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유 블라지와 서울에서 조우하다

2026.06.16

마티유 블라지와 서울에서 조우하다

샤넬의 마티유 블라지는 새로운 패션 현상을 일으키는 거대한 촉매제다. 그는 기쁨을 선사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그만의 문법을 정의한다. 우리는 지금 블라지라는 새 시대의 등장을 만끽하고 있다. 그와 서울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 그와 함께 샤넬 하우스는 정체된 유산이 아니라 진화하는 패션 유기체로 다시 태어났다.

세상이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14년이었다. 당시 <보그> 인터내셔널 에디터 수지 멘키스는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아티즈널 컬렉션 리뷰를 통해 ‘헤드 디자이너’의 정체를 공개했다. 서른 살의 디자이너가 전 상사였던 라프 시몬스를 껴안고 있는 사진도 함께였다. 철저하게 익명성을 바탕으로 하는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밝히는 건 그 자체로 논란이었다. 마르지엘라는 곧 개인이 아니라 ‘컬렉티브’가 디자인을 맡고 있다고 서둘러 성명을 발표했다. 수지 멘키스는 블라지의 등장을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정의했다. 그 글의 끝은 이랬다. “이러한 재능은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026년 5월 25일, 만천하에 드러난 시대의 재능 마티유 블라지가 내 앞에 앉았다. 서울 63빌딩에 새로 문을 연 퐁피두센터 한화의 3층 숨겨진 라운지 공간이었다. 내일이면 이곳에서 그가 지난해 말 뉴욕 지하철역에서 선보인 2026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 컬렉션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설치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스태프와 피팅을 위해 기다리는 모델, 옹기종기 모인 샤넬 직원이 눈에 띄었지만 그곳엔 고요한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버건디 컬러 티셔츠에 네이비 하프 집업 톱을 입은 블라지 옆으로는 GD와 틸다 스윈튼이 샤넬 공방 컬렉션을 입은 커버의 <보그 코리아> 2026년 6월호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자신의 작업이 또 다른 맥락과 다른 시야에서 해석되는 걸 보는 것이 즐겁다는 그가 말을 꺼냈다. “내일 쇼가 저의 첫 번째 ‘레플리카(Replica)’ 쇼입니다. 이제 7월 가을 꾸뛰르 컬렉션만 선보이면 한 사이클을 모두 도는 셈입니다. 한 편의 대서사시가 끝나가는 느낌입니다.” 커피를 홀짝이던 그가 드디어 자신의 ‘첫 경험’이 모두 끝나가고 있다고 웃었다. 12년 전 마르지엘라 백스테이지에서 해맑게 웃고 있던 젊은 디자이너는 그 후 피비 파일로의 셀린느, 라프 시몬스의 캘빈클라인을 거쳤다. 블라지가 다시 장막 밖으로 드러난 건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가죽 브랜드에 유머와 재치를 더했다. 장인 정신을 이 시대에 어울리도록 해석하는 것이 임무였고, 왜 지금 우리가 손맛이 필요한 옷을 입어야 하는지 성공적으로 설득했다. 그리고 2024년 12월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샤넬과 블라지의 만남은 21세기 패션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가브리엘 샤넬, 칼 라거펠트로 이어지는 하우스의 역사는 이전에는 보지 못한 챕터를 쓰는 셈이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2025년 10월 블라지의 첫 번째 샤넬 컬렉션 리뷰 기사를 <보그>에 싣기 위해 나는 ‘Big Bang’이라는 제목을 지었다. 여러 행성이 떠오른 듯한 파리 그랑 팔레 쇼장에서 만난 컬렉션은 완전히 새로운 샤넬의 시대를 선언하기에 충분했다. 무대에 뛰어나온 디자이너를 향한 함성은 새로운 록 스타를 맞이하는 뜨거운 환영이었다. 그런 뒤 곧 뉴욕으로 향했다. 다른 브랜드가 ‘프리폴’이라는 부르는 컬렉션을 샤넬은 공방에 헌사하는 ‘공방(메티에 다르)’ 컬렉션이라 지칭한다. 뉴욕에서 운행이 중단된 바워리(Bowery) 지하철역이 톰 포드 이후 블라지의 첫 번째 공방 컬렉션를 위해 12월 2일 굳게 닫힌 문을 열어준 것이다.

5월 26일 서울에서 열린 쇼는 뉴욕에서 선보인 바로 그 컬렉션을 그대로 가져와 선보이는 ‘레플리카’ 쇼였다. 블라지의 동행 여부는 직전까지도 미정이었다. 쇼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샤넬 팀에게서 은밀한 연락이 왔다. 블라지가 직접 컬렉션에 대해 알려주는 시간을 가질 테고 <보그>를 그 자리에 초대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비밀스럽게 블라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프랑스 악센트가 적당히 섞인 어투의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패션과 삶, 즐거움과 일에 대한 분명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뉴욕에서 선보인 컬렉션을 서울로 가져오게 되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테마가 된 컬렉션을 서울에서 선보이는 이유가 있나?

모든 문화는 저마다 독특하기에 두 도시를 비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쇼를 재현하는 것을 두고 고민했다. 이 컬렉션이 가진 고유의 정신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도시는 서울뿐이라 생각했다. 여러 이유가 있다. 난 예술을 사랑한다. 그런 면에서 서울은 최고의 도시다. 전쟁 이후 발전한 모든 것을 살펴보면 서울에서 출발해 국경을 넘어 세계적인 무대로 확장됐다. 패션, 시각예술, 영화, 음악, 건축, 모든 장르가 그렇다. 뉴욕에 살며 캘빈클라인에서 일하던 시절 K-팝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기억난다. 불과 몇 년 사이 한국어가 미국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는 외국어가 되었다. 정말 대단한 문화의 힘이다. 비록 서울을 잘 알지는 못한다. 이전에 딱 한 번 짧게 방문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모든 바탕에 깊은 전통이 깔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속도가 있고, 에너지가 가득하다. 또 혁신이 존재한다.

컬렉션 작업 방식은 어떤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Chanel 2026 Métiers d’Art

Chanel 2026 Métiers d’Art

예를 들어 공방 컬렉션은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더 이상 한 명의 ‘샤넬 여성’을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동안 샤넬 여성은 여성성에 대한 단 하나의 특정한 관념만 대변해왔다. 일종의 유니폼처럼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캐릭터의 다양성을 탐구할 수 있을까?’ 한 명의 여성이 아니라 여성‘들’ 말이다. 이번 쇼는 ‘삶’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었다. 뉴욕은 일종의 혼돈의 도시다. 진짜 삶을 살아가는 다채롭고 비범한 사람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나를 놀라게 할지 결코 알 수 없다. 서울도 마찬가지라 여긴다. 두 곳이 흥미로운 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부딪치고 공존하는 모습이다. 일상적인 삶을 위해 심플한 옷을 입은 여성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도 있다. 비즈니스를 이끄는 여성 사업가도 있고, 학생도 있다. 음악에 열정을 지닌 사람, 스스로를 슈퍼히어로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패션계에서 일하기에 이 같은 캐릭터를 다소 과장해서 표현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출발점이다.

공방 컬렉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샤넬 공방과 긴밀히 작업했을 법하다. 놀라운 순간이 있었나?

기분 좋은 놀라움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모두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고 숙련된 장인이다. 물론 장인 정신은 어디에나 있고, 문화 곳곳에 저마다의 전문성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자수 공방인 르사주 같은 곳과 함께하면 그들이 자신의 전통을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때로는 어떤 것이 이미 아름답게 작동하고 있을 때 굳이 그것을 바꾼다는 것이 내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르사주와 작업할 때는 비교적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했다. 사실 난 늘 혁신을 추구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나 역시 전통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몽텍스 공방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들은 또 다른 기술을 지니고 있고, 그걸 한계까지 더 밀어붙일 수 있고 더 실험적일 수 있다. 이미 훌륭한 것을 존중하는 것과 어디까지 더 밀어붙일 수 있을지 한계를 발견하는 것 사이에는 늘 이러한 균형이 존재한다. 가장 놀라운 걸 꼽자면 내가 결국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난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곁에 장인이 없다면 그 꿈은 그저 이미지나 아이디어로만 남을 뿐이다. 장인들이 비로소 그 이야기를 완성하는 셈이다. 르마리에 공방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세세하고 정교한 전문성이 있다. 깃털, 주름 그리고 소재에 변화를 주는 작업. 가끔 결과물을 보며 이렇게 묻곤 한다. “이게 아직 깃털이 맞나요?” 사탕 가게에 온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대화다. 우리가 함께 하는 작업과 아이디어의 교류다. 이건 모두 샤넬만이 가진 유일무이한 유산이다. 모든 장인의 기술을 하나의 공방 컬렉션을 통해 선보이는 것은 진심으로 독보적인 자랑이다.

가브리엘 샤넬은 빼놓을 수 없는 영감일 것이다.

물론 그녀에 대해 탐구했다. 영화 작업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갔다가 뉴욕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영화 작업은 특별히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녀 스스로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다운타운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녀는 샤넬에게서 영감을 받은 옷을 입은 수많은 여성을 발견했다. 진짜 샤넬이 아니라 카피 제품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스타일이 더 이상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혹적으로 여겼다. 자신의 옷이 평범한 사람들의 옷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활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옷이었다. 뉴욕에서의 경험 이후 파리로 돌아간 그녀의 작업도 바뀌었다. 여성이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스커트 폭을 약간 더 넓혔고, 움직임이 편하도록 진동 둘레를 조금 낮추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럭셔리 스트리트 웨어’라는 단어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그것을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뉴욕 지하철에서 만나볼 법한 다양한 여성이 동시에 등장하는 쇼의 구조가 흥미로웠다.

Chanel 2026 Métiers d’Art

Chanel 2026 Métiers d’Art

나에게도 이 컬렉션이 흥미로운 건 일종의 위계를 지워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양한 여성의 병치가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어 쇼 시작을 장식한 바비타는 매우 캐주얼한 차림 그대로다. 꾸밀 필요도 없다. 그저 평소 바비타의 모습 그대로지만 한 단계 ‘고양’된 버전일 뿐이다. 지하철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여성이다. 그 옆으로는 아주 풍성한 꾸뛰르 드레스에 검은색 터틀넥만 입고 있다. 어떤 룩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

나는 그레이 스웨터에 트위드 스커트를 입은 룩이 지금의 샤넬에 매우 가깝다고 여겼다.

Chanel 2026 Métiers d’Art

가방에 재킷을 걸친 룩 맞나? 나도 그 룩을 좋아한다.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정도 럭셔리는 종종 저 멀리서도 눈에 띄도록 디자인했다. 하지만 뛰어난 원단과 장인 정신으로 완성했기에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가 없는 옷을 만드는 게 흥미롭다.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옷을 입는 사람에게 잘 맞고 기능에 충실하면 된다. 또 옷이 대화의 소재가 된다는 아이디어도 좋다. 매우 심플한 옷을 입고 있지만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다. “이 단추 좀 봐봐” 혹은 “내 재킷 안감을 봐”. 그러면 순식간에 하나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모든 것이 요란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내가 화보를 촬영하면서 본 재킷의 안감에는 특별한 디자인이 숨어 있었다.

지난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서 그 아이디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모델들에게 특별히 뜻깊은 상징이 있는지 물었다. 누군가는 사자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하트를 꼽았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징을 옷 안쪽에 자수로 새겨놓았다. 혹은 누군가의 편지를 옷 안에 자수로 새겨놓았다.

같은 면에서 모델 줄리아 노비스의 룩도 좋았다.

Chanel 2026 Métiers d’Art

줄리아를 안 지는 10년이 넘었다. 마르지엘라에서 쇼 오프닝을 맡기도 했고, 여러 번 함께 일했다. 놀라울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특유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그녀가 입은 옷 역시 뉴욕 여성의 기억을 대변한다. 한번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갔다. 당시 파트너와 집에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서둘러 뛰어내려갔다. 그곳에서 엄청나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마주쳤다. 정말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삶은 도처에 존재한다. 더 이상 고정된 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줄리아가 입은 그 룩이 우리의 삶을 완벽하게 포착했다고 여긴다.

지금 샤넬과 함께하는 여성의 삶을 포착하면 기쁨(Joy)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나 역시 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샤넬에 합류하기 전에 부모님과 나눈 대화가 있다. 주변의 기대는 엄청나게 컸고, 그 기대는 내가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거대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샤넬에 어떤 것이 필요할까. 딱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바로 어떤 ‘목소리의 톤’, 즉 분위기였다. 언제부터인가 패션계의 거대한 담론에서 기쁨과 행복이라는 감정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왜 옷을 살까? 사실 그 누구도 옷이 더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 옷은 차고 넘친다. 당신과 나 모두 매일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샤넬 혹은 다른 럭셔리 하우스에서 제품을 구입할 때는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인 셈이다. 향수를 뿌리는 것이나 미용실에 가는 것과 같다. 그것이 자신에게 작은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혹은 주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했기에 첫 번째 쇼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첫 번째 쇼에서 당신과 모델 아와르 오디앙이 완성한 기쁨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현장에서 쇼를 취재하던 나에게까지 그 기쁨이 전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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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저 무대로 나가서 네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마음껏 해!” 재미있었던 건 그녀가 런웨이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난 더 이상 캣워크를 비추는 화면을 볼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무대로 나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사를 하러 무대로 걸어 나갔다. 바로 그 순간에야 그녀가 춤을 추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정말 엄청난 선물이었다. 내가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모든 압박감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기쁨의 폭발이었다.

그 순간의 기쁨은 이제 매장에서 수많은 여성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여성이 옷을 고르는 순간에 느끼는 행복을 떠올릴 때도 있나?

당신도 잘 알다시피 옷은 많은 기능을 한다. 패션은 단순히 옷이 아니다. 하나의 아이디어이자 표현이며 가능성이다. 원하는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다. 우리 고객 그 누구도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으라고 강요받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고객이 우리가 제안하는 것 중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안한 그 룩을 그대로 따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완벽하게 납득이 가는 방식으로 아이템을 조합할 수도 있다.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는 컬렉션을 만들고 아름다운 제품을 창조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옷을 입는 여성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딸, 친구 그리고 손녀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옷의 생명력이다.

패션의 생명은 누군가의 몸 위에서 시작된다.

물론이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도 아름답지만, 거기에 아직 생명은 없다. 누군가가 그 옷을 선택할 때 비로소 생명을 지니기 시작한다. 어제 브루노 파블로브스키(Bruno Pavlovsky, 샤넬 패션 부문 회장)와 함께 서울 매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고객과 마주쳤다. 깜짝 놀라는 모습이 재밌었다. 그들 모두 멋져 보였다. 그리고 우리 옷을 입어보면서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내 직업이 단순히 패션 오브제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내 직업은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 그 대상이 누구라도 말이다.

오랫동안 샤넬 옷을 만지고 촬영했지만 직접 입어보고 싶은 적은 없었다. 아마 내가 여자였다면 달랐겠지만. 그러나 이번 공방 컬렉션을 촬영하면서 레오파드 패턴의 재킷을 남몰래 입어보았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쁘다!

사실 난 샤넬이 단순히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에 가깝다고 늘 여겨왔다. 누군가는 숭배하고, 나와는 거리가 먼 상징적인 무언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하니 샤넬은 종교가 아니라 아주 멋진 친구 같은 느낌이다.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범접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이해한다. 샤넬에 오기 전까지 나도 정확히 똑같이 느꼈다. 내가 이 재킷을 직접 디자인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난 언제나 늘 똑같은 옷만 입는다. 그래서 샤넬은 늘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브루노를 비롯한 샤넬 팀원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 ‘이들과 함께 일하면 지치지 않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유쾌했다. 그 느낌이 맞았다. 아틀리에와 장인, 팀원을 직접 만나고 나면 샤넬만이 가진 독특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지극히 인간적인 무언가에 깊이 뿌리를 둔 회사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그런 곳은 점점 더 드물어지고 있다.

2주 전 샤넬 하이 주얼리 이벤트를 취재하기 위해 라 파우자(La Pausa, 가브리엘 샤넬의 옛 별장)에 다녀왔다. 그곳에 가니 당신이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 언제나 하나의 캐리커처 같은 코코 샤넬이었다. 리츠 호텔이나 캉봉 거리 아틀리에에서 트위드 수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는 전설. 하지만 라 파우자에 가보니 인간 가브리엘 샤넬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다른 숨겨진 이면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전설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처럼 거의 굳어져 있다. 우리는 그녀가 나이 들었을 때의 인터뷰 등을 통해 대중적인 가상의 캐릭터처럼 알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라 파우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면서 완전히 다른 면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온통 즐거움이 가득했다. 올리브나무에 기어오르는 가브리엘, 담배를 피우는 가브리엘, 의자에서 잠든 가브리엘. 디자이너로서 그녀뿐 아니라,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 그녀를 연구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마주하게 된 거대한 전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내 첫 번째 캠페인을 라 파우자에서 촬영한 이유도 그중 하나다. 그녀와 연결된 무언가를 원했다. 동시에 나와 연결되고, 내가 말하는 ‘기쁨’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곳에 가봤으니, 그 공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은 큰 행운이다.

내가 일하면서 만난 샤넬의 이미지는 대부분 라거펠트의 샤넬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당신의 해석이나 라 파우자에서 발견한 가브리엘 샤넬의 흔적이 새로웠다.

물론 칼 라거펠트에게 엄청난 경외심과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 그가 하우스에 가져다준 모든 것은 대단하다. 그는 이 브랜드를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로 변형시켰다. 하지만 칼의 샤넬이 결국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그만의 해석’이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다. 아카이브를 뒤적이고 가브리엘에 대해 읽다 보면 아직 완전히 탐구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녀가 레오파드 프린트를 아주 사랑했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그녀는 1920년대에 이미 레오파드 프린트 드레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그녀는 직접 레오파드를 입었다. 대중이 샤넬 하면 떠올리지 못하는 이미지다. 샤르베(Charvet)를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1910년대에 남성용 셔츠를 입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셔츠 중 상당수가 보이 카펠(샤넬의 연인)의 옷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아직 세상에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모든 이야기는 또 다른 결을 더한다. 그러면 이 모든 과정이 갈수록 더 마법처럼 변해간다.

만약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해한다면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을까? 난 이번 공방 컬렉션을 보며 당신이 동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

어릴 적 난 공상가이자 ‘너드’였다. 동물에 관한 책을 사 모았다. 돌고래에 완전히 집착했다가 그다음 주에는 또 다른 동물에 빠지곤 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동물을 사랑한다. 자연의 피조물 모두를 사랑한다. 그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심지어 내 반려견도 이번 쇼에 등장했다. 말 그대로 진짜 걸어온 건 아니고, 가방 위에 그 모습을 새겼다. 동물 프린트도 사랑한다. 그건 많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아주 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나쁜 취향’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또 순식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해진다. 모든 것은 그것을 어떻게 스타일링하느냐에 달려 있다. 끝없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파리로 돌아가면 또 다른 가능성이 펼쳐지는 셈이다. 여러 컬렉션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나?

여러 컬렉션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코코 네쥬(Coco Neige)가 있고, 코코 비치(Coco Beach)가 있다.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이 있고, 꾸뛰르 컬렉션이 있으며, 공방 컬렉션과 크루즈 컬렉션이 있다. 그래서 샤넬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기존에는 하나의 팀이 모든 것을 작업했다. 난 정반대로 했다. 서로 다른 팀이 각기 다른 컬렉션을 작업하게 했다. 모든 사람이 날 찾아오는 대신 내가 직접 그들을 찾아간다. 이 미팅에서 저 미팅으로 계속 이동하는 거다. 덕분에 세 개 혹은 네 개의 컬렉션을 동시에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방식은 팀원에게도 많은 시간을 벌어준다. 만약 어떤 아이디어가 쇼를 위해 제때 준비되지 못했다면 개발을 계속 이어나가서 또 다른 컬렉션에 반영하면 된다.

멈춰 있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진화하는 아이디어를 다루는 것이 현대의 패션 디자이너다.

정확하다. 기술도 계속 발전해나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난 바쁜 나날이 좋다. 수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좋다. 서로 다른 팀, 서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좋다. 가끔 미팅이 빽빽하게 겹쳐 있을 때, 바로 그때 최고의 아이디어가 튀어나온다.

대화가 끝난 후 블라지는 옆방에 자리한 컬렉션 백스테이지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블라지가 팀원에게 내려준 미션과 같은 ‘보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 <스카페이스>의 미셸 파이퍼, 스파이더맨과 슈퍼맨, 페기 구겐하임과 다이애나 브릴랜드, 캐롤린 베셋 케네디 등 여러 여성과 아이콘의 이미지를 함께 확인했다. 거꾸로 찍은 꽃이나 유리병처럼 추상적인 이미지도 있었다. “이 이미지는 독특한 조합이다. 하지만 난 물질적인 디자이너다. 난 스케치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아틀리에 장인과 함께 소재에서 시작해 커팅하고 드레이핑하면서 컬렉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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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한국 관객은 블라지와 샤넬의 매력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큐비스트의 작품이 가득한 미술관을 거니는 모델들의 모습은 샤넬 챕터의 또 다른 장면으로 기록될 만했다. 무엇보다 내 기억 속에 남은 건 많은 여성이 블라지의 샤넬을 진정으로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건 우리가 이야기한 ‘기쁨’이었다. 누군가는 샤넬이 제안한 룩을 그대로 따랐고, 누군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조합하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순간 난 샤넬의 세상이 또 한 번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느꼈다. 일종의 해방감. 만약 블라지의 임무가 샤넬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라면 그는 분명 성공이다.

같은 날 밤 애프터 파티가 열리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아트홀의 구석에서 다시 한번 블라지와 마주쳤다.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그는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한 달 전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열린 2027 크루즈 컬렉션의 애프터 파티에서도 그는 끝까지 게스트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더 이상 베일에 둘러싸인 채 현학적인 말을 던지는 과거의 디자이너는 이제 없었다. 아마 그는 높은 자리에 앉아 가만히 멈춰 있는 걸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샤넬이라는 유기체와 함께 움직이는 걸 선호할 것이다. 그를 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제이디 스미스(Zadie Smith)의 격언이 떠오른다. “격식과 기쁨 사이에서, 기쁨을 택하라(Between propriety and joy, choose joy).” 지금 우린 모두 그와 함께 블라지의 기쁨을 선택하고 있다. VK

손기호

손기호

패션 에디터

패션은 본능적으로 즐기는 것이지만, 때로는 분석이 필요하다고 믿는 ‘올드 패션드’ 패션 에디터입니다. <보그>는 패션을 만끽하는 방법과 해석하는 방향을 동시에 제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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