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셀프 디펜스 선언

2018.09.05

셀프 디펜스 선언

셀프 디펜스는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무술이 아니다. 우리 여자들이 지닌 내면의 힘을 어떻게 쓸지 알려주는 사용 설명서에 가깝다. 스스로를 지키기에 우리는 충분히 강하다. 우연이 아닌, 스스로를 믿길!

꾸뛰르적 영감으로 가득한 패딩 코트와 팬츠는
5 몽클레르 크레이그 그린(5 Moncler Craig Green), 플랫폼 부츠는 에르메스(Hermès).

얼마 전 뮤지션 예은이 자기방어 기술 ‘크라브 마가(Krav Maga)’를 배우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낭심, 얼굴 등 근육이 최대한 없는 부분을 쳐라’ ‘남자를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휴대폰으로 치고 도망가라’ 같은 지침에 맞춰 예은은 충실히 밀치고 소리 지르고 도망갔다. 처음 체육관에 들어설 때와 달리 수업이 진행될수록 예은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예은이 크라브 마가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어느 날 하얀 차가 다녀오더니 “타세요” 하고 문을 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는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고 했다. 예은은 그날 이후 생각했다. 나를 보호해야겠다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필요하다고.

우리에게도 예은과 같은 경험은 차고 넘치도록 있다. 귀갓길 심야 버스에서 잠들었는데 옆자리 남자가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었다거나 성도착증 환자가 어두운 골목 한복판에서 바지를 내리는 일 정도는 너무 흔해서 여자 친구들 사이 대화 소재도 안 된다. 택시 기사로부터 “아가씨는 허벅지가 두꺼워서 남자들이 좋아하겠어요” 따위의 소리를 들으며 이동하고, 혼자 사는 원룸 손잡이나 창문에서 인기척이 분명한 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공공장소에서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을 느껴 소리를 지르면 ‘너무 예민한 거 아냐?’라는 누명까지 쓴다.

얼마 전 어느 후배는 으슥한 골목에서 한 남자에게 붙들려 주차장까지 끌려갔다. 순간 후배는 괴한의 손가락을 이빨로 물어뜯었고 무사히 위험 상황을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 후배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구입해 가방에 넣고 다녔지만, 호기심에 셀프 테스트를 했다가 평생 흘릴 분량의 눈물, 콧물로 세수를 한 이후 재구매는 하지 않고 있다. “호신술을 배워볼까도 생각했지만, 워낙 운동신경이 없어서 포기했어요. 제 명줄은 하늘의 뜻에 맡기렵니다.” 우연히 살아남은 여자들의 시대,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 자신의 안전을 ‘복불복’에 맡겨야 하는 것인가.

스쿨 오브 무브먼트를 찾아간 건 귀갓길 어두운 골목을 걸어갈 때마다 긴장감에 승모근이 뻣뻣해지는 통증을 도저히 참기 힘들던 날이었다. 평소 즐겨 찾던 사이트에서 최하란 대표의 글을 보고 라식 수술로 개안한 듯 눈이 번쩍 떠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건 무능력한 행동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전술적인 행동이기에 ‘도망이나 치는 게 아니다’.” 도망이 전술이라니, 괴한을 엎어치기로 날려버리는 것만이 호신술은 아니라는 계몽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스라엘에서 크라브 마가를 전수받고 한국에서 널리 알리고 있는 최하란 대표는 ‘셀프 디펜스(Self-defenc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호신술’이라고 하면 밀치고 발로 차는 물리적인 행동부터 떠올리죠. ‘자기방어’는 수동적으로 여겨지고요. ‘셀프 디펜스’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의미고, ‘정당방위’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요. 관찰, 판단, 말, 표정, 몸짓, 행동까지 전부 포함하기 때문에 셀프 디펜스의 범주는 상당히 넓어요. 자신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안전하게 지키는 모든 것이거든요. 상식에서 벗어난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셀프 디펜스입니다. 수업에서는 위험을 확인하는 것, 경계를 설정하는 것,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가장 많이 배울 거예요.”

셀프 디펜스 수업은 실제로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얼굴 높이로 올리며 거부 의사를
밝히는 동작을 취한다. 자기방어는 손을 올린 채 한 발을 앞으로 내민 가드 자세에서 가장 손쉽다. 많은 전문가들이 ‘하지 마세요’ ‘진정하세요’ ‘가세요’라고 고함치는 건 상대방에게 경고 의사를 전할 뿐 아니라 상대방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무릎반사처럼 위험 상황이라면 당연히 튀어나올 고함을 왜 굳이 연습까지 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너무 놀라면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도 있다. 프리즈(Freeze) 현상이다. 머릿속이 하얘지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평소 긴급 구조 번호 119, 112를 누르는 연습도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수업은 두 명씩 짝을 지어 한 명은 도망가고 한 명은 뒤쫓아가며 어깨를 치는 연습,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공격하는 ‘팜 힐 스트라이킹’, 발등으로 빠르게 차는 ‘킥’ 트레이닝으로 이어졌다. 호각 소리에 따라 공격자와 방어자 위치를 번갈아가며 연습했는데 이는 실제로 언제든 입장이 바뀔 수 있음을 몸소 깨닫게 했다. 상대방의 킥을 보호 장비로 받아낼 때 때로는 엄청난 타격이 느껴졌는데 이 역시 새삼스러운 감각이었다. 맞는 것도 때리는 것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쫓고 쫓기는 달리기는 위험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오기 위한 연습이 될 듯싶었다. 발 차기를 하거나 손을 뻗을 때마다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수강생 20여 명은 수업 시간 내내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발 차기를 하며 몸을 쓰는 즐거움을,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발산하는 쾌감을 느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발 차기 한 게 언제였더라? 고 1 때 새로 산 ‘워크맨’을 빌려간 오빠가 하루 만에 잃어버렸을 때였나? 그렇다면 소리 지르기는? 오빠를 발로 찬 그날? 우리는 아동기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생활하고 있어서 갑작스럽게 몸을 써야 할 때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폭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평소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부당한 상황에서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는 사실은 큰 깨달음이었다. 온갖 범죄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은 체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로 셀프 디펜스를 배운 후 부당한 회식 자리 참가 요구를 거절하거나, 입금이 늦은 거래처에 항의하는 등 일상 속에서 거절 의사를 또렷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학생도 여럿이다. 물론 육체적으로 크라브 마가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3~4개월 정도 꾸준히 수련하면 목을 조르거나 뒤에서 덮치는 상황에 대항할 정도가 된다. 셀프 디펜스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람만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여자들은 언젠가부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안전은 남이 지켜주는 것으로 여긴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조신하라’는 잔소리와 ‘연약한 여자’라는 수식어가 우리 스스로를 약하다고 믿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최하란 대표는 세계적인 패션 포토그래퍼 닉 나이트가 슈퍼모델 라라 스톤과 찍은 크라브 마가 영상을 보길 권했다. 칼로 위협당할 때, 양손으로 목을 조를 때, 뒤에서 안으려고 할 때, 라라 스톤은 크라브 마가를 통해 상대방을 제압한다. 인상 깊었던 건 그린 컬러 알라이아 숄더 백, 캘빈 클라인 스트랩 힐 등 패션 아이템이 호신용품으로도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날렵한 하이힐은 낭심 걷어차기에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 분노를 드러내며 용감하게 저항하는 라라 스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휴대폰, 머리핀, 자동차 열쇠 등 일상생활에서 쓰는 물건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셀프 디펜스에 대해 얘기했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사실 한결같았다. “여자가 남자를 어떻게 이겨? 어설프게 대응했다가 감정을 자극해 더 다치면 어떡해?” 최하란 대표는 편견이라고 말한다. “범죄자들은 완전범죄를 꿈꿔요. 우발적 폭력도 있지만 대부분 계획을 세워요. 끔찍한 얘기지만 그들은 희생자를 골라요. 손쉬워 보이는 약자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폭력을 행사하거든요. 그런데 격렬하게 반응하면 계획이 틀어지는 거죠. 경찰이 범죄자한테 물어보면 너무 강하게 반응해서 그냥 보냈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모든 상황에서 저항하는 게 답은 아니지만 정말 위험한 상태일 때는 저항하는 편이 나아요. ‘저항하지 않았으면 범죄자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반문해볼까요? 바로 답이 나오죠. 강간 미수가 미수에 그치는 건 여성들이 행동했기 때문이에요.”

항상 맞서 싸우라는 얘기는 아니라고 했다. 셀프 디펜스에 이기고 지는 건 없다. 안전할 수 있다면 도망을 치거나 금품 요구에도 응하는 편이 낫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기지를 발휘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좋다. “미디어 탓도 있어요. ‘여자가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보도하면 사람들은 ‘저항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현직 경찰의 의견도 다르지 않다. 여성 범죄 전담 형사 이회림은 저서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에서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는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괴성을 지르고 목덜미나 팔을 인정사정없이 깨물기라도 해야 한다”고 썼다. ‘소리 지르기’ ‘도망치기’ ‘깨물기’ ‘낭심 차기’ 네 가지를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편이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우리 편견과 달리 피해자의 수동적인 모습이 오히려 가해자의 폭력성을 가중시킨다는 몇몇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오랫동안 자기방어를 알리는 데 애써온 엘렌 스노틀랜드는 “수영을 배우듯 자기방어를 배워야 한다. 수영도 일종의 신체적 자기방어다. 자기방어는 물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안전을 추구한다는 점이 다르다. 여성들 모두의 내면에는 강인한 전사들이 존재하고 기회만 준다면 언제든 우리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타고난 키와 체격, 여자라는 조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위기 대처 능력은 키울 수 있다.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지키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연보다는 스스로를 믿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내면의 전사들을 불러낼 시간이다. 당신도, 나도,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

    에디터
    조소현(피처 에디터), 손은영(패션 에디터)
    포토그래퍼
    강혜원
    모델
    송경아
    헤어
    한지선
    메이크업
    홍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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