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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의 배신

2018.07.09

기부의 배신

기부는 어떤 경우라 해도 바람직할까? 방법에 따라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 무조건 보내버린 책 무더기만 봐도 그렇다.

기부는 물론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계급 이데올로기까지
전달하고, 자립을 위협하며, 대량 소비사회가 낳은 잉여의 처리
절차가 될 수 있다. 기부의
배신 같은 사태를 빚지 않으려면
이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젊어서 피가 왕성하게 끓던 시절에는 “기부란 자본주의적 착취를 화장발로 감추려는 술책일 뿐이야!” 하면서 불우 이웃 돕기나 자선 행위를 비웃었다. 근본주의적 해법이 아니면 모순만 더 심화된다는 게 나 같은 운동권들의 대체적 시각이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주장을 흔히 ‘좌익소아병’이라 부르는데, 19세기 어느 혁명가가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혁명이 앞당겨진다면서 자기 하인의 급료를 깎았다는 일화가 그런 경우다. 불평등이 심각할수록, 수술이 어려울수록, 당장의 응급처치가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허약해서 수술대에 올리면 금방 죽는다. 수술, 곧 개혁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고통을 견뎌내려면 먼저 체력과 영양 상태를 호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부와 자선이라는 응급조치는 설령 그것이 착한 자본가의 선의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좋은 것이다.

‘착한 자본가’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들이 바로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다. 세계 최고 순위를 다투는 자산가들이기도 하다. 워런 버핏의 생각은 명확하다. “만약 당신이 전체 인류 가운데 가장 운 좋은 1%에 든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머지 99%의 인류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가진 부(富)는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선진국에 살거나 운 좋게도 부모를 잘 만났다는 얘기일 뿐이며, 따라서 똑같이 부를 누려야 마땅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빚을 진 셈이라는 것이다.

워런 버핏의 재산은 원화로 환산해서 90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2006년부터 지금까지 30조원을 기부했고 앞으로도 전 재산의 85%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다. 빌 게이츠 재단의 지난 20년간 기부액은 36조원에 달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50억원을 기부하면 그 액수라고 한다. 어마어마한 부자들이니까 이런 일도 할 수 있다고? 이런 생각이 든다면, 평생 모은 50억원을 기부하고 떠난 김밥 할머니나 전 재산 3,000만원을 투척하고 돌아가신 구두닦이 할아버지를 떠올려보자. 기부는 부자건 그럭저럭 사는 사람이건 모두가 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기부는 어떤 경우라 해도 바람직한가? 기부의 정치경제학은 섣불리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가르쳐준다. 기부는 기부하는 방법에 따라 늘 우리를 배신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최근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가 아프리카에 기부하는 책에 대해 비판적 보도를 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르몽드>는 매년 아프리카에 기부하는 수백만 권의 책에 대해 “도서 기부가 아프리카 출판 생태계를 해친다”고 지적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출판 대국의 도서 기부 단체는 해마다 최소 600만 권의 책을 아프리카에 보낸다. 작은 단체까지 모두 합치면 1,000만 권이 넘는다. 그 결과 아프리카 국가의 정부는 도서 구입 예산을 한 푼도 책정하지 않아도 되는 ‘알리바이’를 확보했고, 그 나라의 출판산업은 더 이상 자생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미국, 영국의 독자들이 자기들에게는 필요 없는 책을 떠넘기면서 세금 감면 혜택과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는 칭송까지 듣는 것을 보면, 책 기부는 거의 악의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헌 옷 기부도 비슷하다. 옷을 보내면 그 나라 섬유·봉제산업은 새싹부터 시들어버린다. 이렇게 하여 기초 체력조차 없는 수혜국의 산업은 초토화된다. 이런 종류의 기부는 당장의 위기를 넘기려는 응급조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보다 뒷일은 제쳐두고 눈앞의 고통만 없애려는 ‘모르핀 투여’에 비유하는 게 나을 것이다.

책 기부가 가져오는 폐해는 아프리카 먼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와 출판 선진국을 자부하는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자랑하느라 늠름하고 화려한 공공 도서관을 덜렁 지어놓고는 도서관을 채울 수서 예산이 없어 고민한다. 그래서 짜낸 아이디어가 책 기부다. 기부자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대량 기부 도서에는 ‘OOO 장서’ 같은 라벨을 붙여 기념해주겠다고 유혹한다. 그 결과 도서관은 기부자 자신이 필요 없어서 떠넘긴 책, 80대 노인이 수십 년 전 보던 책을 무게로 달아 비치하기에 이르렀다. 지자체장들은 줄어든 수서 예산에 입을 벙긋거리면서 “우리 시 도서관은 장서량이 30만 권”이라고 자랑하며 다닌다.

책 기부는 기부 행위가 일으키는 폐해의 한 가지 사례일 뿐, 기부에는 그 밖에도 여러 위험성이 도사린다. 나라 사이에서건 개인들 사이에서건 이위험성은 마찬가지다.

첫째, 기부는 언제나 기부하는 재화에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실어 보낸다. 아니 다시 말하면, 기부하는 재화 자체가 이데올로기다. 목각 인형을 가지고 놀던 아프리카 아이에게 메칸더 브이를 쥐여주면 그때부터 아이는 거기에 깃든 기계문명과 산업화를 선망하고, 닳지 않는 플라스틱의 성질에 매혹된다. 기부자들은 자기들의 재화에 그들의 생활 방식, 사회구조, 역사를 실어 보내는 셈이다. 거기에 매혹된 이들은 당장의 명운이 달린 농업 개발보다 산업화를 서두를지 모른다. 대장간에서 만든 농기구가 필요한 사람들이 트랙터 공장을 원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공장은 선진국의 기계와 기술로 지어질 것이다.

일전에 어느 독지가의 후원을 받던 학생이 값비싼 롱 패딩을 사고 싶다고 하자 독지가가 후원을 끊어버린 일이 있었다. 나중에 기부 단체의 일 처리가 문제였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 독지가에 분개했다. 가난한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욕망의 수준이라도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부에 감춰진 계급 이데올로기에 화가 난 것이었다.

둘째, 기부는 자립을 위협한다. 기부 또는 자선이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에 자립을 해치고 도덕적 해이를 부른다는 뻔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가난은 게으름의 소치”라는 해묵은 거짓말일 뿐이다. 그보다는 기부 또는 자선이 한 사회의 조건을 무시한 채 기부자의 사회적 성과만 전달하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지는 탓에, 그나마 싹트던 자생력을 초토화한다는 것이다. 궁핍한 마을에 책이 밀려 들어오면 교육과 문화 수준이 몰라보게 높아질까?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는 하나도 다루고 있지 않은 책을 위해 도서관을 짓고 책 읽는 시간을 내야 한다. 나아가 책을 직접 인쇄하겠다고 나서면, 엄청난 가격의 인쇄기를 해외로부터 사들여야 한다. 기부국은 그들이 기부한 책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제3세계의 상황을 논할 때 자주 쓰는 말로 ‘저개발의 개발’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들은 개발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선진국의 무차별 원조로 인해 ‘저개발’이라는 방식으로 개발된 것이다.

셋째, 기부는 대량 소비사회가 낳은 잉여의 처리 절차이다. 이미 대도시와 선진국 독자들은 다 읽지도 못할 책을 과시적 소비나 이런저런 용도로 끊임없이 사들인다. 하지만 책은 원래 구입하는 비용보다 훨씬 많은 시간 비용을 들여야만 소비가 완성되는 기이한 상품이다. 선물 가운데 가장 푸대접을 받는 것이 책 선물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책은 필요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선물이지만, 읽을 의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처치 곤란한 분리수거품이다. 이 책은 기부의 방식으로 소화된다. 그러나 책을 기부 받는 아프리카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기부 받은 책으로 인해 자신의 책은 미처 꽂을 여유를 갖지 못한다. 1950년대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로 인해 한국의 자급 농업이 고사된 것처럼 말이다. 당시 정부는 촌구석을 떠나 공장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밀가루 수제비나마 실컷 먹게 하여 임금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라도 산업화에 성공했으니 행운이긴 하다.

우리는 기부에서만큼은 조건 없는 ‘묻지마 기부’를 해도 좋겠다. 알량한 선의를 앞세워 기부 받는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받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아무런 반대급부나 이해타산 없이,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을 보내야 한다. 예컨대 책을 보내는 것보다는 그 책을 자국에서 처리하고 남은 돈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 돈을 받는 사람들은 학교를 짓든, 마을 사랑방에 작은 서가를 비치하든, 자기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 돈을 쓸 것이다.

어쨌든 자선은 좋은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원시 부족들의 기이한 풍습 정도로 여겨왔던 증여 경제 또는 선물 경제에 대해 지금 새로운 관심을 갖는 중이다. 자본주의적 거래와 상품 교환이 아닌, 대가 없는 순수한 증여가 못사는 마을을 어떻게 결속시키고 빈곤과 자연의 재앙에서 그들을 어떻게 구해왔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함께 생존하는 방법으로서 자연스럽게 나눔의 의례를 고안했다.

‘기부의 배신’에도, 말하고 싶다. 기부는 여전히 좋은 것이다. 기부를 잘하기만 한다면.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이현석
    글쓴이
    안희곤(사월의책 대표)
    프랍 스타일링
    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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