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냐 재창조냐

뭔가 익숙한 프린트 티셔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가방. 혹자가 수치심 없는 도둑질이라 비난한다면 이유 있는 응용이라 두둔하겠다. 내셔널 브랜드, 카피냐 재창조냐 그것이 문제로다!



놀라운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유사품이 출현한 셀린의 ‘날개 가방 신드롬’에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물론 디자이너 제품이긴 하지만, 난 그저 아웃렛에서 철 지난 제품을 50% 세일가에 샀을 뿐이다. “이럴 수가. 내가 국내 SPA 브랜드에서 산 거랑 디자인이 완전히 똑같잖아! 소매만 다른 소재를 사용한 것까지. 흔치 않은 단추 색깔까지 빼다 박았네.” 패션팀 선배 S는 내가 입고 출근한 크리스 반 아셰의 남색 트렌치코트를 보더니 엄청난 범죄 현장을 포착한 선량한 시민처럼 눈이 왕방울만해진 채 흥분과 놀라움에 ‘치를 떨었다’. 며칠 뒤 그가 증거품으로 입고 온 국내 SPA 브랜드의 트렌치코트는 누가 봐도 카피를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것과 흡사했다. 색상, 디테일, 소재, 실루엣 등등(탕비실에서 마주친 우리는 거울 앞에서서 커플 룩이라도 입고 온 듯 박장대소했다).

사실 이런 해프닝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면 매의 눈을 가진 사설 탐정 같은 네티즌들이 해외 유명 브랜드의 진품과 국내 브랜드의 카피 제품을 조목조목 비교하며 힐난하는 고발성 글이 수두룩하니까. 그들의 공통적 논조는 ‘이런 부끄러운 짓을 하는 건 한국 뿐이다’지만, 해외에서도 세계적인 디자이너 제품을 모방하는 일은 12시가 되면 점심 먹는 것 만큼이나 흔한 일이다. 이런 디자인 방식에 가장 능한 건 SPA 브랜드. “너 스텔라 맥카트니 샀구나!”라고 말했을 때 “이거 자라 건데?”라는 일말의 부끄럼 없는 대답이 돌아오는 일도 그만큼 흔해졌다. 일례로 지난 5월 H&M이 선보인 ‘뉴 믹스’ 컬렉션은 가슴을 가로지르며 감싸는 흰색 발렌시아가 크롭트 브라 톱과 브이네크 라인에 메시 소재를 덧댄 셀린 드레스, 겐조의 아이코닉한 호랑이 스웨트 셔츠를 맹랑하게도 따라 해 언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물론 “그래서 뭐가 문제야?”라는 태도는 여전하지만.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하이패션의 민주화’ 라고 표현한다. 하이패션을 보다 저렴한 가격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는 뜻. 그리고 하이패션은 새로운 유행을 이끄는 위치에 있기에 카피의 형태로나마 그 디자인이 퍼져나가는 것은 패션계의 당연한 흐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패션 디자인은 디자인보호법에 부쳐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돼야 하는 유행의 시작점으로 보는 게 옳을지 모른다. 똑같이 발맹 가을 컬렉션의 다이아몬드 모티브 의상에서 시작하더라도, 국내 내셔널 브랜드와 해외 SPA 브랜드의 수용 방식에는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밤늦도록 디자인실에서 불철주야 일하는 국내 내셔널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디자인 로컬화의 법칙’!

“셀린의 트라페즈 백은 해외 브랜드들도 대놓고 따라 하잖아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원래 가방 옆구리의 날개 부분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원칙이거든요. 쇼핑백도 옆 부분이 불룩하게 나오면 보기 싫잖아요. 그런데 피비 파일로는 그 부분을 아예 밖으로 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 백을 탄생시킨 거예요. 디자인을 재해석하는 노하우는 ‘얼마나 기술적으로 따라 하느냐’의 문제죠. 단순히 가방 옆 부분에 삼각형 가죽을 덧대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 디자인이 탄생했는지 파악해 이미지를 구현하는 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다른 버전을 만들 수도 있고요.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에서 배우는 게 크죠.” 오피스 레이디가 선호하는 대표적 내셔널 브랜드의 디자이너 C는 꽤 심도 깊은 디자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코리안 버전을 만들 때 고려하는 요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방의 경우 스트랩이나 체인 길이, 크기 조절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한국 여성의 체형에 맞도록 스트랩 길이를 조금 짧게 하거나 선호하는 크기로 조정하는 등등. 가을 신상품을 예로 들자면, 구두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의 가방 컬렉션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금속 스파이크가 잔뜩 달려 있는데, 우리 디자인에는 한두 줄 정도만 넣을 생각이에요. 가방 자체가 너무 무거워도 반응이 좋지 않거든요. 이번 시즌에는 뱀피나 악어가죽 같은 특피가 유행이긴 하지만, 무시무시한 빨강이나 노골적인 초록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밝은 노랑이나 친근한 파랑이 적당해 보이는군요.”

패션계 사람들은 흔히 ‘예쁠수록 불편하다’ 혹은 ‘불편할수록 예뻐 보인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러나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내셔널 브랜드에서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평가 잣대는 실용성과 시장성. 내셔널 브랜드의 소비자들은 수입의 90%를 쇼핑하는 데 쓰거나 크기별, 종류별, 브랜드별로 가방 컬렉션을 구비하는 패피가 아니다. 큰맘 먹고 산 가방은 출근할 때, 친구 결혼식에 갈 때, 주말에 놀러 갈 때 주인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가방 크기는 A4종이의 3분의 2 사이즈인 샤넬 백 크기, 스트랩은 숄더뿐 아니라 크로스도 가능한 길이가 반응이 좋다. “지난 시즌에는 전 세계적으로 미니 백이 유행했죠.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자그마한 사이즈의 미니 백을 만들었답니다. 처음에는 아이폰만 겨우 들어가는 사이즈였는데, 출시할 때 갤럭시 폰까지 수납할 수 있도록 크기를 조절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뻤으나 잘 안 팔렸죠. 수납성 문제도 있지만, 크기에 비해 가격이 부담스러웠으니까요.”

다음날 밤, 나는 잘나간다는 컨템포러리 브랜드의 디자이너 Y와 은밀히 접촉했다. “의류 쪽에서 요즘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건 단연 겐조! 모두가 호랑이 스웨트 셔츠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요. 우리는 로컬화라기 보다 우리 브랜드화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우리 브랜드의 고객은 여성스러운 취향이라 호랑이 대신 좀더 귀여운 동물을 등장시키는 식이죠. 스포티한 아이템이 유행이라면 메시 소재처럼 보이는 레이스나 율동감 있는 절개선 디테일을 디자인에 응용하고요.” Y 역시 내셔널 브랜드의 주 타깃이 패션 흐름에 아주 민감한 그룹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브랜드의 소비자가 트렌드 세터가 되기보다 그 시즌의 유행에 동참할 수 있을 정도에 눈높이를 맞춘다.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발렌시아가 크롭트 톱을 누가 입을 수 있겠어요? 그 대안으로 우리는 크롭트 길이의 톱을 만든 뒤 안쪽에 이너 톱을 넣었죠. 그러면 노출 없이 짧아 보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유사한 분위기의 여성복 브랜드 디자이너 D도 비슷한 예를 들었다. 런웨이 룩에서 목선이 깊게 파여 있고 투명 시폰이 덧대져 있다면, 피부톤과 같은 옷감을 대고 그 위에 시폰을 덧대는 일명 ‘피커부’ 스타일로 처리 한단다. D가 디자인하는 의류 브랜드는 특히 얌전한 컨셉이라 노출 수위가 중요하다는 사실.

유명 디자이너 의상을 판매하는 편집 매장 계산대의 ‘디자인 카피용 구입 및 반품에 대한 경고문’ 과 달리, 내셔널 브랜드 디자인실은 카피 오명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혼 없는 디자인으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유행을 놓치지 않고도 브랜드 정체성을 가져갈지 고민하며 매일 밤 창작욕을 불태우는 중. 그러나 절대 판매율과 수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SPA 브랜드가 새롭고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어요. 사이즈도 다양할 뿐 아니라 저렴한 가격에 유행하는 옷을 부담 없이 사 입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죠.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가격대를 낮춰야 하고, 가격을 낮추려면 어쩔 수 없이 디테일부터 포기하게 됩니다. 결국 디자인도 재미가 없어지죠. 요즘엔 경쟁용 기획 제품을 따로 제작할 정도예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장의 수익에 급급한 회사들은 동급 내셔널 브랜드에서 특정 아이템이 잘된다고 하면 그 아이템을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하고요. 이제 옷은 디자인으로 팔리는 게 아니라 기획력으로 팔리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니섹스 캐주얼 브랜드의 디자이너 J는 장기적인 경제불황 속에서 내셔널 브랜드 시장은 집안 싸움일 뿐이라고 우울하게 털어놓았다. 누구도 동대문 시장과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의 질적 차이를 논할 수 없는 지금, 이들이 생각하는 해결책은 가격과 완성도를 높이는 것. 디자이너들 역시 디자인 작업을 넘어서 고객 취향을 끌어올리고 싶은 욕구를 누구나 갖고 있지만(패션 기자들만큼!) 아직 현실은 잿빛이다. “나름 트렌디한 일을 한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오히려 트렌디하지 않은 사람이 돼 가는 기분이에요. 백화점에 가서 서로 다른 브랜드 매장에 비슷한 티셔츠가 걸려 있으면 저게 요즘 유행이구나,라고 중얼거리며 내일은 저걸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죠.” 이럴 때일수록 디자인 로컬화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때. 사람들의 필요와 취향을 좀더 정확히 분석한다면 그것 또한 불황을 헤쳐갈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요즘 처럼 비밀 없는 시대에 디자이너들은 고군분투를 멈추지 말고, 고객들은 조금쯤 패션에 흥미를 가져보는 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