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관한 초단편소설_김홍 ‘가족력’
집에 돌아가면 나는 딸이 된다. 할머니는 천국에 갔지만 여전히 나의 할머니다. 오늘 우연히 만난 당신과도 가족이 될지 모른다. 여러 세대의 소설가들이 가족에 관해 쓴 초단편소설 8편.
가족력

책이 귀신보다 낫다는 걸 깨달은 뒤에는 책을 보면 절하기로 결심했다. 육과 영을 모두 갖춘 아주 오래 사는 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귀신의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할 일이다. 내가 아는 한 귀신들은 주목받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서 겨우 자기 존재를 인정받았다. 선반에 놓인 책을 떨어뜨리거나 라디오 주파수에 간섭해 소음을 내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 봤자 영에 불과해서 고양이 머리털 한 번 쓰다듬지 못했다. 귀신은 아마 책을 동경할 것이다.
아주 오래 사는 것에 관해서라면 책도 한 수 접고 가는 존재가 있다. 바로 중성미자다. 빅뱅 직후 1초 만에 생겨난 입자들이라고 한다. 아주 오래된 물건에는 영이 생긴다는데, 이를테면 100년 된 장독대 같은 것이 도깨비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중성미자는 말하고 쓰는 법을 알까? 대형 서점의 물리학 코너에 가서 자신에 대해 쓰인 책을 읽을까? 귀신보다 내가 낫다며 거들먹대는 입자는 100년 전의 일을 어제처럼 기억할까?
내게는 몇 년 전의 일도 흐릿하다. 그날 밤에 대해서는 특히나 그렇다. 너에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럴수록 나는 더 알고 싶어진다. 자꾸 물어보면 너는 딴소리를 한다.
“5대조 이상의 조상을 위해서 지내는 제사를 시제(時祭)라고 한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를 위해 밥을 차리는 거야. 그것도 일종의 사랑 아닐까? 죽은 가족을 위해 내주는 선의잖아.”
“불공평해. 내가 절대 보지 못할 5대손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너는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안 하긴. 생명을 걸고 우주로 나가잖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래의 인류를 위해서.”
“누가?”
“쿠퍼. 머피 쿠퍼 박사의 아빠 조셉 쿠퍼가 그랬지. <인터스텔라> 안 봤어? <프로젝트 헤일메리>도 그런 내용 아니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류를 위해 노력하는 서사라는 게 있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친다.
“그런 영화는 호들갑이 너무 심해. 세상이 그렇게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아. 설령 무슨 일이 있다고 쳐도 망하는 건 인류겠지. 지구는 무사할 거야. 인간이 다 죽고 남은 게 쿼카든 아메바든 지들끼리 잘 살아가면 되지.”
“생각해봐. 태어날 수도 있던 너의 8대손이 태어날 수 없게 되는 거야. 걔가 없으면 지구상에 너를 위해 기억해줄 사람도 없어. 네가 이 세상에 귀신 형태로 남아 있다면 굉장히 서운할 거야.”
“내 생각에 그런 식으로 남아 있는 건 별 의미가 없어. 그래 봤자 나보다 오래 머물고 있는 중성미자한테 상대가 안 되니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에게 기억되고 싶은 맘도 없고, 모르는 후손이 차려놓은 밥을 얻어먹는다고 기쁠 것 같지 않다. 깔끔하게 사라지는 편이 낫다.
“그래도 이왕이면 친절한 편이 낫지 않아? 죽은 사람에게든 태어날 사람에게든.”
“친절한 것도 그 사람이 친절해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반대도 마찬가지고.”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기지개를 켠다. 못 견디게 지루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나는 애써 네 기분을 풀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너도 그날 밤의 비밀을 내게 말해주지 않으니까. 내게는 모든 생이 전생 같다. 무엇을 해도 한 번씩은 해본 일 같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이다. 나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너는 비밀을 깊이 감춰놓고 내게 보여주지 않는다.
“알고 싶어.”
나는 다시 한번 조른다. 번번이 냉정하게 거절하던 네가 웬일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익숙지 않은 침묵에 나는 떨기 시작한다. 정말로 내가 알고 싶었던 게 맞나 자문한다. 무엇이 궁금했던 건지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없다.
“너는 이미 알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도 몰라야 할 텐데 말이야. 너는 왜 본 적도 없는 영화 이야기를 하지? 읽은 적 없는 책에 대해 말하고. 살아본 적 없는 삶을 기억하고 있잖아. 왜 그렇다고 생각해?”
“네가 아니면 난 알 수 없어.”
너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린다. 하지만 결심한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긴장돼서 침을 꿀꺽 삼킨다. 그 소리를 네가 들었을까 봐 창피하다. 드디어 네가 입을 연다.
“내가 먼저 여기 왔어. 어쩌면 나 혼자 왔는지도 몰라. 네가 알고 싶은 것에 관해서라면 그렇게만 말해둘게. 우리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야. 한참 떠돌다가 적당한 곳을 찾으면 내려앉기로 했잖아. 새로 시작하기 위해 멀리 떠나온 거야. 우선은 몸을 만들고 그다음에 우리 일부를 헐어 영혼을 지을 거야. 그렇게 하나의 순환이 되겠지.”
혼란스럽다. 너는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내가 먼저였다. 내가 나를 헐어 너를 만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너랑 나는 원래부터 하나의 존재였으니까. 혼자서 오래 떠돌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만들었어. 그러니 너처럼 생각해도 맞고 내 말도 맞아. 우리가 둘로 나뉠 것을 결심한 게 그날 밤의 일이야. 여긴 낮도 밤도 없지만 슬프고 외로운 생각은 대체로 밤에 찾아오니까. 이제는 너도 모른 척할 필요 없어. 저기 보이는 저곳에 우리 같이 도착해야 할 것 같아.”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이 구별되지 않는다. 네가 말한 대로고, 그건 곧 내가 하는 말이고, 기억하는 모든 순간은 모두의 시간. 우리는 새로운 별에 도착한다. 갓난아기의 정수리 같은 지표를 향해 천천히 내려간다. 영과 육의 모든 것을 담은 나선형의 구조가 가라앉는다.
“태어나면 뭘 하고 싶어?”
“걷고. 말하고. 의식도 못한 채 숨 쉬고··· 책을 읽고··· 그리고···”
“그리고?”
“인류가 될게. 그걸 새로운 가족의 이름으로 할 거야.”
김홍 문학계의 주성치, 웃음 해방꾼 김홍. 작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의 띠지에 적힌 글귀다.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홍은 소설집 <여기서 울지 마세요>, 장편소설 <스모킹 오레오> <엉엉> <프라이스 킹!!!> <말뚝들>을 펴냈고, 2023년 문학동네소설상, 2025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그래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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