와 뺨은 된바람 탓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무척 붉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할 때조차 당신을 아기라고 불렀지요. 당신은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그 아기’라든지 ‘그 아이’ 같은 호칭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나는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알리고 싶어 여기까지 함께 온 것입니다.”
나는 유언집행자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내가 일주일 전, 그의 얼굴에서 보았다고 생각한 분노가 전혀 다른 감정으로 읽히는 순간을 목격했다. 그 낯을 오래 마주하기 두려워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미끄러뜨려도 계속해서 갓 자라난 쑥, 짜고 거센 바람과 안개를 맞아가며 커가는 풀로 가득한 땅이 펼쳐졌다. 땅을 훑는 동안 나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낯선 문을 향했던 두려움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그 대신, 바닥을 뚫고 자라난 슬픔이 차츰 뚜렷해지며 그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함윤이 함윤이는 ‘소설을 쓴다’는 단출한 문장으로 작가 정보를 보내왔다. 그것이 그녀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 장편소설 <정전> 등이 있다.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문학동네소설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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