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장악한 여자들

내년 아카데미 영화제 레드 카펫의 주인공은 건강한 사회적 주체로서 스크린에 우뚝 선 여배우들일 것이다. 바야흐로 2016년 스크린 안팎의 주인공은 세상을 리드하는 여자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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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상식은 고통에 허덕이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올해 여우주연상을 받은 <룸>의 브리 라슨은 10대에 납치, 감금되어 아들을 낳고 키우다가 간신히 탈출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어린 엄마를 연기했다. 2015년에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중년 여인으로 열연한 <스틸 앨리스>의 줄리안 무어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이전에 상을 받은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은 또 어떠했나. 갑자기 서민으로 추락한 상류층 여인이 정체성 혼란을 감당하지 못해 울먹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긍정적이고 밝은 캐릭터? 프리마돈나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불안과 공포를 그대로 표출한 <블랙 스완>의 나탈리 포트만에 비하면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회사의 모든 남자와 자버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동네 미친 언니’ 제니퍼 로렌스 정도가 희망찬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배우가 상을 받을 때마다 연기력을 인정하며 박수를 치면서도, 여자로 사는 괴로움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왜 죽을 만큼 고생하는 여자들만 상 받을 자격이 있나? 고통을 전시하는 대신 사회적 주체로서 건강한 자극을 주는 캐릭터가 주목받을 수는 없나?

흥미롭게도, 올해부터 새로운 여자 캐릭터들이 스크린을 뒤흔들 조짐을 보인다. 아네트 베닝의 역대 최고 연기라 평가받는 <20세기 여인들(20th Century Women)>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베닝은 경제공황 시절을 거쳐 건축가로 자수성가하는 엘리트 엄마를 연기한다. 때는 1979년. 시대의 트렌드에 발맞추는 쿨한 엄마임을 증명하기 위해 버켄스탁 샌들도 갖추고 있지만 시끄러운 펑크 록에 빠져드는 사춘기 아들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 걱정이다. 아들이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녀는 하숙생인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와 반항적으로 섹스를 즐기는 10대 소녀에게 도움을 청한다. 세컨드 웨이브 페미니즘 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아네트 베닝은 변화하는 시대의 공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아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엄마로서 관대함과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동시에 다른 시대가 오고 있음을 감지하는 기성세대 관찰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몸이 아프지도 않고 우울증 약도 먹지 않는,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며 성장하는 지식인 엄마 캐릭터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여자의 복합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데 능수능란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올해 <다가오는 것들>과 <엘르(Elle)>로 두 배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일단 <다가오는 것들>에서 위페르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등장한다. 대학 시절에 과격한 공산주의자로 혁명을 외쳤던 그녀는 시위를 하느라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들을 탐탁지 않아 하는 어른이 되었다. 학교와 집과 아픈 엄마 사이를 오가며 정신없이 살아가던 그녀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도 외도로 집을 나가버리자 시골에서 혁명을 도모하는 제자를 찾아간다. 밤낮없이 토론하며 세상을 바꿀 궁리를 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그녀는 “더는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는 자신을 인지하지만 꼰대처럼 잔소리를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을 되짚으며 중년으로서 정체성을 되묻는다. 여자 배우가 나이 들어 변해가는 일상을 경험하며 시종일관 세상과 철학을 고민한다. 정말 놀라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엘르>는 <원초적 본능> <로보캅> <쇼걸> 등으로 도발적 감독이라 불리던 폴 버호벤 감독의 귀환작이다. <엘르> 또한 강간 피해자가 오히려 강간범을 사디스틱하게 가지고 노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타의 추종이 불가능한 도발적 작품이다. 게임 회사 임원을 연기하는 위페르는 사방에 남자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어떤 피해자적 위치도 거부하며 자신의 뜻대로 남자들을 농락하고 지배하려 한다. 배우의 영화 장악력만을 따진다면 마땅히 오스카 여우주연상감이지만 <엘르>는 발상부터 변태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모든 영화사가 거절해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제작 운도 없었는데 상 복이 있을 리 없다.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줬으니 오스카 후보까지만이라도 지명되기를 빌어본다.

다른 막강한 여자 배우로는 <컨택트>와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로 전혀 다른 역할에 도전한 에이미 아담스가 있다. 현재 극찬이 쏟아지고 있는 SF 영화 <컨택트>에서 아담스가 맡은 역할은 하늘에 둥실 떠 있기만 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외계 물체와 대화를 시도하는 언어학 박사다. 외계인에게 쫓겨 달아나는 액션 장면은 없고 외계인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언어 과학을 총동원하는 신비로운 장면이 영화를 채운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로 주목받은 감독 드니 빌뇌브는 이번에도 장르와 여자 캐릭터를 결합해 남다른 전개와 호흡을 가진 특별한 장르 영화를 완성해냈다. 어떤 ‘맨스플레인’도 통하지 않을 절대 고수 여자 박사가 끌고 나가는 SF 영화인 셈이다. 디자이너 톰 포드의 업그레이드된 연출력을 볼 수 있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아담스는 하이엔드 아트 갤러리의 세계에서 불면의 밤을 경험하는 우아한 큐레이터로 변신한다. 영화 속 영화가 초현실처럼 겹쳐지는 세계에서 그녀는 스타일리시한 악몽으로 관객을 안내하는 마성의 여인이 된다.

반가운 배우도 캐릭터 다양화에 힘을 보탠다. 결혼하고 잠시 영화계를 떠났던 나탈리 포트만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를 연기하는 <재키(Jackie)>로 컴백한다. 갑자기 남편을 잃고 장례식이 거행되기까지 4일간 홀로 남겨진 영부인은 진실과 권력이 뒤엉키는 곳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한다. 구태의연한 역사 인물 영화일 거란 예상과 달리, 지난가을 뉴욕영화제에서 깜짝 공개되어 호평을 받았고 포트만은 여우주연상 강력 후보다운 인상을 남겼다.

거론된 여자 주인공들의 면면을 보고 과도하게 지적인 여자 캐릭터가 아카데미의 대세가 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차기 여우주연상 후보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배우는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의 엠마 스톤이다. 할리우드에서 배우를 꿈꾸지만 매번 오디션에서 탈락하는 소녀는 무명의 재즈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지고 그 설렘의 순간을 노래와 춤으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사랑에 빠져 우주를 유영하고 경쾌한 탭댄스로 신나는 마음을 공유한다. 낭만의 마법으로 무장한 영화의 사랑스러운 주인공이 된 그녀는 이미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두뇌를 자극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여자 캐릭터들은 할리우드 영화가 변화하고 있는 지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 여자 관객들은 자기 연민이 아니라 영감을 주는 여자들을 영화로 만나길 원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여자들이 세상을 리드하는 2016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