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니 새로운, 이제 1990년대가 아니라 1900년대입니다
요즘 복잡한 지구 사정을 떠올리면 손주는 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시간은 가고 패션 위크는 돌아옵니다. 디자이너는 매번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여야 하고요. 골 좀 아프겠군요.
지금 패션은 과거로 대피하는 중입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뉴스에 지쳐 눈을 돌린 겁니다. 한 번쯤은 우아한 회피를 하자는 심정이겠죠. 지난 2월 런웨이를 디너쇼로 대체한 록산다 일린칙 말마따나 “현실은 꽤 슬프고, 우리에겐 꿈이 필요하니까요.”

Dior 2026 S/S RTW

Dior 2026 S/S RTW
레이스, 러플, 리본, 과한 장식 일색입니다. 각종 매거진에서 1990년대 스타일을 참고하라는 기사를 내놓거나, ‘2016년이 돌아왔다’라고 주장하지만, 런웨이는 1900년대로 건너갑니다. 이 ‘과거로의 대피’를 주도한 건 조나단 앤더슨입니다. 지난여름, 디올 수장이 된 조나단은 타임머신을 탄 듯한 데뷔 컬렉션을 선보였거든요. 2026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에서 무슈 디올부터 앤디 워홀이 촬영한 장 미셸 바스키아, 그리고 루이 16세 궁정까지, 시대와 장르를 뒤섞었습니다. 중심은 18세기와 19세기 프랑스 남성복이었고요.

Dior 2026 S/S Menswear

Dior 2026 S/S Menswear
앤더슨은 옛것에 진심입니다. 디올 아틀리에를 달달 볶아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초판본급 퀄리티를 뽑아냈죠. 특히 공들인 건 웨이스트코트(Waistcoat), 그러니까 조끼입니다. <보그 런웨이> 패션 평론가 세라 모어(Sarah Mower)는 ‘핑크 페일 조끼와 실크 이브닝 스카프가 스쳐 갈 때가 또렷이 기억난다’라고 평했죠.

2026 가을/겨울 쇼에서는 조금 더 노골적인 시대극이 됩니다. 발레리나가 입는 튀튀 스커트가 등장하죠. 허리춤에 달린 트레인(Train, 뒤로 길게 끌리는 천 장식)이 걸을 때마다 살랑입니다. 여기에 크롭트 카디건처럼 변형한 바 재킷을 매치했고요. 그리고 프록코트(Frock Coat)도 등장합니다. 영화 <셜록 홈즈>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펄럭이며 입고 다니던 바로 그 코트요.


물론 목을 빳빳하게 세운 하이 스톡 칼라에 리젠시 시대의 크라바트(Cravat, 넥타이의 전신)를 맨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 흉내를 내는 남성과 데이트하는 건 부담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촛불 하나 켜놓고 깃펜으로 연애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 패션에 빠진 건 디올만이 아닙니다. 알라이아는 몸매가 드러나는 바디콘 드레스에 레이스를 폭탄처럼 터뜨렸고, 보테가 베네타는 아틀리에 기술을 총동원해 새로운 소재로 만든 러플을 선보였죠. 알베르타 페레티와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당장 식장에 들어가도 될 법한 하얀 러플 드레스를 내놓았고요.



Alberta Ferretti 2026 F/W RTW

Gabriela Hearst 2026 F/W RTW
지난 9월 컬렉션은 마리 앙투아네트로 도배되었습니다. V&A에서 파스텔 톤으로 가득한 패션을 기획 전시하자, 디자이너들은 약속이나 한 듯 파니에(Pannier, 엉덩이 보정 장치)와 페티코트(속치마)를 꺼내 들었습니다. 시몬 로샤, 에르뎀, 지암바티스타 발리까지. 올봄은 그야말로 프릴과 레이스 천국이 될 예정입니다.



미국 <보그> 컨트리뷰터 레어드 보렐리 퍼슨(Laird Borrelli-Persson)은 이걸 ‘폭풍의 언덕 효과’라고 설명하더군요. 하나 보태자면 ‘브리저튼 효과’도 될 수 있겠습니다. ‘나도 저런 옷 입고 사랑 한번 해볼까’ 하는 상상에 빠져들게 된다는 거죠. 마침 엠마 코린 주연 <오만과 편견>과 데이지 에드가 존스 주연 <이성과 감성> 등 리메이크작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분간 과거에 더 머물 겁니다. 가능하다면, 레이스와 러플에 둘러싸인 채로요.

Simone Rocha 2026 F/W RTW

Simone Rocha 2026 F/W R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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