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을 위하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열광하는 건 20대였다.
정작 나이 든 관객들은 시큰둥했다.
노부부의 특별한 사랑은 영화화될 만큼 비현실적이지만,
우리의 늙음은 매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현실인 탓이다.

평일 극장 안은 한가했다. 관객이라고는 60대 부부와 나, 단 세 사람뿐이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시작되기 전, 부부는 인근에서 일어난 접촉 사고로 인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아들 내외를 걱정하느라 영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극장 안이 너무 덥다며 한바탕 소동도 벌였다. 그러는 동안 영화가 시작됐다. 76년간 부부로 살아온 장난꾸러기 조병만 할아버지와 소녀 감성 강계열 할머니의 이야기는 소문대로 낭만적이었다. 백 살 생일을 앞둔 할아버지에게 다섯 살 연하의 할머니가 묻는다. “기분이 어떻소?” “마음이 뜨악하지, 뭐. 세월이 가면 늙지만 어쩔 수 없다고. 꽃이고 나뭇잎이고 사람하고 똑같아요. 봄이 돼서 꽃이 피면 참 예뻐. 거기서 딱 멈추면 좋은데, 가을 되면 꼬부라져 서리 맞아 떨어진단 말이야. 그러면 다 헛게 돼.” 꽃송이 같던 서로의 청춘을 기억하는 다정한 노부부가 자연의 순리를 따라 죽음을 준비하는 동안, 현실의 중년 부부는 멀찌감치 따로 앉아 각자의 하품을 했다.

KBS <인간극장> ‘백발의 연인’ 편 주인공들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누적 관객 수 450만을 돌파하며 <워낭소리>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었다. 500만도 무리가 아니다. 흥미로운 건 관객의 과반수가 20대라는 사실이다. 중·장년층의 반응은 정작 시큰둥하다. 노부부의 특별한 사랑은 영화가 되었을 만큼 비현실적이지만, 늙음은 매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현실인 탓이다. 성숙과 노화는 별개의 문제다. 건방진 소리 같지만 내 경우만 봐도 그렇다. 올해로 나는 서른여섯이 되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긴 하나, 슈퍼파워 유전 덕분에 벌써부터 흰머리가 성성하다. 두 달에 한 번씩 하는 새치 염색으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다. 임신을 하면 염색도 못한다는데, 백발의 산모가 될 것을 상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그나마도 부지런을 떨어 지금이라도 냉동실에 난자를 집어넣었을 때의 얘기다. 난 아직 시집도 못 갔다. 계획한 바는 아니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은 경험을 통해 얻은 얄팍한 깨달음이라면 야무진 꿈과는 별개로 인생사의 대부분은 ‘어쩌다’로 흘러가다 ‘내 이럴 줄 알았다’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몇 년 전만 해도 그저 짐작만 했을 뿐인 이런저런 노화의 징후들을 직접 체험하는 일은 서글프기보단 난감하다. 앞으로도 익숙해지긴 힘들 것이다. 조병만 할아버지의 말처럼 그야말로 ‘뜨악한 기분’이다.

인생이라는 관광버스에 탑승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세월의 바다 앞에 도착하는 건 대략 서른 살 전후일 것이다. 망망대해를 처음 본 이들은 작은 파도에도 호들갑을 떤다. 왁자지껄 떠들고 알 수 없는 공포에 파르르 떨다가 영문도 모른 채 울컥울컥한다. 서른 즈음의 김광석은 “또 하루 멀어져 간다”며 씁쓸해했고, 최영미 시인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며(<서른, 잔치는 끝났다>), 30대에 접어든 심보선 시인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중략)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며 허무에 젖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단편소설 <삼십 세>,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청춘 시절>도 그 무렵의 불안과 혼란, 회의를 다룬다. 딱 그때까지다. 서른 살 이후로 생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그저 거기에 있는 일상인 것이다. 시간은 쉴 새 없이 밀려든다. 밥 먹듯 나이를 먹는다. 누군가는 꼭꼭 씹어 음미하고, 또 누군가는 후루룩 삼킨다. 어떤 식으로 소화하든 종국엔 마지막 밥상을 받는 날이 온다. 그러면 끝이다.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일단은 그렇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지난해 가을, 아직까지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남은 눈부시던 스타가 세상을 떠났을 무렵이다. 인생이 지구처럼 둥글다면 날짜변경선 같은 절반의 어떤 지점을 지나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순간은 가만히 찾아온다. ‘앞으로 내게 들려올 소식이란 기쁨보단 그 반대가 더 많겠구나. 혹은 무의미한 뉴스들이거나.’ 담담했다. 이제부터 시간은 거꾸로 흘러갈 것이다. 유난히 슬픈 소식들이 많이 들려왔다. 모르는 척해선 안 되는 모르는 척하고 싶은 일들이 늘어만 갔다. 당장 세상을 바꾸거나 하다못해 집 한 채 사진 못해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만큼은 되는 알량한 지위와 돈이 생겼다는 걸 가끔 실감할 때면 새삼 스스로가 무서웠다. 그래서 더 침묵했다. 비겁한 줄 알면서도 반성만 하다 그나마도 기억력을 핑계로 잊었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긴 어려워도 꼰대는 한순간이다.

몇 해 전, <철완 아톰>의 작사가로 유명한 다니카와 슌타로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여든 살을 훌쩍 넘긴 지금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백 세가 되어’라는 시에서 그는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늙어버린 육체를 이렇게 다독인다. “태어나기 전에도 내가 있다면/ 죽은 후에도 나는 있다/ 죽으면 죽은 것으로 살아간다.” 육체라는 단벌 외투는 낡아가지만 영혼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다만 징그러워질 뿐. 그건 노화보다 더 끔찍하다. 40년째 치매 노인을 위한 양로원을 찾아 아이처럼 순수해진 노인들을 돌봐온 시인은 어른의 나쁜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궁금해하지 않는다. 꽃이 피어도 그걸 당연한 줄로만 안다. 아니면 그 꽃은 무슨 색이고 어떤 모양으로 피었는지 시시콜콜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꽃이 피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두번째 나쁜 점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노부부는 매일같이 장난을 쳤다. 봄날의 꽃과 한여름의 개울물과 가을 낙엽과 한겨울 눈사람이 그들의 놀잇감이었다. 그리고 같은 운명을 지닌 서로를 측은해했다. 평생을 그랬다. 영화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열네 살 소녀를 찾아왔던 열아홉 살 소년은 백발이 된 할머니를 홀로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강원도 횡성의 산골짜기엔 그날도 눈이 내렸다. 할아버지의 무덤 위에 눈사람 동무를 만들어주고 발길을 돌리던 할머니는 그만 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불쌍해. 불쌍해 죽겠네. 할아버지 생각을 누가 하나. 나밖에 남은 사람이 없는데….” 또 한 번의 새해가 밝았다. 수십억 년 전부터 그래온 것처럼 뻔뻔하게도 세월은 무럭무럭 흘러간다. 모두가 공평하게 한 살씩을 보탰다. 나이가 많건 적건,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렇게 인생이라는 긴 순간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